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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고미(顧眉): 진회팔염(秦淮八艶)의 하나

by 중은우시 2006. 10. 22.

 

 

남경의 진회하는 기원(妓院)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중에서 명말에 가장 유명했던 기원중의 하나가 미루(眉樓)이다. 이 미루의 주인은 이름이 고미(顧眉, 혹은 顧媚라고도 쓴다)였고, 자는 미생(眉生)이었다. 나중에 이름은 서횡파(徐橫波), 자는 지주(智珠), 호는 선지(善持)로 바꾼다. 강소성 상원(上元, 현재의 남경) 출신이다. 당시 사람들이 그녀의 용모를 묘사한 것을 보면 "아름답고 우아하였으며, 풍모가 아주 뛰어났다. 도화꽃이 핀 것같았고, 발은 작았고, 허리는 가벼웠다" 그녀는 진회팔염에 속하는 재녀였으면서 청초의 일품고명부인이기도 했다. 그녀의 인생은 전설적이면서 특이한 면이 있다.

 

첫째, 기녀이면서 기루의 주인이었다. 이 점에서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몸이 팔려 기녀가 되었던 다른 진회팔염의 유여시, 동소완, 진원원등과는 상황이 달랐다.

 

둘째, 문학, 역사에 통했고, 그림을 잘 그렸으며, 금기시서에 모두 정통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가 그린 난초를 당대의 뛰어난 작품으로 꼽았다. 노래도 남곡제일이라는 평을 들었다. 시는 <<유화각집>>이 전해진다.

 

셋째, 유명한 기녀이고, 아는 사람이 많으면서 사귀는 사람은 매우 가려서 뽑았다. 그녀를 '미형(眉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친구는 겨우 몇 사람에 불과했다. 물론 짝사랑을 하는 남자는 무수히 많았다.

 

넷째, 고르고 골라서 당시의 유명인사인 공정얼(龔鼎孼)에게 시집을 간다. 그는 전겸익, 오위업과 더불어 강좌삼대가로 호칭되던 명사였다. 그런데, 그는 세황조를 바꿔가며 두번이나 투항하며 변절한다. 명나라의 진사이면서 병과급사중이었던 그는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자 적시에 글을 올려 직지사에 봉해지고, 북성을 순시한다. 수십일후에 이자성이 도망치고 청나라가 입관하자 다시 청나라에 항복해서 병과급사중의 직위를 받는다. 나중에 호부좌시랑, 도찰원좌독어사, 병부상서에 이른다.

 

다섯째, 선비의 절개를 중시여기던 고미는 공정얼에 실망하여 청나라군대가 북경을 점령하고 공정얼이 다시 청에 항복한 후에, 옛친구인 오애자(吳崖子)와 남으로 도망쳐 버린다. 나중에 공정얼이 여러가지로 달래서 다시 결합한다.

 

여섯째, 공정얼의 집에는 본부인이 있었고, 고미는 측실이었다. 그러나, 부인에 봉할 때, 일찌기 버림받았던 본부인은 스스로 양보한다. "나는 양조에 벌써 부인의 책봉을 받았으니, 본황조의 은전은 고부인께서 받으시라" 이것은 남편이 절개를 지키지 못했음을 풍자하면서, 고미가 변절로 받은 고명부인을 받을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미는 기꺼이 봉함을 받고, 일품고명부인이 된다.

 

일곱째, 청나라의 일품고명부인이면서, 재물을 풀어 가난한 사람을 구해주고, 의로운 일에 돈을 썼다. 그녀의 돈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반청인사가 많았다. 예를 들어, 부산(傅山),염이매(閻爾梅)등은 모두 청나라에서 체포하고자 하는 반청요인들이었다.

 

여덟째, 고미는 결혼후에 임신을 하지 못했는데, 갖가지 방법으로 아이를 갖고자 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다. 아들을 낳기 위해서 향나무를 남자아이로 깍았는데, 사지가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비단으로 강보를 만든 다음에 유모로 하여금 젖을 물리도록 하였다. 사람들이 나무조각을 소상공(小相公)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기행은 사람들의 예상을 초월했다. 당시 항주일대에 거주하던 사람의 눈에는 요망한 여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고미는 말년에 겨우 딸을 하나 낳는데, 낳은지 몇달되지 않아 죽어버린다. 이로 인하여 병이 깊어 강희2년에 북경에서 사망하니 그녀의 나이 44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