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정덕제는 이름이 주후조(朱厚照)로 중국역사상 가장 황당한 황제중의 한명이다. 그는 38세를 일기로 죽었는데, 역사에 3가지 기이한 행적은 남긴다.
정덕제는 재위기간동안 태자궁에서 그를 모셨던 태감(환관) 유근(劉瑾)등 8명을 총애하여 밤이고 낮이고 드들과 어울렸다. 세간에서는 유근 등 8명을 "팔호(八虎)"라고 불렀다. 대학사인 유건(劉健)등은 팔호를 주살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나, 정덕제는 팔호의 편을 들어 유근에게 사례감, 금의위, 동창등을 책임지게 하고, 정직한 대신들은 이들에게 해를 입었다. 정덕제는 유근, 전녕, 강빈등의 총신을 계속 등용하였다.
정덕제는 또한 스스로 황제를 하고자 하지 않고, 스스로 대장군이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정치는 총애하는 신하들에게 다 맡겨버리고, 자신은 시위와 친병을 데리고 궁을 나가 돌아다녔다. 그는 스스로를 위무대장군(威武大將軍)에 임명하고, 대신들에게 위무대장군의 명의로 명을 내리곤 하였다.
정덕제는 정력도 왕성하여, 자금성의 엄숙한 분위기를 싫어하여, 즉위하고 얼마되지 아니하여 서원 태액지(현재의 중남해)의 서편에 궁궐을 짓게 하고 표방(豹房)이라고 하였다. 표방의 건축구조는 매우 복잡하여 상하 양층인데, 밀실들이 연결되게 되어 있었다. 정덕제는 여기서 천하의 미녀, 악사, 승려, 도사, 술사를 불러들여 종일 즐기고 놀았다. 표방에 틀어박혀 수십일에서 수개월동안 자금성으로 돌아오지 않은 적이 많았다. 정덕제는 또한 병방을 지키는 부대를 어원으로 오게 하여 표방에서 군사훈련을 하곤 하였다.
그는 정덕 15년 남순시에 배가 뒤집혀져서 물에 빠졌으며, 북경으로 돌아온 다음 해 3월에 표방에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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