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황소)

황소(黃巢)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

중은우시 2006. 2. 6. 16:59

황소는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으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오래전부터 여러가지 서로 다른 기록이 남아 있다. 우선은 당나라역사에 대하여 적은 <<신당서>>와 <<구당서>>의 기재가 서로 자살과 타살로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신당서>>는 송나라때 저술되었는데, 이 책을 완성하기 전에 이미 오대(五代)때 당서를 만들어두었다. 오대때 만든 당서는 <<구당서>>라고 부르고, 송나라때 구양수, 송기등이 참여하여 만든 것을 <<신당서>>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구당서>>가 비록 당나라때로부터 시기적으로 가깝기는 하나, 전란중이고 혼란스러운 때였으나, 송나라가 들어서서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고, 관련자료들을 종합정리할 수 있었으므로 <<신당서>>가 더 정확한 것으로 보고 있다.

 

1. 자살설 : <<신당서>>

 

<<신당서>>의 황소전에 의하면, 황소의 병사는 낭호곡(狼虎谷)에서 패한 후 외조카인 임언(林言)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의 목을 가지고 당나라에 투항하면, 너는 목숨을 건질 뿐아니라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언이 차마 황소를 죽이지 못하자, 황소가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황소가 스스로 칼로 목을 베었으나 죽지를 않자, 임언이 황소의 목을 벤 후 당나라군에게 투항하러 가던중 사타사람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사타사람들이 황소와 임언의 수급을 당에 바친다.

 

그러나, 역사의 전문가들은 이 기록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한다. 첫째, 황소와 같은 인물이 조카의 부귀영달을 위하여 스스로의 목을 베어 가져가라고 한다는 것은 그의 성격이나 인물됨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임언이 황소의 목을 가지고 당나라군에 투항하였다면 그는 절대, "황소가 스스로 자결하면서 저에게 이 목을 바치면 부귀영화를 얻을 거라고 했습니다"라고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임언은 사타 사람들에게 피살당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황소와 임언간에 이루어진 일을 누가 알아서 후세에 전하였는지도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자살설에 근거한 <<신당서>>의 기재는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2. 타살설 : <<구당서>>

 

<<구당서>>의 황소전에는 "임언이 황소와 그의 두 동생 업, 규등 7명을 참하고 그 수급과 처자를 함께 서주로 보냈다."고 기재하고 있다. <<구당서>>의 희종기, 시부전과 <<자치통감>>, <<계원필경록>>(최치원이 지은 글이다), <<북몽쇄언>>등 다른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재하고 있다.

 

임언은 원래 황소의 외조카로서, 황소의 주변에 있는 매우 중요한 장수의 하나였다. 황소가 장안으로 들어온 후에, 일찌기 500여명의 무공이 뛰어난 사람들로 하나의 특수부대를 만들었는데, 공학(控鶴)이라고 불렀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근위대에 해당한다. 그리고, 황소는 임언을 이 부대의 부대장인 군사(軍使)에 임명한다.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이런 견해가 합리적이라고 보고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 기본적인 사실로 볼 때, 임언이 황소의 수급을 가지고 당나라군대에 투항한 것은 사실로 보고 있다. 임언은 천여년간 주인을 배신하고 영화를 구한 인물로, 자신의 숙부를 살해한 인물로 알려져왔다.

 

그런데, 돈황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약간 다른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즉, 임언이 아니라 상양(尙讓)이 범인이라는 것이다. 1900년 음력 5월 26일에 왕도사는 우연히 돈황 막고굴의 비밀동굴을 발견하였는데, 그 문서중의 하나인 <<숙주보고>>에 의하면 "그 초적 황소는 상양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상양은 황소의 가장 가까운 장수로서 농민반란군의 두번째 인물이었다. 상양은 일찌기 왕선지를 따라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왕선지가 죽자 그 부대를 이끌고 황소에 의탁하였고, 황소가 장안을 친 후에 임명한 4명의 재상중 상양이 수석재상이었다. 다만, 상양이 죽였다는 기록은 이 기록밖에는 없다.

 

한편, 최치원의 <<계원필경록>>에 의하면 "당의 장수 시부는 황소반란군에서 투항한 장수를 이용하여 황소를 죽였다"고 적고 있다. 다만, 이 주장이 의심스러운 점은 당시 황소를 죽였다면 그가 투항한 장수이든 당나라 장수이든 큰 공을 세운 것이므로 당연히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황소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선 송나라때 소박의 <<하남소씨견문후록>>에 의하면 황소가 낭호곡에서 죽임을 당하고 목을 서주로 바쳤다면, 두 지방의 거리는 오륙백리가 되어 빠른 말로도 3일은 걸리는 거리이고, 서주에서 성도까지는 쉬지 않고 달려도 20일이 걸리는 거리이며, 당시는 한여름이었으므로 아마도 수급은 이미 부패했을 것이다. 더구나 황소의 형제 몇사람이 같이 죽었다면 그 중에는 반드시 황소와 용모가 비슷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므로, 황소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송나라때의 유시지가 지은 <<유씨잡기>>에 의하면 오대때의 고승중에 취미선사(翠微)가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황소라는 것이다. 더욱 신기한 일은 장단의가 지은 <<귀이집>>에도 비슷한 기재가 있다. 왕명청이 지은 휘진록에 따르면 장전의가 서경유수를 할 때, 여러 승려중에서 황소를 알아보았다는 기재도 있다.  또한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황소는 낭호곡에서 요행으로 도망친 후, 다시 낙양에서 녕파의 설두사로 와서 불법을 수양하여 일대의 고승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