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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성씨

계공(啓功)이 말하는 애신각라(愛新覺羅)와 청나라 황실...

by 중은우시 2006. 2. 23.

계공(치공, 1912. 7. 26 - 2005. 6. 30)선생은 근세 중국의 가장 유명한 서예가이다. 그리고, 그는 청나라 황실의 후예이다. 그가 청나라의 황실과 애신각라씨에 관해서 적은 글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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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의 성은 매우 많다. 만주어로는 성씨를 "하라"라고 한다. 많은 만주어 성은 모두 대응하는 한족성이 있다. 예를 들어 완안씨(完顔氏)는 금나라때부터 이어져온 성씨인데 음역으로 한 한어성은 왕(王)이다. 과이가(瓜爾佳)씨는 음역으로 한 한성이 관(關)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왕씨성을 가진 사람, 관씨성을 가진 사람은 완안씨와 과이가씨의 후예들이다. 물론, 더 많은 한족들이 그 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이것도 민족융합의 하나의 표현이다. 나는 일씨기 <<청나라때 소수민족성명의 개역을 말한다>>라는 글을 쓴 바 있고 <<청화대학학보>> 2002년 제4기에 게재되었으며, 이에 관한 내용을 전문적으로 언급했었다.

 

나는 계공이라고 불리니 성이 계이고 이름이 공이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은 성이 애신각라이고 이름이 계공인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편지를 쓸 때 이렇게 쓰고,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표기방식에 따라 애신각라와 계공 사이에 점을 찍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나를 "김계공(金啓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애신각라씨들은 청나라가 망한 후 대부분 한족성을 따라 김(金)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계공의 집안에서는 이것은 원수인 원세개가 시킨 것이니 따를 수 없다고 하여 김(金)성으로 바꾸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는 내가 명확히 해야겠다. "애신(아이신)"은 여진어이고, 성이다. 금나라때부터 있던 것이다. 뜻으로 본다면 "금(金)"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각라(줴뤄)"라는 두 글자는 없었다. "각라"는 만주어 jir의 음역이다. 원래는 다른 뜻이 있었다. 청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누르하치의 부친인 타커스(塔克世)를 대종으로 하여 그의 후손들은 "종실"이라고 부르고 황금색 허리띠를 하였다. 이에 따라 세간에서 "황금허리띠를 두른 사람(黃帶子)"라고 불렀다. 타커스은 부친 줴창안(角昌安)에게서 여섯 명의 형제가 있고 이들은 보통 육조(六祖)라고 부르며, 타커스의 직계가 아닌 방계후손들을 각라(覺羅)라고 불렀고, 붉은 허리띠를 하였으며 그 후손들을 "붉은 허리띠를 두른 사람(紅帶子)"라고 불렀다.  이들 "종실" 사람(각라)들은 황실에서 관리하였으며, 정치경제적으로 특권을 누렸고,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청나라때 이 "각라"를 성의 뒤에 붙였는데, 예를 들어 유명한 작가인 노사(老舍)선생의 원래 성은 서서(舒舒)씨였다. 나중에 "각라"를 붙여 "서서각라"가 되었다. 그러나, 노사선생은 서서중 첫번째 서를 따서 본인의 성씨로 하고, 두번째 서(舒)를 사(舍)와 여(予)로 나누어 자기의 이름으로 삼았다. 즉, 서사여(舒舍予)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라"를 "애신"의 뒤에 붙여 "애신각라"가 된 것이고 이것이 한 씨족의 성으로 되었다. 즉, 원래 이 성은 없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고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라"는 "종실"이라는 의미가 있고, 단지 "대종(누르하치의 직계후예)"이외의 종실을 의미할 뿐이었다.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에 다시 이 각라를 강조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성씨 본래의 발생이나 변화에 비추어 보는 것이, 내가 애신각라를 성으로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 이유이다.

 

현재 많은 애신각라씨는 자기의 성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성을 애신각라로 불러주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불러주고자 하며, 이것이 그에 대한 일종의 존중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건 실제로 아무 의미없는 일이다. 신해혁명시에 일찌기 "구제단로, 회복중화(驅除단虜, 恢復中華,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자)"의 구호를 외쳤고, 이것이 성공한 후에는 만주족들은 스스로 만주족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그 황족들도 자신이 스스로 애신각라씨라고 말하는 걸 꺼렸다. 나중에 당국자들은 이 구호가 너무 국한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오족공영(五族共榮, 한 만 몽 장 회의 다섯 민족이 함께 번영해야 한다는 의미)"을 외치게 되면서 상황은 좀 나아졌다. 그러나 해방후에 애신씨들은 여전히 자신이 애신각라씨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자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이미 멸망한 구사회, 구세력으로 대하고 예전의 좋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에 이르러, 자기의 성이 애신각라라고 말하는 것자체가 스스로를 봉건제도의 쓰레기나 우귀사신(牛鬼蛇神)이라고 말하는 것이어서, 사람들마다 피하고 언급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후에 민족정책을 실시하며 더 이상 소수민족을 차별하지 않게 되고, 심지어 소수민족을 우대하게 되었다. 이 때 다시 애신각라라는 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현상이 나타났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받들어주고...나는 이건 정말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통속적인 말로 한다면, "재미없다" 사실로 보면 애신각라가 만일 진짜 하나의 성이라면 그것이 영광스러울 때도 좋고, 욕될 때도 좋다. 완전히 정치에 영향을 받는데, 이것이 자랑스러워할 것인가? 그리고 그걸 끌어안고 즐거워할 것인가? 이것은 내가 감정적으로 애신각라를 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이다.

 

나는 옹정황제의 제9대손이다. 옹정의 넷째아들은 홍력이고 그는 황위를 이었으며 바로 건륭황제이다. 옹정의 다섯째 아들은 홍주(弘晝)이고, 홍력보다 1시진정도 늦게 태어났다. 당연히 모친이 다른 이복형제이다. 건륭은 즉위후 홍주를 화친왕(和親王)에 봉한다. 우리는 바로 이 화친왕의 후대이다.

 

홍자배의 아래 항렬은 영(永), 면(綿), 혁(奕), 재(載),  부(溥), 육(毓), 항(恒), 계(啓)이다. 영, 면, 혁, 재의 네 글자는 건륭황제가 태후에게 바친 싯귀에서 따왔다. "영면혁재봉자위(永綿奕載奉慈위)"에서 온 것이다. 혁은 높고 아름답다는 의미이며, 전체의 의미는 영원이 길이길이 아름다운세월을 자상한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겠다는 것이다. 부, 육, 항, 계의 네개자는 나중에 이은 것으로 특별한 근거는 없다.

 

우리 이 집안이 제1대를 옹정황제로 한다면,

제2대는 옹정의 다섯째 다들 화친왕 홍주이다.

제3대는 영벽(永璧)이다. 그는 화친왕 홍주의 둘째아들이고 여전히 화친왕을 세습하였다. 같은 배분으로 넷째아들, 여섯째 아들 영환, 일곱째아들 영곤등이 있다.

제4대는 면순(綿循)이다. 그는 영벽의 둘째아들이다. 여전히 왕의 작위를 물려받는다. 그러나 화친왕에서 군왕으로 등급이 내려간다.

제5대는 혁형(奕亨)이다. 그는 면순의 셋째아들이다. 이미 등급이 패륵으로 내려가고, 보국장군에 봉해진다. 같은 항렬에는 넷째아들 혁총, 여섯째 아들 혁근, 아홉째 아들 혁예등이 있다. 규정에 따르면 종실의 관직은 무관의 관직을 받는다. 청나라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송나라, 명나라때도 마차가지였다. 예를 들어 송나라때는 높은 등급으로는 절도사를 받고, 그 아래는 방어사를 받았는데 모두 무직이다. 명나라때에는 팔대산인 주용이 종실로 무직을 받았다. 혁형의 대이후로 우리 집안은 모두 장군으로 봉해졌지만, 이것은 허직(虛職, 명예직)일 뿐이다.

제6대는 나의 고조할아버지인 재숭(載崇)이다. 그는 혁형의 다섯째 아들이다. 측실 소생이었으므로, 집안에서 갈라져 분가하였을 뿐아니라, 작위도 더욱 내려가서 겨우 1등보국장군일 뿐이었다. 같은 항렬로는 넷째 아들 재용등이 있다.

제7대에는 나의 증조할아버지인 부량(溥良)이다. 그는 재숭의 둘째 아들이다. 형제는 두 명이 더 있었고, 작위는 다시 내려가서 봉국장군에 봉해졌을 뿐이다. 그의 형은 부선이고 나의 큰증조할아버지이고, 동생은 부흥으로 나의 셋째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모두 봉국장군을 받았다.

제8대는 나의 할아버지인 육륭(毓隆)이다. 부량의 큰 아들이다. 모두 다섯 자식을 두었는데, 둘째 할아버지는 육성이고, 셋째, 넷째 할아버니는 요절하였다. 다섯째 할아버지는 육후인데, 나의 큰증조할아버지에게 양자로 가서 대를 이었다.

제9대는 나의 아버지인 항동(恒同)이다. 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