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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심만삼(沈萬三) : 원말 명초의 거부

by 중은우시 2006. 1. 4.

심만삼은 이름이 부(富)이고 자는 중영(仲榮)이며 속칭이 만삼(萬三)이며, 원나라 말 명나라 초 때의 사람이다.

 

심만삼은 돈을 번 후에 소주를 근거지로 사업을 벌였으므로, 원말의 혼란기 때에는 소주를 기반으로 한 장사성(張士誠)의 대주(大周)정권을 지지하였고, 장사성은 일찌기 심만삼을 위하여 비석을 세워준 바 있다.

 

명나라 초기에 주원장이 천하를 통일하고 남경에 도읍을 정하자, 그는 돈을 내어 남경성의 성벽을 쌓는데, 1/3의 비용을 혼자 부담한다. 이에 주원장은 그의 두 아들에게 벼슬을 내린다. 후에 그는 운남으로 귀양가서 거기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

 

심만삼은 주장(周庄), 소주, 남경, 운남에 모두 족적을 남겼는데, 본인은 주장을 자신의 근거지로 항상 생각했다. 명나라때의 기록에 의하면 만삼의 집은 주장에 있는데, 부서진 집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되어 있다. 그는 장사성과 주원장으로부터 모두 두터운 대우를 받았지만, 주장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돈을 번 방법에 대하여는 주로 3가지를 얘기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심만삼은 청개구리를 구해준 적이 있는데, 이로 인하여 못옆에서 하나의 취보분(聚寶盆)을 얻었다고 한다. 이 취보분에는 돈을 넣으면 순식간에 넘칠 정도로 쌓인다고 하며, 금이나 은을 넣으면 금이나 은이 넘쳤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심만삼은 부자가 되었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는 믿을 수 없는 전설에 불과하다.

 

첫째, 개간설. 많은 사료에 모두 기록이 있는데, 곤산의 진조홍이 "명대경제사학술토론회"에서 발표한 "명초거부 심만삼의 치부와 쇠락"이라는 글에 의하면 심만삼은 농사로 집을 일으켰고, 많은 전답을 늘여 부를 쌓았고, 재산이 엄청났으며 논밭이 천하에 퍼져있다. 그는 주로 개간에 의존하여 부를 쌓았다는 것이다.

 

둘째, 분재설. 어떤 사람은 심만삼의 부는 사실 육씨집안에서 재산을 나누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원나라때 부자인 육도원은 천하제일의 부자였는데, 말년에 그의 재산관리를 2 사람에게 맡기고, 그 재산을 넘겨주었는데, 심만삼이 그 중의 한 명이라는 것이다.

 

셋째, 무역설. 심만삼은 무역을 통해서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오함에 따르면 소주의 심만삼이 최고의 부를 이루게 된 것은 해외무역때문이었다고 한다.

 

보통은 심만삼은 이 세가지 모두에 의하여 부자가 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그 중의 어느 하나에 의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육씨의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 부의 기초가 되기는 하였으나, 이후 개간과 무역등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심만삼도 주원장에 의하여 세번의 타격을 받고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 세번의 타격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타격. 홍무원년(1373년)에 심만삼이 남경성의 1/3을 지었는데, 주원장에게 '병사들에게 향응을 내려달라'고 청한다. 이를 들은 괴퍅한 주원장은 '일개 필부가 어찌 천자의 군대에 향응을 내려달라고 청하는가? 이것은 흑심을 품고 나라를 어지럽히겠다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심만삼을 죽이고자 하나, 황후가 "제가 듣기로 법은 불법을 저지른 경우에 죽이는 것이고, 불길한 일을 했다고 죽이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백성이 돈이 많아 조정보다 많다면 이것은 불길한 것입니다. 불길한 사람은 하늘이 벌할 것입니다. 황제께서 죽이실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간하여 죽이지는 않고 운남으로 귀양을 보낸다. 이 때 심만삼이 귀양가는 외에 둘째 사위도 조주로 귀양간다. 이 때 심만삼은 성벽을 쌓는데 큰 돈을 썼을 뿐아니라, 귀양가게 되면서 많은 친족들이 연루되고, 주인이 귀양을 가는 바람에 재산의 거의 절반을 날렸다고 한다.

 

두번째 타격. 홍무19년(1386년)에 심만삼의 아들인 심왕의 두 아들인 심지와 심장이 사건에 연루되어 심장은 옥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도 심씨집안의 가업의 기초를 흔들게 된다.

 

세번째 타격. 홍무26년부터 31년(1398년)까지 사이에 남옥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심만삼의 증손인 덕전등 6명, 그리고 세째사위인 고학문의 일가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전답을 몰수당한다. 이 때까지는 심씨집안이 여전히 부를 자랑하였으나, 이 때 큰 타격을 입고, 여기서부터 심씨집안의 가업은 급격하게 몰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