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역사상 한족으로 공주의 칭호를 받은 사람이 있다. 청황실은 만주족이므로, 공주는 당연히 만주족이어야 하는데, 한족이면서 공주의 칭호를 받았던 경우가 유일하게 한번 있었다.
공사정(孔四貞)은 공유덕(孔有德)의 딸이다. 공유덕은 원래 명나라때 모문룡(毛文龍)의 부하장수로서 요양을 지키던 참장(參將)이었는데, 명나라 말기에 청나라에 귀순한다. 순치제가 북경에서 황제에 오른 후 정남왕(定南王)의 작위를 받는다. 당시 한족으로서 청나라에 귀순하여 왕위를 받은 사람은 오삼계(吳三桂), 상가희(尙可喜),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네 명뿐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중원을 점령한지 얼마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삼계, 상가희, 경중명, 공유덕과 같은 한족 장수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여, 그들에게 높은 작위와 봉록을 주어 후히 대접하였다. 공유덕은 순치7년 군대를 이끌고 광서에 들어가서 당시 남명왕조의 동각대학사 구식여를 죽이고, 계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광서지방을 방어하였다. 순치9년 5월, 서남지방에서 활동하던 장헌충의 농민군이 청군에 대항하고 있었다. 농민군은 이정국의 지휘하에 사천동부에서 호남으로 들어오고 다시 광서를 쳐들어왔다. 7월초에 공유덕의 군대를 격파한다. 공유덕은 계림성에 갇혀있게 되는데, 도망칠 길이 없자, 문을 걸어잠그고 불을 질러 자결한다. 농민군이 계림성에 들어온 후에 공씨집안의 사람은 다 죽여버리는데, 유일하게 딸인 공사정만은 부하인 선국안(線國安)이 구해서 도망치게 된다.
공유덕의 부대는 청왕조에서 전국에서 청나라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진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공유덕의 죽음은 아직 중원에 기반을 완전히 내리지 못한 청왕조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순치제와 효장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공유덕이 국가를 위해 순국한 것을 가상히 여겨, 그 딸인 공사정을 입궁하도록 하여 태후가 직접 기르기로 한다. 이리하여 공사정은 광서에서 북경으로 오고, 황궁에 들어간다.
순치11년에 공유덕의 유해는 북경을 거쳐 동경(심양)으로 보내어 안장한다. 동시에 순치제는 "정남왕 공유덕은 공이 크고, 나라를 위해 순절하였으니 그 딸에게 식읍을 내리고, 화석공주로 대우한다"고 하고 공사정에게는 백은 이만냥을 내렸다. 이로서 공사정은 청나라에서 유일하게 한족으로 공주에 오른 인물이 된다.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공사정이 16세가 되던 해에, 효장황태후는 그녀를 순치제에게 시집보내어 비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사정은 어릴 때 부모가 이미 부장인 손룡의 아들인 손연령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고 말한다. 효장황태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공사정과 손연령을 결혼시키고 서화문밖의 집을 주어 살게 한다.
강희 5년에 공사정은 식구도 많아지고 하여 조정에 식읍으로 받은 광서로 가서 살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강희제는 그녀의 요청을 수락하고, 손연령을 광서장군으로 봉한다. 이후 공사정과 손연령은 계속 광서에 머물게 된다.
강희 12년에 오삼계등 삼번이 "반청복명"의 기치를 내걸고 소위 삼번의 난을 일으킨다. 이 때 손연령은 공씨 집안과 다른 삼번들과의 관계때문에 반란에 참가하여 임강왕에 봉해진다. 공사정은 남편인 손연령이 청나라에 대항하는 것에 대하여는 계속하여 반대입장을 지녔다. 그녀로서는 청나라조정을 배신하는 것은 의리를 저버리는 것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계속된 설득으로 손연령을 다시 청정부에 항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손연령은 오삼계의 손자 오세종에게 암살당하고, 공사정은 오삼계에 붙잡혀 포로로 갇혀있게 된다. 삼번의 난이 종결된 후, 공사정은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다. 공사정은 사후에 북경의 서쪽, 지금의 공주분(公主墳)이라고 불리우는 곳에 묻힌다.
어떤 사람들은 사료의 기재를 근거로 공사정이 손연령에게 시집가기 전에 확실히 동궁황비(東宮皇妃)에 봉해진 적이 있다고 한다. 다만 순치제의 사후에, 공사정은 파격적으로 출궁하여 재가하는 것을 허용받아 손연령에게 시집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좀더 고증이 필요하다. 아마도 공사정을 동궁황비에 봉했다면 그것은 실질은 없는 형식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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