글: 소몽(蕭夢)
생전에 혁혁했던 도르곤이 겨우 말에서 낙마해서 죽었다는 것에는 의문이 많이 들지 않을 수 없고, 말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도르곤의 사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고질병이 도진 것일까? 아니면 모살당한 것일까? 아니면 병이 들어 자연사하거나 사고사한 것일까? 이것은 모두 수수께끼이다. 마치 누르하치가 도르곤에게 칸의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수수께끼이다. 그렇다면 생전에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으며 신체건강했던 도르곤이 도대체 어떻게 죽게 된 것일까?
도르곤의 사인에 관해서는 세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 순치제가 사람을 보내어 도르곤을 모살했다는 것이다. 도르곤은 순치를 보좌하여 등극하게 한 후에 확실히 이 어린 황제를 안중에 두지 않았고, 심지어 공공연히 사람들 앞에서 순치제를 혼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순치제의 제사(帝師)와 신변의 일부 대신들의 불만을 산다. 그러나 나이도 어리고 권력도 없던 순치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꾹 참을 수밖에 없었고, 한을 마음에 쌓아둘 수밖에 없었다.
도르곤이 섭정왕으로 권력을 농단할 때, 황숙부(皇叔父)라는 칭호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나중에는 황제로 하여금 그를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 부르게 한다. 이뿐아니라, 그는 또 다른 보정대신을 밀어내고, 자기의 동생인 도도(多鐸)이 그 자리를 맡게 한다.
이것 뿐아니라, 도르곤이 행차할 때의 의장대는 황제와 이미 차이가 없었다. 대신들은 명절이나 행사날이 되면, 먼저 순치제를 배알하고 다시 도르곤의 집으로 가서 섭정왕 도르곤을 배알했다. 이를 보면 도르곤은 이미 황제에 상당했다. 그래서 순치제는 여러가지 불만을 갖게 되고, 그들간의 갈등은 계속 격화된다.
순치7년, 도르곤은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서 상처를 입고, 치료를 하지 못해 사망한다. 도르곤의 사망소식이 경성에 전해졌을 때, 순치제 푸린(福臨)은 특별히 그의 장례를 국상으로 거행한다. 도르곤과 적처를 각각 의황제(義皇帝)와 의황후(義皇后)로 추존한다. 이때 푸린의 나이는 13살이었다. 13살짜리 아이가 아직 친정도 하지 않았는데, 설사 도르곤에게 불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상세한 계획ㅇㄹ 세워서 도르곤을 모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보면 순치제가 도르곤을 모살했다는 견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만일 효장황태후가 사람을 시켜서 도르곤을 모살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믿을만한 이유가 있다. 효장황태후의 지모라면 도르곤이 낙마하여 상처를 입은 틈을 타서 그를 모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효장황태후는 순치제의 황위와 안전을 보전하기 위하여 여러해동안 은인자중했다. 효장황태후가 도르곤에게 시집갔다고 해도 좋고, 가지 않았다고 해도 좋다. 어쨌든 도르곤이 순치제를 보정하는 기간동안, 효장황태후는 확실히 도르곤의 제약을 받았다. 후궁은 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고 하여 효장황태후를 후궁으로 돌려보내고, 그녀가 다시는 조정의 전면에 나설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도르곤은 장기간 조정의 대권을 독점한다. 그가 일을 처리하는 수단이라든지 아니면 그에게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복하는 것은 모두 효장황태후에게 불만을 산다.
특히, 홍타이시(청태종)의 장남 하오거가 있다. 하오거는 한때 도르곤과 황위를 다투었던 사람이다. 결국은 푸린이 등극하는 것으로 끝난다. 도르곤이 보정대신으로 섭정왕이 될 때, 하오거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이것은 별 것이 아니다. 도르곤은 자기 수중의 권력을 이용하여, 하오거에게 보복한다. 그를 구금하고 귀롭혀서 죽음으로 몰고갔다. 하오거가 죽자, 도르곤은 하오거의 처를 취한다. 만일 효장황태후가 시집갔다는 게 사실이라면, 이때 도르곤이 한 행동은 효장황태후에게는 체면상하는 일일 것이다. 이를 보면 효장황태후가 도르곤에게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도르곤은 순치제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어린 황제를 자신의 손아귀 안에 두었다. 이를 효장황태후도 보고 있었다. 당연히 마음이 조급했을 것이고, 그녀의 지모로 도르곤이 부상을 입었을 때, 이를 기화로 그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다음으로, 도르곤은 황제를 본따 자기도 궁녀를 뽑았다. 조선에도 미녀를 자신의 첩으로 보내라고 핍박했다. 만일 도르곤이 행차하는 의장대가 황제와 다를 바 없다면 그는 생활에서 누리는 것도 황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일찌기 공공연히 명나라황제를 본따 자신이 궁녀를 뽑는다. 심지어 유부녀도 빼앗았다. 그리고 조선에는 공주를 자기 첩으로 보내라고 핍박한다. 도르곤의 행위는 이미 황권의 위엄에 도전하는 수준이다. 이는 순치제의 황제로서의 위엄에 큰 손상을 입힌다. 자연히 효장황태후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만일 이때 효장황태후가 아들의 생명과 황권을 위하여, 부득이 도르곤에게 시집갔다면, 도르곤의 이런 생활을 다 보았을 것이다. 효장황태후에게 살심이 일었다고 믿을 수 있다. 다만 효장황태후가 최종결심을 내리게 된 것은 이런 자잘한 일들 때문은 아닐 것이고, 도르곤의 하오거 및 지르하랑에게 한 과도한 처분때문일 것이다.
둘째, 도르곤의 자연사. 어떤 사학자는 이렇게 고증했다. 도르곤은 자연질병으로 사망한 것이고 모살과는 관계가 없다고. 자연사는 일부 주류의 견해가 된다. 도르곤의 신체는 전쟁으로 상당한 후유증이 남았다는 것이다. 도르곤이 낙마한 후에 다른 질병과 합병증이 발생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본다. 즉, 충분히 이해되고 해석이 되는 설이다.
특히 뇌혈관중의 뇌일혈은 사망을 빠르게 하는 일종의 급병이다. 그래서 도르곤이 낙마하여 부상하고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아주 짧은 것이다. 이를 보면 이런 질볍은 급하게 오고 빨리 진행된다. 어떤 사람은 뇌혈관중의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분석한다. 사서의 기록을 보면, 이런 견해는 도르곤의 사망방식과 맞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도르곤이 소위 편두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런 질병은 자주 외지로 나가고 풍토가 맞지 않고, 기후차이가 극심하며 피로가 과도한 것과 관련이 있다. 당연히 도르곤은 입관후에 확실히 이런 것들을 겪었다. 이것은 모두 두통질병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요소가 된다.
셋째, 아지거(阿濟格)때문에 홧병으로 죽었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황당한 주장일 것이다. 다만 <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도르곤이 죽기 전에, 그의 형인 아지거는 목숨이 오늘내일하는 도르곤을 보러 가지 않고, 장막안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도르곤을 보러 가지 않고 도르곤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급히 몽골귀족 갈단(葛丹)의 딸을 취하러 간다.
만일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도르곤과 형인 아지거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같다. 아지거는 자기가 섭정왕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아믐 속으로 도르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번 사냥에서 도르곤과 동시에 갈단의 딸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했다. 그래서 도르곤의 부상이 엄중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생각한 것은 형제의 정이 아니라, 먼저 손을 써서 여자를 빼앗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 도르곤이 일단 죽고나면, 국상기간이기 때문에 여자를 취할 수 없게 된다. 아지거의 이런 행위에 대하여 누군가가 살을 덧붙여서 위중한 도르곤에게 얘기했을 것이고, 도르곤은 병중에 화가 치밀어올라 죽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만일 이런 기록이 사실이라면, 아지거의 그런 멍청한 짓이 도르곤의 화를 돋구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진실은 더 고증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도르곤이 뇌혈관질병으로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도르곤의 가족에는 이런 질병으로 사망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르곤은 질병으로 사망한 것이지 소위 모살을 당한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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