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경제/중국의 외국인투자

중국에서의 외국인투자구조의 변화 (1)

by 중은우시 2005. 9. 20.

아래 글은 중국상무부 연구원인 Li Jing Jing(李晶晶)이 <<중국외자>> (2005년 제5기)에 기고한 글입니다.

 

======================================================================================

 

현재, 중국이 매년 이용하는 외자는 전국고정자산투자의 1/10가량이다. 외자기업의 수출과 수입은 각각 전국총액의 50%이상을 차지한다. 외자기업이 납부하는 세금은 전국세수의 20%이상이다. 외자기업이 흡수한 취업인원은 약2,200만에 달한다. 외자는 중국경제발전의 엔진이 되었다. 2004년말까지 중국은 외국인직접투자를 5,600억달러 유치하였다.

 

외사이용의 형식은 합자, 합작, 독자 및 M&A등으로 나눌 수 있고, 다국적자본의 진입방식과 변화의 시간경과로 나누면, 외자의 대중투자구조변화는 세 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개혁개방을 제기한 때로부터 1992년이전까지인데, 이 때는 외국자본이 중국을 주로 저급제조기지로 보았다. 둘째 단계는 1992년이후로 이 때는 외자가 대규모로 중국에 투자하는 단계이고, 개혁개방의 두번째 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국적기업이 중국의 거대한 제조능력과 시장규모를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중국에 운영센터를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아시아지역본부 및 연구개발센터와 같은 것이다. 이 기간동안 외자투자의 형식은 다양화하고 자본운영수단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을 노동집약형 제조센터로 취급하였다. 셋째단계는 최근에 대량으로 나타난 M&A 사건 특히, 갈수록 많아지는 다국적기업의 독자기업화 조류이다. 이것은 자본의 전세계적확장에 따른 필연적 추세이고, 외자는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개방을 강화하고 정책이 한걸음더 완화되는 것을 이용하여, 자본이익의 진입과 발전방식에 맞추어, 중국내에서 사업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1. 합자시기

 

공업기술의 발전은 외국 대형제조기업으로 하여금 본국에서의 생산과잉을 초래하였고, 전세계적인 자원배분 및 제조원가의 최적화를 위하여, 제조업중의 제조단계를 개발도상국가로 이전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일본, 한국 및 싱가포르등 일부 동남아국가들은 1950년대에 공업화를 통하여 발전하였으며, 중국의 차례가 된 것은 1980년대이다. 그러나 이 때는 중국본토의 소비능력과 시장규모가 외국인투자자에게 매력이 없었다. 다만, 중국은 대량의 저임금노동력이 있고, "개방"을 위하여 세수, 수출입등의 측면에서 각종 외자유치를 위한 우대정책을 내놓았다. 이리하여 기술수준은 높지 않으면서, 인력원가가 저렴하고, 비교적 낮은 단계의 제조공장이 중국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제조한 후 본국이나 제3국으로 수출하는 것이다. 내료가공, 내양가공, 내건장배의 "삼래일보"기업은 이러한 상황하에서 발전하였다. 그들은 외자에 중국의 대량의 저임금노동력을 이용하여 제조능력을 증가시키고, 기업규모를 확장하는 일종의 좋은 모델을 찾게 해주었다. 이 시기에 외자의 특징은 중소투자규모가 위주였으며, 비교적 낮은 자본,기술집약적이면서, 비교적 높은 노동집약적인 제품이 위주였다. 수출은 가공무역위주이고, 투자영역은 주로 제조업과 부동산업에 집중되었다. 대외경제무역합작부 외무사의 통계에 따르면, 1979년에서 1991년까지 중국은 외자계약금액 525.92억달러, 실제이용한 외자금액은 250.58억달러였다.

 

1980년 5월 1일, 홍콩상인 오점덕(伍沾德)이 중국민항북경관리국과 합자로 북경항공식품유한공사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국가외자투자관리위원회의 비준을 받은 전국에서 첫번째 합자기업이었다. 이로부터 합자합작을 주요방식으로 하는 중국투자의 길이 열렸다. 이 때 외국투자의 주체는 주로 홍콩,대만,마카오등지의 화인(華人), 화교(華僑)의 투자였다. 이러한 화인화교는 내지의 각양각색의 관계에 의지하고 또한 조국의 개방에 부응하여 애국심을 가지고 그의 자산을 중국연해경제개방특구 및 자기의 고향으로 투자하였으며, 일시간에 "화교"는 80년대 빈곤한 중국인들에게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일부 구미의 대형 다국적기업들도 이 때 중국에 진입하기 시작하였으나, 대다수는 중국에 연락사무소 또는 합자의 형식이었으며, 여전히 시험적 단계였다.

 

이 시기의 외자는 주로 합자합작의 투자방식이 위주였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당시 중국의 외자이용정책과 국내계획경제의 색채가 농후하였다는 점등의 사유로 인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80년대를 관통하여 대형 다국적기업의 진입규모나 외자의 투자방식 선택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는 중국시장의 개방초기에는 불확정한 요소가 너무 많았다. 둘째, 다국적기업은 중국시장 자체의 대소문제를 고려하였다. 셋째, 중국은 일부 업종을 대외에 개방하지 않았다. 이외에 어떤 영역에서는 중국이 비정상적인 가격체계를 유지하고 있어, 가격왜곡이 있었고, 다국적기업의 입장에서는 이익을 챙길 수 없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우려는 HP의 중국내에서의 발전과정을 살펴봐도 알 수가 있다. 1981년, HP는 중국에 대표처를 설립하였고, 4년후에 한단계 더 나아가 합자로 중국HP를 설립하였다. 합자의 첫 발은 자연히 합자파트너를 선택하는 것이었는데, HP로서는 두 가지의 선택이 가능하였다. 하나는 모 국영전자계기공장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전자기술수출입총공사였다. 이전의 다국적기업의 운영경험과 단기이익의 측면에서 보면 계기공장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제품을 통하여 비교적 빠른 기간내에 현금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HP가 선택한 것은 "중전"공사였고, 그 원인은 사실 매우 단순하였다. 쌍방간의 의견교환과정에서 HP는 "중전"은 외국회사들과 거래한 경험이 있고, HP와의 의사소통에도 장애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HP가 민감하게 본 것은, 아직 완전한 개방이 되지 않은 중국에서, "중전"의 주변에는 자원이 더욱 풍부하였고, 이것은 현지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외지인"의 입장에서는 더욱 가치있는 것이었다. 현재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당시 HP의 선택은 옳았다는 것이다. HP처럼 초기에 중국에 진입한 다국적기업도 여러가지 중요한 전환점을 경험하였고, 중국과 서방의 문화상에서, 관리체계상에서 차이가 있고, 국내정책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어, 이를 소화하는데에만 근 6,7년이 걸렸다.

 

종합적으로 보면, 이 시기의 다국적기업은 중국진입의 전략에 있어서 아래와 같은 몇가지 선택이 가능하였다. 100%자회사, 합자기업, License계약, Franchise경영계약, 해외생산및수출입. 그들은 우선 수입과 합자회사의 형식으로 중국시장에 진입하였는데, 이것은 합자기업이 중국측기업이 이미 건립한 판매네트워크와 유명브랜드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합자는 재무지출을 절약할 수 있었고, 대중투자비용을 많이 절감시켰으며, 동시에 현지정부의 해외기업이 국내기업을 대체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감소시켰고, 적지않은 우대정책을 누릴 수 있었다.

 

당시 국내시장 소비수준의 한계로 인하여, 일부 외자기업은 국내기업과 합작할 때, 중요하게 본 것은 중국시장에서의 제품판매에서 얻게 되는 이윤이 아니라, 단지 높은 가격으로 합자기업에 생산설비를 판매함으로써 큰 돈을 한꺼번에 벌고자 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저임금노동력을 이용하려는 생각에서, 외자기업이 원한 것은 중국을 생산기지로 하는 것이었고, 생산한 제품은 여전히 주로 해외시장에 공급하였다.

 

일부 외국인투자지분비율에 제한을 받지 아니한 일부 전통영역 예를 들어, 식품, 일용품등에서는 외국투자자는 브랜드를 중시했다.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로 인하여 100%자회사의 방식으로 중국시장에 진입하면, 브랜드를 광고하는데 큰 돈을 들여야 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유명상표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우회적인 책략을 택하였는데, 먼저 합자를 통하여 중국측의 브랜드를 매입해버리고, 점진적으로 자신의 국제적인 브랜드이미지와 이러한 브랜드를 결함시켜나갔다. 그 후에 다시 자신의 소위 국제유명상표를 내놓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브랜드로 국내브랜드를 대체하였다. 이것은 일용품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예를 들어 미국의 P&G는 "Xiongmao(熊猫)"브랜드를 매입했고, 독일의 Reckitt Benckiser(利潔時)는 "활력28"이라는 브랜드를 매입했고, Colgate는 "Sanxiao(三笑)"브랜드를 매입한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순조롭게 시장에 진입할 뿐아니라, 또한 강력한 경쟁자를 없애는 방안도 된다. 이러한 절차가 점차적으로 완성된 후, 국내의 시장은 점진적으로 성숙했고, 이 때 합자기업은 외국투자자가 가져오는 혜택이 없어졌을 뿐아니라, 동서문화와 관리방법에서의 모순이 점점 첨예화되었다. 지분비율의 원인으로 인하여, 외국인투자자는 자기의 뜻에 따라 그가 국외시장에서 보편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기업문화와 조직시스템을 실행할하기 어려웠다. 여기에는 품질시스템, 작업관리, 정보관리와 기술혁신도 포함된다. 100%자회사가 된 후의 또 하나의 장점은 그의 이윤을 세계각지의 자회사들과의 사이에 합리적으로 분배하고 이전시킬 수 있게 되어, 적당히 세금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보는 많은 합자기업은 이후 하나씩 서로 헤어져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개방초기에 전략적산업으로 여겨지던 분야는 처음에는 합자에 지분비율상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외국투자자는 지배지분을 가질 수 없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이 심화되고 WTO에 가입하기 위한 발걸음을 빠르게 추진한 이후에 이러한 영역도 하나씩 개방되었고, 합자에서 독자로 방향이 바뀐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