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林彪)와 그의 일생에서의 다섯 여인 (4. 손유세, 5. 섭군)

by 중은우시 2006. 2. 20.

 

등영초(주은래부인), 손유세, 주은래

 

5. 손유세(孫維世)

 

임표의 일생중 가장 마음을 움직였던 여인은 손유세이다. 손유세의 부친은 손병문(孫炳文)으로 공산당원이었으며, 주은래의 뒤를 이어 황포군관학교의 정치부 주임 겸 총교관의 직무를 수행한다. 주은래, 주덕과 모두 좋은 친구 사이였다. 유렵유학시, 세 사람의 젊은이들은 당시 의형제를 맺었다. 마치 삼국시대의 도원삼결의와 유사했다. 4. 12 정변후 손병문은 장개석에 의하여 상해 용화에서 살해당한다.

 

손유세는 어렸을 때 매우 기민했다. 손병문은 자주 그녀를 안고 주은래를 맞이하였다. 어린 유세는 항사 부친의 등에 업혀서, 총명한 눈동자를 굴리며 두 사람이 얘기하는 걸 들었다. 그 때 그녀는 다섯 살이었다. 주은래에게 "주아빠"라고 불렀다. 주은래는 일생동안 자녀가 없어서 손유세를 양녀처럼 키웠다.

 

손유세는 천성적으로 예쁜 여인이었고, 예술적인 기질도 농후했다. 주은래는 그녀를 연안의 노예학교에 보낸다. 18세때, 모택동의 승인을 받아 다시 모스크바동방대학과 모스크바희극학원 표연계, 감독계에서 재주를 익히게 한다. 이 때 임표는 소련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고, 자주 장매를 위하여 외출하곤 하였다.

 

평형관대첩후, 임표는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소련유학중이던 중국학생들은 갖은 방법을 다하여 임표와 접촉하려고 하였고, 임표를 그들의 활동에 참석하도록 요청했다. 성격이 혼자있기를 좋아하는 임표는 여러가지 방법을 써서 거절했다. 한번은 임표가 외출하다가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만나는데, 그들에게 이끌려 그들의 활동에 참석한다. 흰색 옷을 입은 여자를 보고는 한동안 벌인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녀는 고아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어, 임표의 고요한 마음을 정복했다. 16세대 임표가 공진중학에서 육약빙에 대하여 가졌던 사랑의 감정은 유치한 것이었고, 진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표의 이미 성숙한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이후 임표는 더 이상 군사문제를 생각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집에 앉아 혼자 생각에 잠기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행사를 한다고 초청하면,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단 참석하면 그저 흰색 옷을 입은 아가씨를 찾을 뿐이었다. 만일 이 아가씨가 참석하지 않았으면, 실망하고, 그저 말한마디 하지 않았다. 만일 이 아가씨가 참석하였으면, 임표는 매우 격동된 모습으로 창백한 얼굴에 붉은 기운이 떠올랐다. 여러번 이런 일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은 임표의 이 비밀을 알아차렸다.

 

임표의 마음을 가장 움직인 흰 색옷을 입은 아가씨는 바로 손유세였다. 비록 임표가 매번 손유세를 볼 때마다 마음이 뛰고 안정될 수 없었지만, 그는 의지력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절했다. 한동안의 만남이 이어진 후, 임표는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생각하고, 단독으로 손유세와 밥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임표는 손유세에게 자기의 마음을 밝혔다. 그리고, 손유세에게 자신의 인생의 번뇌를 얘기했고, 손유세에게 자기와 결혼해줄 것을 간청했다. 당시 손유세는 임표의 말에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아직 스무 살에 불과했고, 도망치듯이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임표는 중앙의 명령을 받아 귀국하여 항일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는 또 한번 손유세를 불러 작별의 말을 했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의 큰 길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임표는 다시 한번 손유세에게 간청했다. 그녀도 같이 귀국하자고...손유세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저는 아직 졸업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이 얻기 힘든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아요. 전 귀국할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임표는 손유세에게 그녀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서를 한다. 이렇게 1942년의 임표는 혼자서 연안으로 돌아간다.

 

임표와 손유세간의 사랑은 단지 햇무리와 같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임표는 나중에 다시 손유세를 단독으로 만난다. 임표는 여전히 드물게 감정이 동요되었고, 두 눈에서는....

 

손유세는 후일 김산(金山)과 결혼하며, 강청에 의하여 옥중에서 1968년 사망한다.

 

6. 섭군(葉群)

 

섭군, 임두두(임표, 섭군의 딸), 임표

 

오래지 않아 또 하나의 여인이 임표의 생활에 뛰어든다. 이 여인이 바로 섭군이다. 

 

손유세로부터 불확실한 답변을 듣고 임표는 연안으로 돌아간다. 일시간에 임표의 정신은 공허해졌다. 장매와의 혼인은 그에게 적지 않은 정신상의 상처를 남긴다. 손유세의 출현은 그로 하여금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여인을 찾아 손유세가 남긴 마음의 공백을 메워주는 것이 필요했고, 이 때 섭정의(葉靜宜)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그의 생활로 들어왔다.

 

섭정의는 그보다 열몇살 어렸다. 일찌기 북경사대부중에서 공부한 대가집 규수였다. 그녀는 마르고 피부가 고왔다. 대도시에서 왔으므로 품격있고, 학식도 있으며, 행동거지도 괜찮았다. 항전초기에 그녀는 국민당이 조종하는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한 적이 있었다. 맑고 달콤한 목소리는 고독한 임표를 흥분하게 하였다. 임표는 어쨋든 시골 사람이었다.

 

섭정의가 임표와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 임표의 과거의 미혼처가 왕정의라는 것을 알고는 매우 화가나서 이름을 섭군으로 바꾸어버린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결혼한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 그들의 아이가 태어난다. 당시 섭군은 연안 연하 건너편 강안에 있는 의원에서 아애를 낳았는데, 8, 9월의 마침 연하가 물이 가장 많이 불었을 때였다. 임표는 섭군을 사랑하여 거주지에서 어미닭을 사서 닭탕을 끓인 후 강물을 건넜는데, 가을의 차가운 강물이 뼛속에 느껴졌다. 결국은 임표의 경호원이 생명위협을 무릅쓰고 머리에 닭탕을 이고 건너편의 병원으로 보냈다. 같은 방에 있던 엄위빙(嚴慰氷)은 육정일(陸定一)의 부인이었는데, 역시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있었다. 그녀는 여기에 매우 불만이 많았는데, 특히 섭군의 태도에 눈쌀을 찌푸렸다.

 

문화대혁명 초기에 엄위빙은 여러차례에 걸처 익명의 편지를 보내어 섭군의 과거의 내력을 밝혔는데, 임표의 집에서는 매우 불안해하였따. 그리고 공안기관에 기간을 정해주고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엄위빙은 과거에 섭군과는 같은 학교를 다녔고, 섭군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섭군과 문단의 왕실미(王實味)와의 사랑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섭군의 무고함을 위하여, 1966년 임표는 특별히 회의를 열었고, 섭군에게 "처녀증명"을 써준다.

 

------------------------------------------------------

나는 증명한다.

 

(1) 섭군은 나와 결혼할 때 순결한 처녀였고, 결혼후에도 올바르게 행동했다.

(2) 섭군과 왕실미는 근본적으로 연애한 바 없다.

(3) 노호, 두두는 나와 섭군의 친생자녀이다.

(4) XXX의 반혁명편지에서 말하는 일체는 거짓말이다.

 

임표.

 

1966년 5월 14일

--------------------------------------------------------

 

임표의 이 증명서는 "여기에 금삼백냥을 묻지 않았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년의 섭군은 개인문제에서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주요 원인은 임표의 신체상황이었다. 하루 하루가 더 나빠졌다. 매일 병자기운을 풍기면서 침대에 누워있었고, 정상적인 부부생활은 중단되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섭군은 주주 임표의 오래된 부하인 "색귀"라고 불리는 황영승과 밀접하게 내왕하였다고 한다.

 

1971년 9월 13일 임표는 몽고 워두얼한 지구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람한다. 섭군도 그와 함께 일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