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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황소)

황소(黃巢)의 황색 콤플렉스

by 중은우시 2009. 6. 19.

글: 지백수흑(知白守黑)

 

당나라말기의 농민반란군의 우두머리인 황소는 풍운을 질타하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당나라의 목숨이 위태롭게 만들었고, 하마터면 바로 붕괴될 뻔했다. 황소를 얘기하면 그저 잔인한 무부(武夫)의 이미지가 확 떠오르고, 그에게서는 그다지 문화적인 분위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부터 그 유명한 몇 수의 시들을 지은 것을 보면, 황소는 절대로 <<신당서>>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약간 글을 쓰고 기록할 줄 알았다"는 수준은 아니었다. 만일 사람들이 잘 모르는 그의 비밀을 들추어낸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황소가 약간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고, 그 문화는 아주 미신적이었으며 아주 황(黃)색이었다.

 

황소의 일생은 "황색"의 일생이다. 그의 경력은 "황(黃)", "금(金)", "국화(菊)"로 점철된 일생이다. 젊었을 때 국화시를 지었는데, 은근히 "황(黃)"색을 나타내고 있다. 거사를 한 후에는 "금색하마(金色蛤)", "황왕(黃王)"이라고 하여 '황색'을 드러냈다. 등극후에는 연호를 "금통(金統)"이라고 하여 역시 '황색'을 나타냈다. 이로써 보면, '황색'은 황소의 머릿 속에 깊이 뿌리박히고, 뼛속까지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황소는 왜 이렇게 황색을 좋아한 것일까? 그 배후에는 무슨 문화적인 신비가 담겨져 있을까?

 

"삽삽서풍만원재, 예한향랭접난래, 타년아약위청제, 보여도화일처개(颯颯西風滿院裁, 蘂寒香冷蝶難來, 他年我若爲靑帝, 報與桃花一處開)"

 

이 <<제국화>>라는 시는 전해지는 바로는 황소의 8살때 작품이라고 한다. 그 의미는 범상치 않아서, 읽은 사람이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가 지은 시 속에 어떤 고심막측한 밀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는 그저 황소의 가정이 부유했고, 문화적인 분위기에 가득 차 있던 가정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꽃을 심고 기르는 것을 좋아하고 매년 마당에는 국화를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소의 어린시절은 바로 국화세계에서 지냈던 것이고, 국화는 그에게 영감을 주었고, 집안교육은 그에게 글재주를 주었다. 황색도 영원히 그의 머리 속에 뿌리내리게 된다.

 

연연세세화상사, 세세연연인부동(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성년이 된 후에, 황소는 소금을 판매하면서도 머릿 속에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국화의 노란 색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국화에 대한 애정은 이미 일반 적인 감성적 인식의 수준을 넘은 거시었다. 과거에 낙방한 울분은 그로 하여금 "대도추래구월팔, 아화개후백화살, 충천향진투장안, 만성진대황금갑(待到秋來九月八, 我花開後百花殺, 沖天香陣透長安, 滿城盡帶黃金甲)"이라는 장려한 싯구를 읊게 했다. 이 시에 나오는 황(黃)과 금(金)은 다음과 같이 암시한다: 국화를 빌려서 황색을 얘기하고 황색을 빌려서 자신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위대한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왜냐하면 황색은 고대통치계급이 가장 존귀하게 생각한 색깔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황소의 국화시는 도대체 어떠한 인생포부를 드러낸 것일까?

 

<<논형. 험부>>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황(黃)은 토색(土色)이다. 중앙에 위치한다"  <<한서>>에도 이렇게 쓰고 있다: "황이라는 것은 중앙의 색이다, 군주의 의복이다" 고대에 사람들은 황색을 가지고 제왕이 천하를 차지하며, 중앙에 위치하는 것을 상징했다. 이는 당나라때도 마찬가지이다. 당고조 이연은 수나라제도를 답습하여, 황포(黃袍)를 입었고, 백성들은 노란색의 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민간에서는 황색의 사용이 금지된다.

 

황소는 성이 황(黃)씨인데, 조정은 황(黃)씨성을 금지했다. 이 점에 대하여 황소는 상당히 불쾌해 하였다. 그는 관청이 백성들에게 황색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신의 성이나 이름을 갈아치우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황씨성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국화는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고, 스스로 그 색깔이 된다. 이것은 자연의 조화이다. 이씨들이 명령을 내려도 국화에게는 헛소리이다. 하늘이 나를 낳은 것은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나 황소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씨당나라와는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는 국화시를 지어서 자신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반항정신을 표출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황취왕자복사방(黃取王者覆四方, 황색이 왕이 되어 사방을 뒤덮는다)"는 제왕의 포부를 나타낸 것이다.

 

황색의 존귀함을 알게 되면서, 황소는 황색에 더욱 빠져들고, 민감해진다. 그는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황색을 온갖 방식으로 활용한다. 당초 반란을 일으킬 때, "금색하마쟁노안, 번각조주천하반(金色蛤爭怒眼, 飜却曹州天下反)"이라는 말이 돌았다. 금색이라는 것은 결국 황색이다. 이 말은 결국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한 여론조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누가 만들어냈을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투에서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둔 후, 황소는 여러 형제들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된다. 그리고 황왕이라고 칭하며, "충천대장군(沖天大將軍)"이라고 불린다. 그의 명호는 여전히 황색과 관련이 된다.

 

황소가 남하하여 푸저우(福州)를 함락시킬 때, 군대내에서 소문이 돌았다: "봉유즉육, 사필복(逢儒則肉, 師必覆)" 이 말은 황소와는 무관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황소는 황색에 빠져있었다. 이 말을 황소로 하여금 돌연 깨닫게 하는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전투중에 유학자등을 만나면 죽이지 말고 풀어주라고 했다. 그러나, 황소가 푸저우를 점령한 후에 한 한 가지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문을 자아내게 했다. 황소는 부대를 이끌고 숭문관(崇文館) 교서랑(校書郞) 황박(黃璞)의 집을 지나가면서 명을 내렸다. "이 자는 유학자이다. 집의 불을 꺼줘라. 불에 타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처사 주박을 붙잡아 온 후에는 "나를 따르겠는가?"라고 물었다. 상대방이 "나는 천자도 모시지 않았는데, 어찌 도적을 따르겠는가?"라고 대답하자, 황소는 노하여 주박을 참해버렸다. 한 사람은 살리고 한 사람은 죽인 그의 거동을 보면, 황소는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포로로 붙잡은 유학자를 대했다. 황씨성을 가진 사람은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머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죽여버렸다. 이것도 그가 황색을 좋아하는 성격의 일단을 다시 한번 드러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황소가 황색을 좋아하는 촛점은 자신의 성씨에 집중되었다. 그것이야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다. 그런데, 등극후에 그는 오덕설(五德說)을 가지고, 자신의 황씨성을 미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추구하여 다른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다. 이것이 그의 진짜 실력이다. 광명(廣明) 원년 십일월(881년 1월 16일), 황소는 함원전(含元殿)에서 황제의 보좌에 오르고, 대제(大齊)정권을 수립한다. 연호는 금통이라 한다. 아마도 자신이 예전에 소금장수였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할 것이 걱정되었는지, 한가지 수완을 보여준다. 그는 '황(黃)'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글자를 분할하는 수단을 이용하여 자신이 황제에 오를 것이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고 대거 선전한다.

 

"광명"은 당희종 이환의 연호이다. 황소는 "광명"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억지로 "광명"을 "황"과 연결시킨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당나라황제는 짐이 거사를 일으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호를 "광명(廣明)"으로 바꾼 것이다. 그 글자를 보면 이미 당나라는 없어진 것이다. 당(唐)에서 "구(口, 인구 즉 사람)"과 "축(丑, 가축)이 모두 사라지고, 거기에 "황(黃)"이 들어앉았다. 하늘의 뜻이 이미 황씨가 자리잡았다는 것이니, 이미 황씨의 세상(日月, 明자를 나눈 것)이다."(구당서). 황소의 이 기술은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이씨의 왕조를 황씨가 대체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바뀔 수가 없고 추세이다. 하늘이 나 황소를 낳은 것은 바로 대당왕조를 끝장내기 위한 것이다.

 

하늘의 뜻도 있다. 그러면 그 뜻은 무엇인가? 여기서 그는 다시 "금통(金統)"이라는 연호를 들이민다. 금통이라는 연호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토(土)의 덕은 금(金)을 낳는다. 그래서 금이 왕이 되니, 연호를 금통으로 고치는 것이 좋다" 이 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황소는 중국고대의 오덕설에 대하여 연구를 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황제가 되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오덕설은 전국시대 추연이 제기한 것이다. 그는 오행상극의 원리를 통하여 왕조가 교체되는 법칙을 설명했다. 신흥왕조의 건립이 '하늘의 뜻'에 들어맞는다는 합법적 근거를 제공해준 것이다. 황소는 "오행상극"의 이론에서 그가 꿈꾸던 하늘의 뜻을 찾았다. 그는 자신했다. 당나라는 토(土)의 덕이고, 황색 옷을 입었으니, 다음 번에 대체하는 왕조는 반드시 금(金)의 덕을 입어야 한다고. 이것이 바로 그가 "금통"이라는 연호를 쓴 이유이다. "금통"을 연호로 쓰는 대제정권이 건립된 것은 역사법칙이고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다.

 

황소가 황색을 좋아한 것은 사실 헛소리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는 일생동안 국화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황색에 대한 미혹을 지니고, 황금의 부귀를 꿈꾸었다. 이는 모두 그의 내심에 들어있는 황제가 되겠다는 꿈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황색이든 국화이든 금이든, 그것의 색깔은 모두 같다. 그 본질은 고귀한 것이다. 황소가 일생동안 황색을 사랑한 것은 바로 존귀한 지위에 대한 추구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황소는 인생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모든 문화적 세포를 동원했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홀렸다. 이는 거꾸로 거의 문화적 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황소가 그저 '글쓰고 익히는 것을 약간 아는 정도'였더면, 이는 그를 무시한 것이다. 만일 황소의 조예가 아주 심오했다고 말한다면 그것도 적절하지는 않다. 그가 사람들을 홀린 기량이나 사람들을 죽인 기록을 보면 그에 대한 평가로는 "문화깡패"였다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