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은 후궁은 많았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독특한 경우는 명헌종(明憲宗) 성화제(成化帝)와 만귀비(萬貴妃) 만정아(萬貞兒)의 관계를 꼽아야 할 것이다.
만정아는 명헌종보다 19살이나 많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명헌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명헌종은 일생동안 그녀를 사랑한다. 이것은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어떤 면에서 만귀비는 아주 매력이 뛰어난 여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역사상 한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후궁은 말로가 거의 전부 비참하였는데, 만귀비만은 죽을 때까지 황제의 사랑을 계속 받았는데, 이것도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만정아는 산동 제성 사람으로, 부친이 귀양을 가게 되면서, 4살때 궁중에 들어간다. 4살짜리가 뭘 알겠는가? 그녀는 손태후를 모시는 궁녀였는데, 손태후는 원래 미색이 뛰어났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몰래 궁녀가 낳은 아이를 자기가 낳은 것으로 해버렸다고 한다. 이 아이가 바로 후일의 명영종, 즉 명헌종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그 궁녀는 손태후에게 피살당한다.
이런 독랄한 주인을 모시는 만정아가 보고 배운 것은 모두 궁중내에서의 생존수단이었다. 그녀는 총명하고 영리하였으며 주인을 도와 여러 음모를 처리하는데 가담하며, 나이가 들자 그 수단은 손태후를 능가하게 된다. 만정아가 19살 때 헌종이 출생하는데, 헌종의 일생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부친인 영종이 "토목보(土木堡)의 변"으로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손태후는 영종의 동생인 경제를 황제에 올리면서 동시에 헌종을 황태자로 세운다. 그러나, 경제는 당연히 자기 자식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게 되고 이후 헌종은 3년후 황태자의 지위에서 쫓겨나게 되고, 궁녀와 같이 지내게 된다. 그러다 그가 10살이 되던 해에 영종이 "남궁복벽"으로 다시 황제위에 오르자, 그는 다시 태자의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 헌종이 태자에 복위한 후 손태후는 만정아를 보내어 그를 모시게 한다. 두 사람은 모친과 아들과 같은 연배였으며, 아주 힘든 시기를 같이 보내게 된다. 두 사람의 감정은 복잡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주인과 노비의 관계, 유모와 아이의 관계 그 후에는 거의 친모자에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고, 나이가 들면서는 서로 성관계까지 갖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약간은 기형적인 애정관계가 맺어지게 된다.
헌종은 성격이 유약하여 모든 일을 만귀비에게 의지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만씨는 헌종을 모실 때 곧잘 전투복을 입었다고 하고 헌종은 이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정치의 무서움을 보아왔기 때문에 헌종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계속하여 불안감이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금의위, 동창의 두개의 특무기관으로도 안심하지 못하여 다시 서창을 두었다. 헌종은 또한 낯선 사람과 만나는 것도 싫어하였다. 그래도 황제는 "경연(經筵)"에 참석해야한다는 규정을 어길 배짱은 없었다. 매번 경연시마다 한림원의 강연관이 강연을 하면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듣는 건지 안듣는 건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강연이 끝나면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관례인데, 헌종이 식사때 하는 말도 "선생 식사드시지요"라는 한마디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명영종의 아들로서 명헌종 주견심이 즉위한 때의 나이는 17세였다. 이 때 두 태후는 새 황제를 위하여 고르고 골라 오씨를 황후로 뽑는다. 그런데, 명헌종은 혼인후에도 오황후를 가까이하지 않고, 계속 만정아만을 찾는다. 오황후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서른이 훨씬 넘어선 만정아보다 어디 한 곳이 모자란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오황후로서는 명헌종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용모나 재주나 집안이나 품성이나 어느 것 하나 오황후보다 못한 만귀비였다.
헌종은 즉위후에도 만정아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의 마음속에는 만정아를 황후로 올리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만정아는 헌종보다 나이가 19살 많을 뿐아니라, 미천한 궁녀출신이어서 황후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헌종은 태후들의 뜻에 따라 왕씨를 황후로 삼고, 만정아는 비빈의 지위에 놓아두게 된다.
만정아는 이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황제는 자기의 치마폭안에 있었고, 황제가 결심만 하면 자신이 황후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오황후를 배알할 때도 공손하지 않았으며, 이는 오황후의 심기를 건드렸다. 처음에는 헌종의 체면을 봐서 참아줬지만, 만귀비의 오만함은 날이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참지 못한 오황후는 궁녀를 시켜 만정아를 붙잡게 하고 친히 나무몽둥이로 몇대 때리게 한다.
만정아는 헌종에게 달려갔고, 헌종은 대노하여 "내가 황후를 폐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고는 소리치고, 양궁 태후에게 달려가서, 황후를 폐하겠다고 한다. 마음약한 헌종의 생모 주태비는 결국 동의하여, 마침내 오황후는 폐위된다.
만정아는 황후의 자리를 노렸지만, 주태후는 만정아가 나이도 많고,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는다. 2개월 후에 현비로 있던 왕씨를 황후로 올린다. 그런데, 왕황후는 성격이 유약하여 모든 일에 참고 은인자중하며 허수아비 황후로 남게 된다.
성화2년 만정아는 황장자를 낳게 되는데, 헌종이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귀비에 올린다. 그러나 황장자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요절하게 되고, 만귀비는 이후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한다. 황후자리를 노렸던 만귀비는 이후 다른 비빈이 아이만 가지면 갖은 수단을 다하여 낙태약을 먹였고, 비빈들을 만귀비가 무서워 눈물을 흘리며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성화5년에는 백현비가 아들을 낳는다. 헌종이 매우 기뻐했지만, 다음해에 황태자는 돌연 사망한다. 궁녀와 태감들은 황태자가 독살당하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이를 말하지 봇한다.
다시 6년이 흐른 후, 헌종은 자식이 없어 한탄하고 있는데, 태감 장민이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헌종이 무심결에 "짐은 늙었는데, 자식 하나 없구나"라고 한탄하였다. 그러자 장민이 황제앞에 엎드리며 "소신의 죄를 용서하여주십시오. 사실을 말씀드리면, 황제께도 자식이 있습니다."라고 한다. 헌종이 놀라 연유를 물으니, 장민은 예전에 기씨가 황제를 시침한 후 아이를 가졌는데, 만귀비가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 임신이 아니라 배가 부른 병에 걸렸다고 하면서 몰래 자식을 낳았다. 자식을 낳은 후에도 만귀비의 보복이 두려워, 장민에게 아이를 바깥에 버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장민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이를 몰래 길러왔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기뻐하며 아이를 데려와 황태자(나중의 명효종 홍치제)로 앉히고, 기씨도 비로 봉하게 된다. 그런데, 만귀비는 어느날 기씨를 독살한다. 헌종은 그 사실을 알았겠지만 별다른 말이 없이 후하게 장사지내도록 지시할 뿐이었다. 장민은 만귀비의 독수가 자신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자살한다.
만귀비는 황태자도 처치하고자 하였으나, 태후가 황태자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하여 자신들이 태후궁에서 길렀으므로 어찌하지를 못한다. 하루는 만귀비가 난리를 치며 황태자를 폐할 것을 요구하고, 명헌종은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고 응락한다. 그런데, 마침 그 때 산동의 태산에 지진이 일어나고 신하들이 이는 태자를 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하늘이 노한 것이라는 진언을 하자 황태자를 폐하지 못하게 된다.
만귀비는 황태자를 몰아내려는 술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스스로 병을 얻었다. 성화23년 나이가 58세에 이른 만귀비는 궁녀하나에 화가나서 때리다가 몸이 너무 뚱뚱해서 숨이 막히는 상황이 되고, 이 때 드러누워 결국 죽게 된다. 그녀가 죽자 헌종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7일을 정사를 돌보지 않고, 이 때부터 우울해하며 "만귀비가 갔으니 내가 얼마나 더 살 것인가"라고 탄식하다가 몇달 지나지 않아 그해 8월에는 명헌종도 따라 죽는다. 이 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만귀비가 중년의 몸으로, 20년이상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20여년간 무명유실한 황후 역할을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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