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섭원재(聂元梓) : 난세광녀

중은우시 2006. 1. 5. 14:48

 

 

섭원재(Nie Yuan Zi)는 하남성 북부의 활현이라는 농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4년 13세인 섭원재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개봉시의 북창여자중학에 입학한다. 1937년 7월 태원시의 국민사범대학에서 "희맹회"에서 주최한 군사훈련에 참가하면서 혁명의 길로 들어선다. 1938년 산서성 진성에 도착하여 화북군정간부학교에 입학한다. 이해 1월 17세의 섭원재는 공산당에 가입한다. 이후 그녀는 혁명성지 연안으로 전출되어 학습과 업무를 한다. 1946년 2월에는 하얼빈시로 전출되어, 구위원회 선전부장과 시위원회 이론부장을 맡는다. 이 기간동안에 중앙마르크스레닌학원(중공중앙당교의 전신)에서 학습한다. 1963년, 섭원재는 북경대학으로 발령받아, 경제학과 부주임을 맡는다. 1964년에는 철학과로 옮겨 당지부 서기를 맡는다. 이 때 42세의 섭원재는 이미 행정업무경험이 12년차인 간부였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때 그녀는 45세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중앙에서 파견된 조일우의 종용하게 섭원재는 6명의 동지들과 협의하여 대자보를 작성한다. 섭원재가 먼저 초안을 잡고, 토론을 통해서 마무리한 대자보의 제목은 <<송석, 육평, 팽패운은 문화대혁명중에 도대체 뭘 하였는가?>>라는 제목이었고 1966년 5월 25일 북경대 식당 동쪽 벽에 붙이게 된다. 송석은 당시 중국북경시위 대학부부부장이었고, 육평은 북경대학 서기 겸 교장, 팽패운은 북경시 대학부 간부겸 북경대학 부서기였다. 대자보의 조제는 "일체의 우귀사신, 일체의 후르시초프적인 반혁명수정주의분자를 견결히, 철저히, 깨끗이, 완전하게 소멸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 대자보의 내용은 조일우에 의하여 배껴져서 강생에게 보내고, 강생은 이를 다시 당시 항주에 머무르고 있던 모택동에게 보낸다. 모택동은 대자보를 읽은 후 6월 1일 "강생, 백달 동지: 이 글은 신화사를 통하여 전국에 보도하고, 전국 각 신문 잡지에 발표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북경대학 이 반동의 보루는 이로부터 타파하기 시작해야한다. 참작하여 처리하기 바람."이라는 답변을 보내고, 이 대자보는 전국에 알려지게 된다. 6월 2일 인민일보를 필두고 대자보를 싣고 사설을 실으며 전국에 알려지게 된다. 이후 8월 5일 모택동은 유명한 <<사령부를 폭격하라(砲打司令部)>>라는 글에서 섭원재의 대자보를 "전국 첫번째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라고 칭하며, 이 대자보는 "매우 잘 썼다"고 칭찬하게 된다.

 

섭원재는 한장의 대자보로 문혁의 풍운아가 되었다. 그녀는 먼저 북경대학 문혁주임에 오른다. 이어 1966년 8월 18일 오전에 모주석이 백만홍위병을 접견할 때, 섭원재는 천안문 성루에 올라 모주석의 접견을 받는다. 섭원재는 북경시 혁명위원회 부주임, 수도대학전문학교홍위병대표대회 핵심조 조장, 중공 제9차대표대회 후보중앙위원이 된다.

 

섭원재와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은 3가지 큰 일을 벌이게 되는데, 첫째는 '반도색출"이다. 섭원재의 지시하에 그들은 강생에게 보고서를 써서 팽진, 보일파, 안자문등을 반도로 몬다. 이러한 노혁명가들은 체포되어 옥에 갖힌다. 그 중 북경시 제2서기였던 유인은 사망에 이른다. 둘째는 주덕 위원장을 모함한다. 섭원재는 수하의 학생들을 끌어모아 "역사의 위조자, 반당야심가...주덕장군전을 재평가한다"등 3편의 문장을 써서 신북대보에 싣는다. 셋째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등소평 총서기를 향한 대자보를 써붙인다. 등소평을 "전국의 두번째 주자파노선의 당권파"로 몰아붙인다. 그와 동시에 섭원재는 등소평의 자녀들에게 해를 가한다. 등박방은 인신자유와 변명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당적에서 제적되고, 고문을 당한다. 등박방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일이었다.

 

1969년 11월 중공 제9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된지 얼마지나지 않아. 섭원재는 강서성 이어주 북대분교의 농장으로 쫓겨가 노동을 하게 된다. 그녀는 북경에 편지를 써서, 다음해 여름에는 북경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게 된다. 1971년초에 섭원재는 격리심사를 받게 되며, 행동자유를 제한당한다. 1973년 그녀는 북경신화인쇄공장에 보내어져 노동을 하게 된다. 1975년에는 북경의기공장으로 전출되어 노동을 한다. 사인방이 분쇄된 후 1978년 4월 19일 감옥에 갇힌다. 그녀는 1978년 17년형을 받고, 1984년 6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1986년에 가석방된다.

 

그녀의 개인생활은 매우 불행하였다. 1959년 38세때 첫번째 남편과 이혼한다. 주 이유는 정치적인 압력때문이었다. 1966년 두번째 남편과 결혼하나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보낸다. 문혁때, 그녀는 홍위병을 이끌고 남편집을 몰수하게 된다. 몰수후 남편의 전처의 아들이 북경대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피하고 만나지 않는다. 이후 두번째 남편과도 이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