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한애정(韓愛晶) : 천파(天派)의 영수(領首)

중은우시 2006. 1. 10. 00:50

한애정은 강소성 연수현의 한 보통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찌기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불행히도 희생되었다.

계부는 중급간부로서, 열사의 후손을 잘 키워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한애정에게 엄격하게 대하였다.

한애정은 집안에서는 따뜻함을 느끼지는 못한다고 생각하여, 어릴 때부터 성격이 괴팍하고 우울하였다. 후에 북경항공학원에 합격한다.

 

문혁이 시작될 때, 그는 국방과학위원회에 "청원"시 연좌시위에 28일 밤낮을 버티는 대단한 활약을 펼친다. 이로 써 북경항공학원 "홍기"전투대의 총근무원(총사령관이라는 의미)이 되고, 일거에 문혁의 5대학생지도자중의 한명이면서, 천파, 지파중 천파의 영수가 된다.

 

한애정은 투쟁의 칼끝을 유소기에게 겨눈다. 1967년 7월 26일 그는 북경건공학원의 신팔일과 연합하여 유소기타도화선총지휘부를 성립하고, 비판회를 열며 인죄서(認罪書)를 제출하라는 것을 빌미로 수숩개 단위의 수천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중남해의 각문을 포위한다. 다행히 주은래 총리가 강제조치를 취하는 바람이 이 소동은 가라앉는다.

 

한애정은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수백명을 파견하여, 조사조, 연락처라는 명의로 전국 35개처에서 현지운동을 벌인다. 그는 또한 전국동태조도 구성한다. 1967년 4월에는 북경항공학원의 홍기전투대는 무한에 조사조를 파견하여 거기에서 조사된 자료는 당시 문혁소조의 왕력에게 전달한다.

 

1967년 7월 9일, 북경항공학원의 교실에서 한애정은 자신의 역사상 가장 더러운 글을 쓰게 된다. 이번 비판회의 대상자는 노원수 팽덕회였다. 당시 팽덕회는 서남국 건위 제3부주임을 맡고 있었는데, 한애정은 불법적으로 팽덕회를 끌고와서 투쟁회를 벌인다. 회의전에 북경위수구의 동지는 한애정에게 주은래총리의 5개항의 지시 "때려서도 안되고, 분사식도 안되고, 패를 목에 걸게 하는 것도 안되고, 길거리행진도 안되고, 만명이상의 투쟁대회도 안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한애정은 주총리의 지시는 이미 효력이 지났다고 선언하고 팽덕회에 대하여 구타와 고문을 가하여 팽덕회로 하여금 모주석을 반대하였다는 인정서를 쓰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강직한 팽덕회는 끝까지 서명을 거절하고, 한애정은 분노로 7번에 걸쳐 팽덕회를 때려서 땅바닥에 쓰러뜨린다. 팽덕회는 이미가 부서지고, 좌우측 5, 10 늑골이 골절되고 폐가 손상을 입는다. 1주일 후 북경항공학원에서는 수만명이 참가하여 팽덕회의 비판투쟁대회를 열어, 중병에 걸려 있는 팽덕회에 대하여 분사식, 패를 목에 달고 거리행진을 하게 하며, 다시 팽덕회를 심하게 구타하게 된다.

 

임표, 강청 일파의 지시를 받아 한애정은 서향전을 모함하고 타도하려고 시도하고, 장평화, 엽비, 서해동등을 붙잡아 박해를 가한다. 동시에 그의 북경항공학원네는 격리실이라는 명칭의 감옥을 18개를 만들어 465명을 조사하고, 그 중 170명을 불법적으로 감금한다. 그 중 20여명은 사망한다.

 

1979년 공안기관은 한애정을 정식으로 체포하여 1983년 6월 법에 따라 유기징역 15년의 형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