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아이신줴뤄 도르곤(愛新覺羅 多爾袞)은 청태조 누르하치의 열네째 아들이며, 청태종 홍타이시(皇太極)의 동생이다. 그는 나이 겨우 14살때 패륵(貝勒)에 봉해졌고, 나중에 전공이 탁월하여 예친왕(睿親王)에 봉해진다. 청나라의 개국과정에서, 도르곤은 홍타이시를 받들고 심양(瀋陽)을 점령하여, 패업을 이루게 하였으니 공로가 혁혁하다; 홍타이시가 죽은 후에는 도르곤이 섭정왕에 올라, 실질적으로 청나라의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 중원을 차지한 것)을 전후한 몇년간 군정사무를 통할했다. 만청정권이 북경을 차지하고, 강산을 빼앗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643년 8월 9일, 아직 관외(關外, 산해관의 바깥, 즉 지금의 동북지역)에 머물고 있던 만청에 큰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이날 홍타이시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무를 처리하고 있었지만, 저녁이 되어서 돌연 병이나서 죽어버리고 만다. 돌연한 사태가 벌어지다보니, 홍타이시는 죽기 전에 유언도 남기지 못했고, 후계자를 제대로 지명하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격렬한 황위쟁탈전이 한바탕 벌어지게 된다.
만주족의 전통에 따르면, 황위의 계승에는 황친귀족들이 집단적으로 토론하여 결정하게 되어 있다. 당시에는 주로 예친왕 다이샨(代善), 정친왕 지얼하랑(濟爾哈朗), 예친왕 도르곤, 숙친왕 하오거(豪格), 영친왕 아지거(阿濟格), 예친왕(豫親王) 도도(多鐸)와 영친왕 아다리(阿達禮)의 7명이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이 7명 중에서, 숙친왕 하오거와 예친왕 도르곤이 황제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하오거는 홍타이시(청태종)의 장남이다. 역사서에는 "용모가 비범하고, 궁마(弓馬)의 재주를 가졌다"고 적고 있다. 하오거는 맹장이다. 그는 오랫동안 전장터를 누볐으며, 연이어 전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홍타이시의 생전에 정황기(正黃旗), 상황기(鑲黃旗), 정남기(正藍旗)의 세 기(旗)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열네째 아들로서, 홍타이시의 친동생이다. 그는 "계모가 뛰어났고,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켰으며, 야전에서도 반드시 이겼다" 그는 정백기(正白旗), 상백기(鑲白箕)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외에 그는 중요한 인물인 형제 아지거와 도도의 도움도 받고 있었다. 하오거와 도르곤의 두 사람은 세력이 엇비슷했고, 서로 대등하게 싸웠따. 거의 각 기들간에 혼전을 불러올 지경이었따.
쌍방이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서 긴장된 대립상태하에서, 정친왕 지얼하랑이 하나의 절충방안을 내놓는다. 나이 6살된 황자 푸린(福臨)을 황제에 앉히자는 것이다. 도르곤은 이해관계를 따져본 후에 억지로 황제위를 다투다가는 내분이 일어나고, 만청의 세력만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만일 하오거가 즉위한다면, 도르곤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고, 나중에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했겠지만, 나이어린 푸린이 즉위한다면, 내분도 피할 수 있고, 하오거에 타격을 가할 수도 있으며, 자신은 섭정왕이 될 수가 있었다. 결국 지얼하랑의 절충안을 여러 사람들이 받아들여, 도르곤과 지얼하랑이 공동으로 보정(輔政)하게 된다.
순치제가 즉위한 후, 도르곤은 점차 하오거와 다른 중신들을 배척하고,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이 시기에 청나라의 숙적인 명나라정권은 천지개벽하는 변화를 겪고 있었따.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이 북경을 함락시켰지만,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권교체를 막 달성한 청나라는 중원을 차지할 객관적 주관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농민군이 북경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성경(심양)에 들려오자, 도르곤은 즉시 범문정등을 불러서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의 형세를 분석한다. 도르곤은 범문정의 건의를 받아들여, 명나라의 괸리, 진신(縉紳), 백성들의 농민군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를 이끌고 산해관을 넘기로 결정한다. 도르곤의 적극적인 태도에 산해관을 지키던 수비장수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한다. 청나라군대는 순조롭게 산해관을 접수한다. 그리고 가볍게 이자성의 대순정권으로부터 북경을 빼앗아버린다. 청나라의 대군은 거의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신속히 산해관에 들어왔고, 내지를 향하여 신속히 전진했다.
1644년 5월 2일, 청나라의 철기군은 조양문을 통하여 북경성에 진입한다. 도르곤은 자금성에 들어갔고 무영전에서 정사를 본다.
다만, 청나라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수도를 어디로 정하느냐는 문제에 있어서, 만주귀족들간에 심각한 의견충돌이 나타난다. 조선의 <<이조인조실록>>에 따르면, "팔왕(아지거)은 구왕(도르곤)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요동을 얻었을 때 살륙을 저지르지 않아서, 청나라사람들이 요동사람들에게 많이 죽임을 당했다. 이제 이번 기회에 병사의 위력을 떨치면서 대거 도살을 한 후 몇몇 왕을 남겨서 연경을 지키게 하고, 대군은 역시 심양으로 돌아가서 지키자. 혹은 산해관까지 물러나서 지키자. 그러면 후환이 없을 것이다. 구왕은 선황이 일찌기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북도(북경)를 얻는다면, 당연히 수도를 옮겨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하물며 지금은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버리고 요동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두 왕은 의견이 합치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로간에 간격이 생겼다.운운" 아지거는 도르곤의 친형제이다. 도르곤이 아주 믿는 심복이다. 두 사람은 실제는 같은 정치집단에 속한다. 그러나, 수도이전문제에 있어서는 같은 정치집단내에서도 서로 다른 인식이 존재했다. 이를 보면 만청귀족내부에 의견차이가 아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많은 만청귀족은 모두 북경에서 대거 살륙을 저지르고 노략질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 후에 관외의 성격으오 돌아가자는 것이었따. 도르곤은 이런 주장들을 배척하고, 옛날 홍타이시의 유언을 이용하여, 북경을 수도로 정한다. 이는 그의 높은 정치적 식견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르곤은 군대를 이끌고 북경에 주둔한 후, 만주귀족들은 북경성내에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3일간 약탈하고, 노인과 어른은 모조리 죽인다. 그저 어린아이만 남길 것이다" 이를 통하여 혼란국면을 조성한 후, 도르곤이 성경으로 되돌아가도록 핍박할 생각이었다. 도르곤은 여러차례 살육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순치제로 하여금 하루빨리 북경으로 오도록 조치했다. 이를 통하여 귀족들이 요동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그만두도록 하려 했다. 도르곤의 조치하에 순치제는 8월에 성경을 출발하여, 9월에 북경에 도착한다. 십월 초하루, 자금성 무영전에서 황제위에 등극하는 행사를 벌인다. 북경을 수도로 정하고 황제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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