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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도르곤)

도르곤은 정말 낙마로 인하여 죽었을까?

by 중은우시 2019. 12. 26.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도르곤의 사망에 대하여 사서에 기록된 것은 아주 간결하다. 겨우 한 마디이다: 낙마(墜馬). 전인과 후과에 대하여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사정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었을까?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던 인물의 죽음에 무슨 이상한 점은 없었을까?


그러나, 청나라의 관방사료에는 도르곤의 사망에 대하여 앞뒤 과정이 모두 상세히 적혀 있지 않다. 도르곤이 돌연 사망한 시기가 미묘하다는 점, 사후에 그는 청산되는 결과를 맞이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필자는 이 사건은 겉모습 아래어 분명히 깊은 심층적인 원인, 즉 말못할 비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비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배경과 인물관계 ,이익관계등등을 상펴보았고, 사료에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과 세부사항에 주목했다. 그렇게 상세하게 분석을 해보았다.


현재 사학계에서 보편적인 견해는 명말청초 담천(談遷)의 <북유록(北遊錄)>의 기록에 근거한다: 순치7년 십일월, 그는 고북구(古北口) 밖으로 사냥을 떠난다. 그리고 낙마로 무릎에 중상을 입었고, 양고(凉膏)를 발랐다. 태의 부윤조(傅胤祖)는 약을 잘못썼다고 생각한다. 십이월 초구일 카라성(喀喇城, 지금의 열하(熱河) 경내)에서 사망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태의(太醫)에 관한 내용은 당시 청나라 관방사서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의문이 상당히 크다. 당시 북경의 담천은 '내부소식'을 들었고, 그래서 <북유록>에 기록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내용의 신뢰도는 아주 높다고 여긴다. 당시 많은 내막은 관방사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도르곤이 죽은 후 뼈를 재로 만들어 뿌렸다든지 하는 것도 위광국(衛匡國)의 <달달전기(靼韃戰記)>에 기록되어 있다.


현실생활에서, 이런 기괴한 현상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건장하고 평생 감기도 몇번 걸리지 않은 사람이 돌연 급사한다; 병으로 골골대며 평생을 사는 사람은 오히여 대부분 장수한다. 도르곤은 후자에 속한다. 그는 20여세이후 항상 병에 시달렸다. 그 자신의 말에서도 나오고 주변사람의 기록도 있으며, 사료에도 여러번 기록되어 있다. 그의 건장한 형제 조카들은 많은 경우 2,3십세에 돌연 병사했지만, 도르곤은 건강상태가 계속 좋지 않았음에도 39살까지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죽기 며칠전까지 정상적으로 사냥을 나갔다. 이를 보면 그는 당시에 무슨 엄중한 증상은 없었던 것이다. 무슨 불치병같은 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람은 '당연하게' 죽지 않는다. 그리고 순치가 대혼친정(大婚親政)을 앞둔 날에. 그러다보니 너무나 미묘하게 여겨진다. 도르곤의 생전 마지막 사냥에 관한 전과정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읽어보면 조금은 이상하다고 여겨진다.


<내국사원만문당안>의 기록에 따르면, 순치7년 십일월 "십삼일,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의 몸이 좋지 않아서, 집에서 머물렀는데 답답해 하며 야외로 나가 사냥을 하고 싶어했다." 이번 사냥에 도르곤은 청왕조의 대부분의 정치핵심인물을 데려간다. 그중에는 화석정친왕 지르하랑, 화석바투루친왕 아지거, 화석예친왕 도니, 손친왕 만다하이, 다라승택군왕 슈어사이, 다라단중군왕 보로, 다라겸군왕 와크다, 그리고 여러 패륵, 패자, 공, 고산액진등도 데려간다.


이들 수행한 친왕, 군왕 중에는 도르곤의 정적도 있고, 도르곤의 심복중신도 있다. 도르곤이 그들을 데려간 것은 첫째, 정무처리의 편의를 위해서이다. 동시에 자신이 비록 새외에 나가 있지만, 여전히 조정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도르곤과 함께 사냥을 따라간 왕공귀족들은 경사 제화문(齊化門)을 출발한다. 가는 길에 사냥을 즐겼다. 7일이후인 십일월 십팔일 도르곤일행은 준화(遵化) 경내에 이른다. 그날 탕천(湯泉)에 투숙한다. 이날 도르곤은 정친왕 지르하랑과 영친왕 아지거에게 안장등 마구를 갖춘 말 한 마리씩고, 안장등 마구를 갖추지 않은 말 한마리씩을 하사한다; 만다하이, 도니, 보로에게는 말 한 마리씩을 하사한다. 도르곤이 데려온 이들 왕공귀족들은 탕천에서 목욕을 한 후 다음날 탕천을 떠난다. "십구일, 준화에서 투숙했고, 이십일 삼둔영(三屯營)에서 투숙한다."


순치7년 "십이월 초오일, 유한하(劉漢河)에 투숙한다. 초칠일, 카라성에 투숙한다. 그날 황부섭정왕은 병이 중하여 휴식했다. 초구일, 무자, 술시, 황부성정왕이 갑자기 붕어하다(猝崩)"


자세히 위 기록을 읽어보고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를 결합하면, 발견할 수 있다. 도르곤은 유한하에 주둔하며 사냥하던 때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부근의 카라성으로 모셔가서 휴양하게 한 것이다. <청세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카라성은 막 공사에 착공했고, 집도 지어져 있지 않았다. 모두가 영장(營帳)을 쳐서 그 안에서 기거했다. 조건이 이렇게 누추하였다. 만일 도르곤이 카라성에 오기 전에 이미 병이 심해졌다면, 왜 이때 또 다른 황무지인 카라성으로 모셔갔을까? 병든 몸으로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몰랐을까?


다시 한번 자세히 <청세조실록>을 읽어보면, 이런 문구가 나온다: "다시 초팔일 영왕(英王)은 섭정왕의 병이 악화된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하여 초구일 사람을 보내 갈단(葛丹)의 딸을 취했다." 이를 보면, 도르곤은 초칠에 카라성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몸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건강상태가 카라성에 도착한 다음 날인 초팔일에 급격히 악회된다. 심지어 위중한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뭔가가 숨겨져 있을 것같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도르곤이 단순히 낙마로 인한 무릎부상같은 작은 상처때문에 돌연 위중해져서 사망하기에는 실로 시간이 너무 짧다. 병이 위중해진 후 사망하기까지 30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원시사료에서도 '돌연히 붕어했다'는 말을 쓴 것일 것이다.


만일 그가 병이 위중해져서 자연사망한 것이라면, 사냥과정에서 건강상태가 아직 괜찮았고, 기분도 좋았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일 그가 정말 낙마로 인한 무릎부상이 악화되었다면, 무릎부상이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사료는 분명히 당시에 바로 기록한 것이다. <기거주(起居注)>와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도르곤에 대하여 '황부섭정왕'이라는 말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한 "붕어(崩)'와 같이 황제가 사망하였을 때나 쓸 수 있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료의 진실성은 아주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도르곤의 진정한 사망원인을 추론하는데 중요한 하나의 근거가 된다.


이런 모든 의문점에 따르면 도르곤의 사망에는 커다란 내막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료의 부족으로, 우리가 더 깊이 파고들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