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西太后)와 야명주(夜明珠)

중은우시 2005. 7. 21. 13:06

서태후(西太后, 慈禧太后)는 죽은 뒤에 청동릉(淸東陵)의 유릉(裕陵)에 안장되었다. 많은 진기한 보물들을 부장품으로 같이 묻었는데, 거기에는 유명한 야명주도 포함되어 있다. 민국 17년(서기 1928년)에 무덤은 군벌 손전영이 지휘하는 부대에 의하여 도굴되었다.

 

선포(善浦)의 <<손전영동릉도보기(孫殿英東陵盜寶記)>>에 의하면 : "서태후의 능묘의 건축은 호화로워, 청나라의 모든 황제후궁의 능묘를 뛰어넘었고, 특히 관에 부장한 보석은 더욱 진귀하였다. 광서34년(서기 1908년) 10월 22일 자희태후가 사망한 후, 태감 이연영은 염에 참가하였는데, 일찌기 부장한 진기한 보물을 하나하나 적어서 책으로 남겼다", "도적들은 먼저 자희태후의 시체 주위의 큰 보물들 - 비취서과, 국국백채, 옥석연화, 산호수등등을 챙기고, 다시 자희태후 시신 아래에 있는 보석들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챙겼다. 그 후에 자희태후의 시체를 관두껑위에 옮겨놓고, 용포를 벗겼으며, 내의를 찢어서 훼손시키고, 신발과 양말도 벗겨, 몸에 있는 보석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냈다. 자희태후의 이빨도 뿁혀졌으며, 입에 물고 있던 희세의 명주도 가져가버렸다" 또한 이 글에서는 손전영이 한 말도 인용하고 있다. "그녀(서태후)는 입에 하나의 야명주를 물고 있었다. 나누면 두 개가 되고, 합치면 둥근 구(球)가 된다.  나눠놓으면 투명하고 아무런 빛을 내지 않지만, 합쳐놓으면 녹색의 차가운 빛을 뿜으며, 밤에는 백보(百步)이내에서는 머리카락까지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듣기로 이 보배는 시체를 썩지 않게 한다고 하는데, 역시 자희태후의 관을 열었을 때, 서태후는 잠든 것과 같았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자 얼굴이 검게 변했고...나는 야명주를 우농(雨農, 戴笠의 號, 당시 특무조직인 남의사의 수령)를 시켜 장부인(송미령)에게 보냈다."

 

자희태후의 입에 야명주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다만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형석(螢石)일 것이라고 하지만, 실물을 보지 못했으니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서기 1997년에, 필자는 타이페이에서 "해협양안토착문화교류회"에 참가하였을 때, 일찌기 이 야명주의 상황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송미령이 이미 나이가 많고, 미국에 머물고 있으므로,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에 대하여 대만 고궁박물원의 고고학 전문가인 나지량(那志良) 노선생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역시 고개만 흔들 뿐 상세한 사항을 알지 못하였다.

 

장복력(蔣卜力)의 <<자희능묘피도안(慈禧陵墓被盜案)>>이라는 책에 따르면, "제51호 야명주, 무게 4량2전7푼(오늘날로 하면 133.4375그램), 가치 1800만냥"으로 기재하고 있다. 조여진(趙汝珍)의 <<고완지남(古玩指南)>>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결론적으로 자희태후의 부장품을 모두 회수하여 외채를 갚았다면, 그래도 천만 정도는 남았을 것이므로,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 열거한 가격이나 평가금액은 당시의 보석가격이었고, 이후 선통원년에 이르러 중국과 외국의 골동품 수장가와 보석 전문가의 평가에 따르면 모든 금액은 이미 10배는 올랐다. 민국후기에 다시 평가하였을 때는 다시 100배는 올랐으며, 오늘 날로 한다면 가격을 계산할 수조차 없다"

 

자희태후가 입에 물고 있던 야명주가 유명한 것을 제외하고도, 그녀의 봉관(鳳冠)의 9개의 야명주도 상당히 유명하다. 이영발(李映發)의 <<문사습취(文史拾趣)>>의 기재에 따르면, "서기 1900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등 8개국으로 구성된 침략군이 북경을 침입하였다. 자희태후는 백성들이 침약자에게 반항하는 것을 막고, 크게 매국적인 행위를 하였다. 봉관에서 4개의 야명주를 떼어내어 외국인제게 주고, 그들로 하여금 북경에서 물러나도록 요구하였다. 당시에 서태후의 일을 주로 처리하던 큰 태감 이연영이 신변에 없는 바람에 왕씨성을 가진 궁녀를 서문빈관으로 보내어 이홍장이 보낸 사람에게 건넸다. 이홍장은 바로 외국인과 군대를 철수시키는 문제를 협의하고 있었다. 당시 이 궁녀는 17살에 불과하였고, 자희태후는 그에게 가는 길에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으며, 만일 잃어버리거나 하면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 궁녀는 보석을 품고 걸으면서 생각하기를 "이것은 우리나라의 보물인데, 어떻게 외국인에게 건네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교묘하게 호송하던 사람을 따돌렸다. 이로써 야명주는 민간에 숨겨지게 되었다. 64년후(서기 1964년) 서안시 백수림에 거주하는 한 노동자 가정에서 이 4개의 야명주가 발견되었다. 이 사람의 성은 오(吳)씨인데, 부부가 모두 화학공장의 노동자였다. 하루는 청결위생을 위하여 어린아이에게 더러워서 시커멓게 된 베개를 뜯고 씻도록 시켰는데, 안쪽에서 붉은 봉투를 발견하였고, 붉은 봉투를 뜯으니 황포(黃布)나 나왔고, 기름종이가 나왔다. 기름종이의 아래에는 면으로 만든 종이가 있고, 거기에 싸여있는 4개의 용안만큼 크고, 맑고 빛을 내는 야명주가 나왔다. 그들은 이 무가지보를 국가에 바쳤고, 고고학자의 감정을 거쳐 이것이 여러해동안 잃어버렸던 자희태후의 봉관에 있던 그 4개의 야명주임을 확인하였다. 국가는 오씨에게 10만인민폐를 주었으나 그들은 받지 않았다. "국가의 보물은 당연히 국가에 바쳐야 한다. 조국의 문물은 모든 사람이 보호하고 아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원래 이 더러운 베개는 80세된 왕노파가 죽기전에 그들에게 준 것이었다. 해방후 오씨는 이 의지할 데없는 노파를 거두어서, 친어머니와 같이 대했는데, 1963년에 죽으면서 베개를 오씨에게 넘겨주면서, 그 비밀을 미처 얘기하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왕노파가 바로 60여년전에 자희태후의 신변에 있던 그 궁녀였다. 1985년, 낙양의 한 친구가 북경으로 와서 2개의 야명주를 가지고 왔는데, 타원형이고, 구멍이 뚫려 있으며, 담황백색을 띄고 있었다. 보기에 야광주임이 명백하였고, 아마도 자희태후의 봉관에 있던 다른 2개의 야광주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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