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제(光緖帝)와 후궁들

by 중은우시 2005. 8. 20.


가운데: 서태후, 왼쪽끝 : 근비, 오른쪽 끝 : 융유황후

 


진비

 

광서제(1871-1908)의 이름은 재첨(載湉)이고 4살에 등극하여, 34년간 재위에 있었다. 그의 일생은 4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출생부터 4살때까지의 순친왕의 왕자시절이고, 4살부터 17살까지의 소제(少帝)시기, 17살부터 28살까지의 친정(親政)시기, 28살부터 38살까지의 10년간의 수제(囚帝, 갇혀있는 황제)시기..

 

광서제는 1후 2비만을 두었는데, 청나라의 황제중에서는 후궁이 가장 적은 황제였고, 자식도 없었다. 이 1후 2비도 전부 서태후가 친히 정해주었다.

 

광서제의 황후는 융유황후(隆裕皇后)인데, 예허나라씨로서, 서태후의 친동생인 꾸이샹의 딸이다. 융유황후는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고, 허약했을 뿐아니라 등도 굽어있었다. 그러나, 이 혼인은 서태후가 친히 정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다. 광서제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방법이 없었다.

 

광서제는 서태후의 누이의 아들이고, 융유황후는 서태후의 남동생의 딸이었다. 이렇게 한 것은 서태후가 예허나라씨의 혈족이 청황실내에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광서제간의 관계는 계속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청나라의 마지막황제의 퇴위조서를 작성했고, 1913년 1월 17일에 사망한다.

 

광서제에게는 두명의 비가 있었는데, 한 명이 근비(瑾妃)이고, 다른 한 명이 진비(珍妃)이다. 이 두 사람은 친자매간이었고, 성은 타타라씨(他他拉氏)이다. 그러나 그 둘은 용모도 달랐고, 성격도 많이 달랐다.

 

근비는 용모는 평범하였으나, 성격이 유약한 편이었다. 몸은 매우 뚱뚱하였다. 후에 동생인 진비가 서태후의 노여움을 사면서 같이 연루되어 귀인으로 강등되었다. 선통제(부의)시절에 근귀비로 올랐고, 1924년에 죽었다.

 

진비는 처음에는 진빈(珍嬪)이었다가 나중에 진비로 승격한다. 진비는 가끔 영화에서는 무술정변을 도우는 정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고, 매우 예쁜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약간 뚱뚱한 편에, 그다지 예쁜 편은 못되었다. 광서 14년(1888년)에 나이 13세로 그의 언니 근비와 같이 입궁한다. 진비는 성격이 쾌활하여 광서제가 좋아하였으나, 서태후로부터는 미움을 받았다. 1900년 팔국연합군이 북경에 들어올 때,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도망치면서, 환관 최옥귀에게 명하여 진비를 우물에 빠져죽게 한다. 지금도 자금성에는 진비가 빠져죽었다는 우물인 진비정(珍妃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