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의 정식시호는 25글자로 다음과 같다.
효흠자희단우강이소예장성수공흠헌숭희배천흥성현황후
孝欽慈禧端佑康颐昭豫庄誠壽恭欽獻崇熙配天興聖顯皇后
자희태후의 어릴때의 이름은 옥란(玉蘭)이었고, 집안에서는 행아(杏兒)라고 많이 불렀다고 한다. 나중에 자희가 입궁한 후에 여러 휘호(徽號)와 존호(尊號)를 받게 된다.
청나라는 북경에 들어온 후에 중국역대 한족 황실의 전통에 따라 존호, 휘호, 시호를 붙였다. 자희가 존호를 얻은 것은 함풍 11년(1861년) 7월로 나이 27세때였다. 이 때 함풍황제가 죽고, 함풍황제와 자희태후의 사이에서 태어난 재순이 황위를 이었으니 바로 동치제이다. 이 때 자희는 황후이던 자안(慈安)과 함께 황태후에 올라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을 한 후 동치원년(1862년)에 휘호를 받게 되는데, 바로 자희(慈禧)이다.
이후 동치11년(1872년) 10월, 동치황제가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휘호를 하나 더 받아서 "단우(端佑)"라는 2글자를 휘호에 덧붙인다.
다음해인 동치12년(1873년) 2월에는 동치제가 친정을 하게 되면서 자희에게 다시 "강이"라는 2글자를 휘호에 덧붙이게 된다.
광서2년(1876년) 7월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고 두 황태후가 계속 수렴청정을 하게 되므로 연속하여 두 황태후에게 휘호를 올리는데 4자씩이다. 자희는 이 때 "소예장성"의 네 글자를 덧붙인다.
광서15년(1889년) 2월에는 광서제가 결혼하는데, 휘호에 다시 "수공"의 두 글자를 덧붙인다.
같은 해 3월에는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흠헌"의 두 글자를 덧붙인다.
광서20년(1894년) 8월, 자희의 60세 생일을 맞이하여 다시 "숭희" 두 글자를 덧붙인다.
광서제는 1908년 10월에 사망하고, 부의가 선통제로 뒤를 이으며, 자희태후는 태황태후에 오른다, 부의가 즉위한 날 자희태후도 사망한다.
이 때 자희태후에게 시호를 정하게 되는데, 원래의 16글자는 그대로 두고, 관례에 따라 앞에 "효흠"의 두 글자를 덧붙이고, 뒤에 "배천흥성현황후"를 덧붙여 시호로 삼는다.
자희가 죽을 때까지 청나라의 각 황후의 시호는 대부분 19글자였고, 어떤 경우는 몇글자가 적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자안황태후는 17자였다. 그러나, 자희만 25글자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자희가 중국역사에서 황후중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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