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서29년(1903년) 미국의 주중대사의 부인은 서태후(자희)에게 미국의 여자화가 케이트 칼(Kate Carl)을 소개했다.
서태후는 길흉에 대한 미신을 믿었으므로, 윤오월 20일(양력 7월 14일)을 택하여 저녁7시부터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늦은 시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태후를 모시는 덕령이 완곡하게 서태후에게 권하여, 결국 오전 10시로 결정되었다.
서양화에 대하여는 전혀 몰랐던 서태후는 그림을 그리는데 몇가지 문제를 발생시켰다. 왜 앉아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 다른 사람이 대신 앉아있으면 안되는가? 매일 똑같은 의복을 입고, 똑같은 악세사리를 해야하는가? 그림을 그리는 날, 서태후는 사람을 시켜 화장을 아주 곱게 하였고, 저녁에는 자색모란을 수놓은 조복으로 갈아입었고, 수(壽)자가 새겨진 구슬을 박은 목도리를 하였으며, 머리에는 나비와 생화를 꽂았드며, 손에는 옥팔찌를 차고, 두 손의 손가락에는 길다란 손톱보호갑을 끼웠다.
케이트는 서태후를 위하여 첫번째 유화초상을 그렸고,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 보내서 전시하고자 하였다. 서태후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므로 친히 완성일자를 지정하여, 평소에도 자주 케이트의 화실에 와서 그리는 것을 보고, 색칠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흥분하였다. 1904년 4월 4일, 화상이 완성되는 말, 서태후는 외국의 대사들과 부인을 초청하여, 서원삼해에서 화상을 보도록 하였다. 그 후에 청나라조정에서는 황족대표를 파견하여 이 그림을 미국으로 보내 전시하도록 하였다. 이 그림은 전시회가 끝난 후, 미국정부에 기증하였으며, 현재 워싱턴국가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케이트의 두번째 초상을 그릴 때에는, 서태후는 꽃이 그려진 남색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에는 자스민꽃구슬 몇개를 꼽고, 곁에는 구슬나비를 꽂았다. 케이트의 요청에 따라, 서태후는 그의 두 마리의 애견도 그림에 같이 그려넣었다. 서태후는 이 초상화를 매우 좋아하여, 자신의 침궁에 두었다. 이 그림은 후에 어디로 갔는지를 모른다.
케이트가 그린 세번째 초상은 현재 고궁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 초상화에 그려진 서태후는 겨울조복을 입고 있고, 명주로 꾸몄다.
케이트가 서태후를 위하여 그림을 그린 8,9개월의 기간중에 서태후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 저것 물어보았다. 대부분은 스스로 옷을 차려입고, 케이트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만일 시간이 오래 걸리면, 서태후는 덕령으로 하여금 자신의 옷을 입고 그녀의 악세사리를 하고 그녀를 대신하여 그곳에 앉아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매번 얼굴 표정을 그릴 때이면 서태후는 친히 좌정하여 있었다.
서태후는 케이트의 그림에 매우 만족하였고, 이 여화가를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광서30년, 서태후는 외무부대신을 미국주중대사관에 파견하여, 태후께서 케이트가 그린 그림에 대하여 매우 만족하고 계신다는 뜻을 전하도록 하였고, 여러 비단과 보석을 주어 감사를 표하고, 은표1만2천냥을 보수로 주었다.
중국청말의 역사이야기를 그린 <<화소원명원(火燒圓明園)>>이 시작할 때,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서태후의 유화화상이다. 이 높이 2.23미터, 폭 1.42미터의 커다란 유화의 그림 왼쪽아래에 "Hubert Vos"라고 쓰여있고, 한어로 "화사.호박공회(華士, 胡博恭繪)"라고 쓰여있으며, 현재 북경 이화원내에 보관되어 있다.
1972년 영국런던에서 출판된 Marina Warner의 <
현재는 Hubert Vos가 서태후를 위하여 두 폭의 초상을 그린 것은 알고 있으나, 그가 도대체 몇 폭의 초상을 그렸는지 언제 궁에 들어가 그렸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서태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태후가 쓰던 도장 (0) | 2006.03.01 |
---|---|
서태후와 서예가 (0) | 2006.02.23 |
서태후(西太后)의 글씨 (0) | 2006.02.07 |
서태후의 명호 (0) | 2005.12.30 |
서태후(西太后)와 야명주(夜明珠) (0) | 2005.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