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임표)

임표(林彪)와 그의 일생에서의 다섯 여인 (1. 육약빙)

by 중은우시 2006. 2. 19.

 

육약빙

 

들어가는 말 : 임표에 관하여

 

임표는 중국현대사상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말이 적으면서 군사적인 천재성을 보인 기인으로, 사병에서 대원수까지...1955년 10대원수에게 계급을 부여할 때, 그는 혁혁한 전공을 바탕으로 주덕, 팽덕회의 다음을 차지하였으며, 중국의 가장 젊은 원수이기도 하였다. 중국공산당은 9차대회에서 그를 중국공산당 당헌에 모택동의 후계자로 이름을 명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군사상으로는 기적을 창조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실패자였다. 그의 일생에서의 혼인궤적은 조금은 색다르기도 하다.

 

1907년 12월 7일, 임표는 호북성 황강중부의 회룡산에 있는 대가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임명경(林明卿)은 당시에 이미 30세였다. 여명전의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갓태어난 아기의 맑은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동안 깊이 생각한 후, 아들에게 임육용(林育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육용이라는 이름이 너무 여성적이었는지, 유년의 임표는 체력이 약하고 병이 많았다. 작은 병은 끊이지를 않았고, 큰 병도 앓았다. 매일 병만 앓고 있는 어미닭처럼 이런 상황은 그가 중학에 들어가는 17세때까지 계속되었다. 1925년 임표는 상해로 가서 황포군관학교에 지원하면서 이름을 쓸 때 "임표"라고 쓰게 된다. 표(彪)는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어서 그랬는지, 그 후에 임표의 신체는 강하고 튼튼해졌다. 1937년 평형관대첩후, 임표는 일본군에게 빼앗은 옷을 입고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은 큰 말을 타고 있었는데, 국민당 염석산(閻錫山)의 사병이 일본인으로 오해하여 임표를 향해 총을 쏘았다. 이 총으로 임표의 이후 일생은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하게 되었다. 당시 연안의 의료조건은 매우 엉망이었다. 의원은 몇개의 와동에 있었고, 약품도 대부분은 송경령의 관계를 통하여 어렵사리 구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나중에 임표는 부득이하게 소련으로 가서 치료를 하는데, 치료할 때 약을 제대로 못써서, 임표는 나중에 바람, 물, 빛, 추위를 두려워하는 병을 갖게 되었다. 생명은 거의 "육용"의 시대로 돌아간 듯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총을 쏘았던 사병에 대하여 임표는 관대하게 용서하고 풀어주었다.

 

2. 임표의 첫 사랑 : 육약빙(陸若氷)

 

임표에게 처음으로 가르침을 준 사람은 이탁후(李卓候)였다. 그는 중국지질학계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이사광(李四光)의 아버지인데, 일찌기 동맹회에 가입하여, 손중산, 황흥과는 좋은 친구였다. 그는 이사광을 길렀을 뿐아니라, "임씨삼형제"도 길러냈다.

 

"임씨삼형제"는 임육남(林育南), 임육영(林育英, 張潔) 과 임육용의 세 사람을 말한다. 세사람은 비록 친형제는 아니었지만, 같은 고조할아버지의 후손이었다. 임육남과 임육영은 임표보다 10살이 많았고, 그들은 임표를 혁명의 길로 이끌었다. 국공제2차합작때 섬북홍군은 국민혁명군제8로군으로 개편되며, 그 아래에 115, 120, 129의 삼개 사단을 두는데, 임표는 115사단의 사단장을 맡는다. 임육영(장결)은 129사단의 정치위원을 맡는다. 모택동은 당시에 그들에게 농담으로 말하기를 "만일 임육남이 살아있었으면, 팔로군의 이 세개 사단은 모두 너의 임씨집안에서 다 가져갔겠다."고 하였다.

 

삼형제중 임육남은 가장 잘생기고 박력이 있었다. 그러나 1931년 왕명의 좌경모험주의에 반대하다 당에서 제명되었고, 나중에 국민당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임육영은 일처리가 조심스럽고 열심히 하였고, 일찌기 "강철인간"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931년에서 1932년간에 임육영은 중궁만주성위 서기를 맡는다. 반도가 배신하여, 일본 무순감옥에 갇힌다. 한겨울에 일본군은 그에게 차가운 물을 먹인 후에 가죽신으로 그의 부풀어오른 배를 치고, 피와 함께 물은 그의 코, 입, 항문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고, 일본군은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심했다. 나중에 당에서 그를 구출한 후 팔로군 129사단의 정치위원을 맡았는데, 감옥에서의 고문으로 인하여 몸이 좋지 않았고, 결국 등소평이 그의 뒤를 이어 정치위원의 직위를 맡는다. 1942년 3월 6일, 45세의 임육영은 연안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모택동, 주덕, 임필시, 유소기등 중앙지도자들은 친히 그의 관을 들고 장례식을 치른다. 모주석은 친히 그를 위하여 묘비를 써준다.

 

임표가 이탁후 노인이 연 사숙을 떠난 후, 1921년 임육영, 혼대영등이 돈을 내어 만든 "준신학교"에 들어간다. 거기서 마르크스주의사상교육을 받는다. 1923년 공산주의청년단에 들어가며, 준신학교 졸업후, 당시 그의 당형인 임육남이 중공호북의 책임자였고, 사회주의청년단의 중앙서기의 직무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임표를 무창의 공진중학에 보내의 배우게 한다. 임육남의 도움하에 1925년 임표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공진중학에서 공부할 때, 임표는 짧은 첫사랑을 경험한다. 상대방은 육약빙이다. 그녀는 황강 회룡산 대가충의 사람이고, 임표의 집과는 단지 3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사실 그들 둘은 어려서부터 서로 알았다. 무한에 도착한 후 두 사람의 접촉은 매우 빈번했다. 육약빙은 임표보다 한 살이 많았고, 한창 물이 오른 때였고, 피부는 희고 부드러웠으며, 눈이 맑았고, 두 눈에서는 소녀의 아름다움이 흘렀다. 임표는 그녀를 좋아하였으나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는 못하였다.

 

육약빙의 오빠인 육침은 일찌기 중공 강서성위 서기, 중공중앙 후보위원을 역임했다. 1924년 8월 육약빙은 오빠들의 관계로 안경여자사범학교에 가서 글을 읽는다. 첫사랑의 임표는 좌불안석이었다. 그리하여 계속하여 육양빙에게 편지를 썼다. 얼굴을 대하고는 말하지 못하였던 것을 편지에 글로써 표현했다. 그리고 글은 하나하나 모두 진심을 담고 있었고, 솔직한 말에 육약빙은 놀랐다. 말없던 임표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생각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는 어린 남녀의 결혼은 모두 전통에 따라 중매를 통한 것이었으므로 직접 이렇게 편지를 써서 구애하는 것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임표로부터의 두터운 편지가 날아들자, 육약빙은 침착하게 임표에게 답장을 하나 보낸다. 편지는 매우 짧았고, 몇십자에 불과했다. 단지 임표에게 공부 잘하기를 권하고, 그녀는 아직 어리므로 혼사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비록 말은 젊잖았지만, 완곡하게 임표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육약빙은 임표를 그저 동생으로 대우했을 뿐이었다. 임표를 거절하는 이유는 나이가 어리다는 것 이외에 다른 몇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당시 이것이 임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을 두려워 하여,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나는 임표는 당시 잘 생기지 못하였고, 온 얼굴에 누런 황선이 있어 보는 사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격도 괴이한 편이었다. 또한 임표의 집에는 미혼처가 있었다. 다음으로는 육약빙은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임표는 육약빙의 회신을 받은 후 떨리는 두 손으로 편지를 뜯었다. 편지의 글은 임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방안에 멍청하게 서 있다가 고통과 실망과 무정함에 둘러싸여버렸다. 육약빙은 임표의 요구에 대하여 이름 그대로 얼음처럼 차갑게 거절한 것이다. 임표의 첫사랑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 후 그는 오랫동안 마음을 다스려 큰 일을 이루겠다고 결심하고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글을 읽었고, 원래 말이 적었던 그는 더욱 말이 적어졌다.

 

그렇다면 육약빙이 사랑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바로 임육남이었다. 임육남은 육약빙보다 7살이 많았다. 그의 처는 왕수지(汪秀芝)였다. 그의 부모가 정해준 혼처였다. 왕은 머리가 좀 나빴고 말도 어둔했다. 이것은 임육남의 머리를 아프게 하였따. 그러나 육약빙의 부모도 육약빙을 위하여 혼처를 정했다. 육약빙은 부모가 그를 위하여 정해준 결혼을 피하기 위하여 무한으로 도망친다. 한편으로는 임육영이 연 수건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임육남에게 배운다. 안경여자사범학교에서 공부할 때 두 사람은 자주 연락하고, 감정은 갈수록 깊어졌다. 그러나 임육영은 두 사람의 내왕을 반대했으며 결국 두 사람은 같이 하지를 못하였다. 만년의 육약빙은 여러차례 이에 대하여 아쉬움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