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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유백온(劉伯溫) : 명(明)의 주원장의 군사

by 중은우시 2005. 9. 21.


 

 

유기 (Liu Ji : 劉基 : 1311-1275)

 

유기의 자는 백온이다. 그는 제갈량과 비견될 정도로 재지가 탁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전조군사제갈량(前朝軍師諸葛亮) : 전 황조의 군사는 제갈량이요

후조군사유백온(後朝軍師劉伯溫) : 후 황조의 군사는 유백온이다

 

삼분천하제갈량(三分天下諸葛亮) : 천하를 셋으로 나눈 것은 제갈량이요

일통강산유백온(一統江山劉伯溫) : 강산을 하나로 통일한 것은 유백온이다.

 

유백온은 중국역사상의 탁월한 군사전략가, 정치가, 문학가, 철학가이다. 그는 어려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뜻을 품고 23세에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의 원나라 정권은 황제가 무능하고, 관리는 부패하였다. 그는 나름대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곳곳에서 그의 뜻은 막혀버렸고, 결국 그는 48세 되던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은거하며 <<욱리자>>2권을 지었다.

 

당시, 후에 명나라를 건국하는 주원장은 유기의 명성을 흠모하여, 산을 나와 도와주기를 간청하였다. 이 때 유백온은 이미 50세였는데, 금릉으로 가서 "시무18책"을 올려, 천하를 얻는 방책을 제시하였다. "먼저 진우량(陳友諒)을 멸하고, 다음에 장사성(張士誠)을 멸하며, 그 후에 북으로 중원으로 올라가서, 천하를 통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보고 주원장이 매우 기뻐하여 예현관(禮賢館)을 따로 지어 그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였다. 이 때부터 유백온은 주원장의 주요한 참모가 되었으며, 큰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유백온은 명개국의 최대공신중의 하나이지만, 주원장이 공신들에게 작위를 줄 때, 유백온은 명리를 탐하지 않고 겸양하여 다른 공신들보다는 훨씬 낮은 작위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강직하여 당시의 승상 이선장과 호유용등으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으며 결국 유백온은 스스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물러났다. 이 때 그의 나이 61세였다.

 

후에 승상인 호유용은 유백온의 조상이 "왕기"가 있는 묘지를 잡았다는 모함을 하였으며, 이에 주원장은 유백온으로 하여금 남경으로 오도록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유백온이 병에 들었을 때 호유용이 보낸 태의의 약을 마신후 병이 악화되었다. 주원장이 사람을 보내 유백온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는데, 귀향도중에 사망하였다. 나이 65세때였다. 

 

그와 관련하여서는 여러가지 전설들이 많이 전해지는데, 그가 하였다고 하는 말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도 한다.

 

금일등화조상, 내일등화조하 (今日燈火朝上, 來日燈火朝下) :

오늘은 등이 위로 불을 비치지만, 내일은 등이 아래로 불을 비칠 것이다.

 

금일활우경지, 내일철우경지 (今日活牛耕地, 來日鐵牛耕地)

오늘은 살아있는 소가 땅을 갈지만, 내일은 쇠로된 소가 땅을 갈 것이다.

 

이외에, 그가 남겼다는 <<소병가(燒餠歌)>>는 중국의 이후의 역사를 예언한 것이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