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왕정의(汪靜宜)
임씨집안에 보존된 <<임씨종보>>를 보면, 임표의 이름 뒤에는 세 사람의 처가 기재되어 있다. 제일 먼저 기재된 것은 왕정의이다. 어떤 자료에는 왕(王)씨로 표현한 것이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두번째가 유신민(劉新民) 즉, 장매(張梅)이고, 세번째가 섭군(葉群)이다.
왕정의의 원래 이름은 왕백매(汪伯梅)이다. 임표보다 하루 늦게 태어났고, 임표와 정혼한 후에 임씨집안의 제의에 따라 이름을 왕정의로 고친다. 왕정의의 부친인 왕우성은 임표의 부친과 가장 친한 친구였다. 한번은 왕우성이 8킬로미터 떨어진 임표의 집안을 방문하였을 때, 임표가 자기 딸과 나이가 비슷한 것을 보고 임표의 부친에게 양가의 결혼을 제안한다. 임표의 부친도 항상 왔다갔다하며 왕정의를 보아왔는데, 얼굴에 예쁠 뿐아니라 인품도 괜찮았으므로 바로 동의한다. 그 후 현지의 풍속에 따라, 임씨집안은 1914년 음력 1월 4일 두 탁자의 정혼 술자리를 마련한다. 당시 임표는 7살이었다.
1925년 7월, 임표가 무한의 공진중학을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가 며칠 머물 때, 하루는 가씨 아주머니가 임표에게 물었다. "왕씨 아가씨는 정말 대단한 미인이다. 너도 이제 18살인데, 왜 그녀를 맞이하지 않느냐" 임표는 정혼한 날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아주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아주머니의 설득에 따라 임표는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연말에 왕정의를 맞이하자고 하엿다. 그의 모친 진씨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의 부친은 월력을 열심히 뒤져보더니, 이번 연말에 결혼하는 것은 불길하다고 하였다. 게다가 그들 집안이 경영하는 포목공장이 경기가 좋지 않았으므로 이 일은 다시 꺼내지 않았다.
1925년 10월, 임육남, 임육영은 임표로 하여금 황포군관학교에 시험치게 한다. 이렇게 임표는 상해의 일차시험을 거쳐, 다시 광주로 가서 2차시험을 치러 황포군관학교 제4기로 입학한다. 그 후 집안과의 연락은 끊어진다. 이 사이 왕우성은 여러차례 임씨집안에 임표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현지의 관습에 따르면 여자가 결혼연령이 되었는데도, 임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의 딸은 평생 과부로 지내야 할 판이었다. 임씨집안에서도 마음이 조급했다.
1926년말, 임명경은 아들 임표의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는 임표가 국민혁명군 제4군독립단을 따라 무한에서 쉬고 있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바로 편지를 가지고 왕우성의 집에 가서 보여주고, 임명경은 처인 진씨와 대책은 논의한다. 그리고는 진씨가 병이 위중하다고 거짓말을 하여 임표를 집으로 불러오기로 한다. 이와 동시에 임, 왕 두 집안은 적극적으로 임표를 위하여 혼례를 준비하고, 친구들에게 혼인청첩장을 보냈으며, 많은 친구들은 사전에 결혼예물을 보내온다.
음력 12월 28일, 임표는 군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온다. 바로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신사상의 세례를 받은 임표는 바로 부친에게 이 결혼을 거절한다. 임표의 부친은 임표에게 "어디 결혼을 취소하는 법이 있느냐"고 호통친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무서워했던 임표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다.
다음날, 부친의 분부에 따라 임표는 예물과 홍주가의를 가지고 왕우성의 집으로 간다. 현지의 관습에 따라 신부가 결혼할 때의 예복은 남자집에서 만들어 보내야 한다. 혼인예복을 받은 왕우성은 임표에게 결혼의 구체적인 시간을 묻는다. 임표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이번 휴가는 단지 4일 뿐이고, 급히 혼인절차를 끝낼 수 없으니, 왕씨집안의 양해를 바란다고 하였다. 왕우성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나는 네 부친과 오랜 친구이고, 이런 관계로 나는 내 딸을 너희집안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너는 글을 읽어 사리를 아는 사람이니 절대 내 딸의 청춘을 헛되게 하지 말아라"고 한다. 임표는 그 자리에서 "북벌승리후에 저는 바로 돌아와서 결혼하겠습니다." 임표의 성의있는 태도를 보고는 왕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안심하였다. 왕정의는 방안에 숨어 나오지 못하고, 문구멍으로 몰래 임표를 한참 내다보고는 마음 속으로 매우 기뻐하였다.
대혁명실패후, 임표는 집안과 연락을 끊었다. 매년 명절이 되면 임표의 부친은 큰 아들 임경불을 보내어 임표를 대신하여 왕씨집안에 문안을 드렸다. 두 집안 사람들 모두 마음이 조급해졌다. 1937년에 이르러 국공제2차합작후에 임표는 다시 부친과 연락한다. 아들의 행방을 안 후 임표의 부친은 바로 임표에게 편지를 써서 왕정의를 연안으로 보내서 결혼시키겠다고 한다. 이 결혼을 피하기 위하여 임표는 급히 유신민과 결혼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진을 우편으로 부친에게 보낸다. 임표의 부친은 편지를 받은 후 왕씨집안에 이유를 설명한다. 왕씨집안 사람들은 화가 났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사랑에 눈먼 왕정의는 여전히 모든 마음을 임표에게 두고 있었다. 밤이 깊어 사람이 없는 때면, 그녀는 몰래 임표가 보내준 붉은 혼례복을 입었다 벗어보기를 몇차례, 그녀는 임표가 돌아와 그녀를 데려가기를 기다렸다. 비록 그녀는 임표가 유신민, 섭군과 결혼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고, 매우 상심했지만, 여전히 기다렸다. 그녀는 여인으로서의 모든 사랑을 그의 조카에게 쏟아붓는다.
1949년후, 왕씨집안은 가난하게 되었고, 왕우성의 사후에 왕씨들의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왕씨모녀 세 사람은 구덩이에 숨어있었고, 아침밥을 굶었다. 음식이 여러날 끊어지기도 하였다. 임표의 부친은 이 사실을 알고는 큰 아들 임경불을 시켜 왕씨집에 돈과 양식을 보내주었다. 왕정의는 거절하였다. 이런 양식을 먹는 것은 굶어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녀의 모친이 나서서 원만하게 처리되어 돈과 음식을 남겨두었다. 왕정의가 불쌍하게 사는 것을 본 임표의 부친은 편지를 써서 북경에서 높은 관리가 된 임표에게 왕정의를 북경으로 데려가서 일자리를 마련해주라고 요청한다. 임표는 부인 섭군이 무서워 처리하지를 못한다. 나중에 임표의 부친은 섭군에게 편지를 쓴다. 섭군은 왕정의가 글을 모르고, 촌에 사는 전족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왕정의로 하여금 그녀 집에 와서 보모를 할 것을 건의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보내어 호북 고향에 있는 왕정의를 북경으로 맞이하도록 보낸다.
왕정의는 북경에 가서 섭군의 보모를 하라는 말은 듣고는 화를 내면서 "섭군이 뭘 가지고 나를 보모나 하라고 하는가? 나와 그녀는 당연히 평등하다"고 한다. 그 후 임표의 부친은 황강현 민정국을 찾아가서, 왕정의에게 생활상의 도움을 주도록 요청한다. 왕정의는 민정국에서 보내온 돈과 양식도 거절한다. 인민공사 성립후, 왕정의는 농사를 지을 줄도 모르고, 전족하였으므로, 인민공사의 고아원에서 아이를 돌보게 된다.
1954년 여름, 임표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 왕정의라는 여자를 보고자 한다. 왕정의는 이 말을 듣자 숨어버린다. 임표는 할 수 없이 사람을 보내 왕정의에게 그를 기다리지 말라고 말하고, 그녀에게 많은 돈을 남기며, 그녀에게 빨리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것을 권한다. 왕정의는 나중에 이 말을 듣고는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50년대에 왕정의는 폐병을 앓아 겨우 뼈만 남는다. 1963년 그녀는 세상을 떠나는데, 임종시에 "나의 평생은 명이 나빴다" 당시 그녀의 장례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그녀의 베개아래에 임표가 그에게 보내준 붉은비단 혼례복과 임표가 그녀에게 보내줬던 두터운 돈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임씨 집안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족보를 보완하면서 임씨집안사람들은 왕정의의 일생을 동정하여 임펴의 이름아래 그녀의 이름을 쓰고 "빙(聘)"이라는 글자로 주석을 달았다. 그 뜻은 정식혼인까지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북경의 임표는 이 사실을 들은 후, 그저 탄식할 뿐이었다. "세상에 이런 여자가...."
4. 장매
뒷줄 제일 오른쪽이 장매
장매는 임표의 진정한 첫번째 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장매와 임표의 결혼에 대하여는 책들마다 하는 말이 다르다.
<<상해탄>>잡지 1992년 9기에는 오흔봉(吳欣峰)이 쓴 <<나는 임표의 비서이다>>라는 책에서 말하기는, 평형관대첩후 임표가 염석산의 부하가 쏜 총에 맞아 상처를 입고 먼저 연안병원에서 치료받고 나중에 소련에서 요양하였는데, 중앙에서 임표를 위하여 업무인원과 간호인원을 배치하였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장매라는 섬북지방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매우 예쁘게 생겼고, 사람됨이 성실하고 시원시원했다. 소련에서 임표와 반년간의 접촉을 가지면서 부부로 맺어졌다. 그리고 딸을 하나 낳았다. 임표의 부친은 이 소식을 들은 후, 임씨족보에 손녀의 이름을 임효림(林曉霖)이라고 지어준다.
어떤 자료에서는 1937년 임표가 "항대"교장을 맡을 때, 그는 이미 30여세였다. 그는 번개가 치듯이 항대의 최고미인인 유신민을 만났고, 빨리 결혼했다. 유신민은 나중에 장매로 개명한다.
또 어떤 자료에서는 임표는 부친이 왕정의와 결혼하라는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급히 장매와 결혼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떤 자료에서는 평형관대첩후, 임표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임표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것을 알고, 많은 여자들이 임표에게 구혼했고, 임표는 최종적으로 장매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임표와 장매가 어떻게 시작하였든, 그들의 최종 결말은 이혼으로 끝났다. 장매의 원래 이름은 유신민이고, 섬북 미지 사람이다. 섬북에는 "사보(四寶)"가 있는데 바로 "미지의 아가씨, 수덕의 사나이, 청간의 돌판, 와와보의 목탄"이다. 미지는 역대로 천하미녀를 많이 낳는 것으로 유명하다. 장매는 미지아가씨들 중에서도 뛰어난 여자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섬북일지화(陝北一枝花)"로 불리웠다. 그녀의 모습은 여인들 중에서도 아주 뛰어났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은 차이가 너무 컸다. 장매는 성격이 활발하고 움직이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임표는 말을 잘 하지 못하였고, 조용히 앉아있으면서, 표정없이 깊은 사고에 잠기기를 좋아했다. 평형관에서 상처를 입은 후 임표는 더욱 우울해했고, 말은 더욱 적어졌다. 매일 방안에 조용히 앉아있으면서 때때로 군사적인 서적을 읽을 뿐이었다. 마치 하나의 목조조각과 같았다. 그리고 장매에게도 매일 자기와 같이 앉아있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장매는 활발하고 돌아다니기 좋아하며, 시끄러운 장소를 가고싶어했다. 이것은 임표가 매우 싫어하는 일이었고, 임표는 종종 화를 많이 냈다. 심지어 그녀에게 외출을 못하도록 저지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간의 모순은 점점 커졌고, 1942년 1월 두 사람은 소련에서 정식으로 이혼한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임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표의 글씨 (0) | 2006.09.20 |
---|---|
임표(林彪)의 어록 (0) | 2006.09.19 |
솔직담백한 성격의 임표 (0) | 2006.09.15 |
임표(林彪)와 그의 일생에서의 다섯 여인 (4. 손유세, 5. 섭군) (0) | 2006.02.20 |
임표(林彪)와 그의 일생에서의 다섯 여인 (1. 육약빙) (0) | 2006.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