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도르곤)

도르곤은 왜 황제에 오르지 못했는가?

중은우시 2012. 3. 12. 19:07

글: 이성능(李聲能)

 

도르곤은 누르하치, 홍타이시이후 대청왕조의 제3대정권에서 핵심인물이고, 걸출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이다. 그는 16세때 군대를 이끌고, 몽골을 정복하고, 조선을 정벌했으며, 대명을 토벌했고, 전투마다 승리했다. 33세에는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넘었으며, 파죽지세로 대청의 천하통일을 완성한다. 그의 후반생은 계속 황권의 중심에 있었고, 대청황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가 만일 황위를 탈취하려고 하였다면 아마도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상의 조조와 마찬가지로, 시종 황위를 빼앗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황제에 오르고자 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아예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인가?

 

명나라 만력40년(1612년) 십월 이십오일, 하늘이 아직 밝기도 전에, 허투아라성의 누르하치의 집에서 사내아이가 고고의 성을 울리며 태어난다. 그가 바로 누르하치의 14째 아들인 도르곤이다. 도르곤에게는 7살이 많은 형이 있었는데 아지거(阿濟格)라고 했다. 2년후, 모친은 다시 동생을 낳으니, 이름이 도도(多鐸)이다. 모친인 아바하이(阿巴亥)는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고 있고, 도르곤의 3형제는 누르하치에게는 제일 어린 아들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부친 누르하치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는다.

 

다만, 많은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듯이, 도르곤은 어렸을 때 누르하치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지는 못했다. 최소한 그의 형 아지거나 동생 도도만은 못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총명하고 기민하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는 도르곤이 어찌 형인 아지거, 동생인 도도만큼 총애를 받지 못했을까? 그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상당히 재미있고, 신비로운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천명5년(1620년) 구월 이십팔일, 누르하치는 "아민(阿敏) 타이지, 망구얼타이(莽古爾泰) 타이지, 홍타이시, 더거레이(德格類), 웨퉈(岳托), 지얼하랑(濟爾哈朗), 아지거(阿濟格), 도도도르곤(多鐸多爾袞)의 팔패륵(八貝勒)을 화석액진(和碩額眞)으로 삼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8명이 아니라 9명이다. 그런데, 어찌, '팔패륵'이라 하는가? <구만주당>의 원본을 살펴보면, 도도와 도르곤의 사이에 점이 찍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누르하치는 도도와 도르곤을 합쳐서 1명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리고, 동생인 도도를 형인 도르곤보다 앞에 놓았다. 당시, 도르곤은 8살이고, 도도는 겨우 6살이었다. 이를 보면, 누르하치의 마음 속에 도도가 도르곤보다 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명9년(1624년) 정월 초하루, 조하의식(朝賀儀式)에서도 도르곤과 아지거, 도도의 신분, 지위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진시에 팔각전에서 나와서 대패륵이 먼저 절을 하고, 다음으로 은거더얼(恩格德爾) 액부(額附, 사위)가 여러 몽골패륵을 이끌고 절을 하고, 세번재로 아민패륵, 네번째로 망구얼타이 패륵, 다섯번째로 사패륵, 여섯번째로 아지거 아거, 일곱번째로 도도 아거, 여덟번째로 아바타이 아거, 두두(杜度) 아거, 아홉번째로 웨퉈 아거, 슈퉈(碩托) 아거, 열번째로 무순(撫順) 액부, 스우리(石烏禮) 액부가 여러 조선관리와 한족관리를 이끌고 절을 했다. 열한번째로 우너거바크스(吳訥格巴克什)가 팔기의 여러 몽골관리를 이끌고 절을 했다." 도르곤은 아지거, 도도와 같이 단독으로 절을 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동생의 뒤에서 절을 하는 자격도 없었다.

 

이 조하명단에서 또한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기주(旗主)인 패륵만이 단독으로 절을 올렸다. 기주가 아니고 그저 약간의 우록(牛錄)만을 가진 '집정패륵'은 기주패륵의 뒤에서 열을 지어 절을 했다. 당시 아지거, 도도, 도르곤은 모두 양황기(정황기 및 상황기)에 속해 있었다. 아지거는 이미 기주패륵이고, 도도는 비록 9살이었지만 역시 기주패륵이었다. 도르곤은 '집정패륵'도 아니었다. 우록(만주족의 생산 및 군사합일의 사회조직. 매 우록은 300인으로 구성된다)의 분배에서 양황기는 60우록을 지니고 있다. 아지거, 도르곤, 도도는 각각 15우록씩을 지니고 있고, 누르하치가 15우록을 직접 관할했다. 누르하치는 사후에 자신의 우록을 도도에게 넘겨준다. 그러므로, 도르곤의 정치지위는 형인 아지거나 동생인 도도보다 낮다. 그는 기껏해야 15우록을 지닌 '한산패륵(閑散貝勒)'이었다. 이런 대우는 도르곤으로 하여금 '유아독존'의 기개를 갖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오만함도 적었다. 그가 왜 이렇게 총애를 받지 못하였는지는 아마도 누르하치만이 알 것이다.

 

천명11년(1626년) 팔월 십일일, 누르하치가 병사한다. 십이일 여명, "여러 왕은 황제의 유언을 알리고" 도르곤의 생모인 아바하이를 순장시킨다. 아바하이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남편이 죽는 날이 곧 자신이 죽는 날이 될 줄은.

 

여러 왕이 아바하이를 순장시킨 이유는 아바하이가 "마음 속에 질투를 품고 있어, 매번 황제를 불쾌하게 하였으며....남겨두면 나중에 나라를 어지럽힐 우려가 있어서, 미리 여러 왕에게 유언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반드시 그녀를 순장시켜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바하이는 대비(大妃)로서, 누르하치가 가장 사랑하였다. 그런데 어찌 불쾌하게 했단 말인가? 그리고 이때 도르곤은 14살에 불과했고, 도도는 12살이었다. 누르하치는 어린 아들들을 생각지 않았단 말인가? 어찌 유언으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대비를 순장시키게 요구했을까?

 

여러 왕이 아바하이를 반드시 죽이려 한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질투이다. 도르곤 삼형제는 적출의 어린아들로서, 상응하는 정치적 지위를 받아야 한다. 다만, 여러 패륵은 아바하이가 총애를 받은 것 및 이로 인하여 그녀의 세 아들이 신속이 권세를 확장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도르곤 삼형제는 아지거가 전공을 약간 세운 외에, 도르곤, 도도는 아직 미성년자로서, 전투의 공로도 없고 정치적 업적도 없다. 겨우 모친이 총애를 받았다는 것때문에 그들은 나이가 어림에도 형들과 마찬가지의 권력과 지위를 누렸다. 아지거와 도도는 한 기씩을 소유하고 있다. 누르하치는 한 기를 더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도르곤을 기주로 삼기 위함이다. 이런 총애는 드문 것이다. 그러다보니 다른 패륵과 아거들이 참기 힘들 정도였다.

 

둘째는 기탄(忌憚)이다. 도르곤 삼형제는 양황기 육십우록을 가지고 있어 실력이 이미 이패륵 아민, 삼패륵 망구얼타이 그리고 사패륵 홍타이시를 넘어섰다. 대패륵 다이산과 막상막하일 정도였다. 거기에 아바하이가 대비의 자리에 있고, 심기가 뛰어났으며, 누르하치가 죽기 전에 부른 유일한 인물이다. 후계자를 내세울 때,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아들을 밀 것이다. 그녀의 아들이 새로운 칸에 오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가 칸의 자리를 승계하든 그녀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 심지어 대체될 위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왕은 컨센서스를 이루어 아바하이를 죽이기로 한 것이다.

 

모든 왕들이 입을 모아서 말하니, 누르하치라는 배경을 잃은 아바하이로서는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러 왕들로부터 그녀의 사후에 도르곤과 도도를 잘 보살피겠다는 보증을 받은 후, 37살의 아바하이는 원한을 품고 자결한다. 그후 다이산등 패륵은 홍타이시를 칸의 후계자로 옹립한다.

 

어떤 사람은 누르하치가 죽기 전날, 도르곤을 후계자로 하는 유명을 내렸다고 한다. 조선의 사료인 <춘파당일월록>에서는 누르하치가 임종전에 "다이산에게 말하기를: 구왕(九王, 도르곤)을 칸으로 세워야 하는데 나이가 어리니, 네가 섭정을 해라, 그후에 구왕에게 물려주어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숭덕9년 황위계승자를 논의할 때, 도르곤은 일찌기 도도등의 이름이 "유조(遺詔)"에 나온다고 하였다. 순치연간에 도르곤은 더더욱 "태종(홍타이시)의 즉위는 원래 탈립(奪立)이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정말 유명이나 유조가 있었을까?

 

이런 주장은 검토를 해봐야 한다. 실제로 누르하치는 츄잉이후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생전에 그는 팔패륵이 국정을 공동통치하는 제도를 건립한다. 새로운 칸은 팔패륵이 공동으로 상의하여 결정한다. 누르하치의 병세가 위급해졌을 때, 아바하이 1명만 불렀는데, 만일 칸의 후계자를 세울 생각이었다면 그는 대비 1명만을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보면, 누르하치가 아바하이를 부른 것은 그가 죽은 후 어린 아들들의 후사를 부탁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칸의 후계자를 지정하는 유조는 없었을 것이다. 도르곤은 부친으로부터 1기를 온전히 물려받아서 기주패륵이 되지도 못했고, 동생 도도처럼 부친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칸의 후계자로 지정될 가능성이 없었다. 누르하치가 도르곤을 특별히 총애하여, 칸의 지위를 그에게 물려주려했다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

 

이치대로라면, 도르곤은 홍타이시를 최대의 원수로 보아야 마땅하다. 모친을 죽였고, 부친이 그에게 주기로 약속한 기주의 자격도 박탈했다. 다만, 당시 겨우 13세 10개월에 불고한 도르곤은 어른스러운 냉정과 노련함을 보인다. 그는 알고 있었다. 형인 아지거처럼 마구잡이로 굴어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그저 착실하게 순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홍타이시의 경계심을 없앨 수 있다. 그래서 홍티아시의 즉위에 대하여 그는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서에 따르면, 도르곤은 기뻐서, "좋다(善)"고 했다는 것이다.

 

도르곤은 원한은 가슴 속에 품고, 홍타이시를 따르는 책략을 쓴다. 홍타이시의 환심과 신뢰를 얻었을 뿐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위로 올라간다. 홍타이시도 도르곤형제의 손에 있는 양백기의 힘을 빌려, 다른 권력자와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 그래서 두 역량을 하나로 뭉칠 필요가 있었다.

 

천총2년(1628년) 이월 초파일, 도르곤, 도도의 두 형제는 천총칸 홍타이시를 따라 몽골 차하르 로트부락을 공격한다. 이것은 도르곤이 처음으로 전쟁터에 나선 것이다. 비록 15세반에 불과하였지만, 그는 용감하게 싸웠고, 전공을 세운다. 삼월 초칠일, 홍타이시는 도르곤이 공로가 있다고 "모얼건다이칭(墨爾根戴靑)"이라는 칭호를 내린다. "모얼건"은 만주어로 총명하고 기민하며 지혜가 많다는 의미이다.

 

같은 해 삼월 이십구일, 도르곤은 그의 일생에서 중대한 기회를 맞이한다. 이날 홍타이시는 아지거의 고산패륵의 지위를 박탈하고, 도르곤으로 바꾼다. 이렇게 하여 도르곤은 상백기를 장악하여 일기의 주인이 된다.

 

천총3년(1629년) 십월과 천총5년(1631년) 팔월, 도르곤은 두번에 거쳐 홍타이시를 따라 명나라를 정벌한다. 도르곤은 용감하게 돌진하여 여려번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포로와 노획물을 많이 배앗는다. 전공을 크게 세웠을 뿐아니라, 명성도 크게 떨친다. 천총5년(1631년) 오월, 홍타이시는 "육부아문"을 건립하는데, 도르곤에게 이부(吏部)를 통할하게 한다. 그리고 그는 육부패륵중 우두머리가 된다. 이때 도르곤의 나이는 아직 19살이 되지 않았다.

 

천총6년(1635년) 이월 이십육일, 홍타이시는 도르곤, 웨퉈, 사하롄(薩哈廉), 하오거(豪格)를 장수로 하여, 린단한의 아들 어저(額哲)을 수습한다. 이것은 도르곤이 처음으로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도르곤은 어저를 항복시켰을 뿐아니라, 린단한의 처 낭낭태후(囊囊太后), 수타이태후(蘇泰太后)를 붙잡고 원나라황제의 전국옥새까지 확보한다. 이것은 어저가 다시 복국하여 황제에 오르는 것을 막아, 막남몽골을 통일하고, 만주몽골연맹을 공고히 하며, 명나라의 오른팔을 잘라버리고, 후금의 국력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동시에 홓타이시를 "관온인성황제"의 보좌에 올라 대청제국을 건립할 수 있게 하는데 정치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형성했다. 도르곤이 이런 큰 공을 세우자 당연히 홍타이시는 기뻐한다. 그는 친히 패륵, 푸진, 대신을 이끌고 오르곤의 개선을 영접했다.

 

홍타이시라는 배경이 있어, 홍타이시가 지지하고 발탁해주는데다가, 도르곤은 자신의 전공과 업적을 가지고 세력을 신속히 확장한다. 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10년도 안되는 기간동안, 권력도 미미하고 세력도 약한 어린 타이지에서 일약 서열 3위의 혁혁한 고관대작이 되어, 홍타이시의 오른팔이 된다. 천총10년(1636년) 정월 초하루의 경하대례에서 도르곤의 지위가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진시에 홍타이시가 대전에 오르고, 도르곤이 도도, 웨퉈, 아바타이, 아지거등 패륵을 이끌고 하례를 올린다. 그후 외번몽골의 여러 패륵과 팔기관장들이 하례를 올린다. 이제 도르곤은 이미 여러 패륵을 이끌고 하례를 올리는 제1패륵이 된 것이다. 12년전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