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말기에 황위계승을 둘러싼 3건의 의심스러운 사건이 있었는데, 보통 정격안([木+廷]擊案), 홍환안(紅丸案), 이궁안(移宮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세개의 사건은 각각 만력제, 만력제의 아들인 태창제 광종(光宗), 만력제의 손자인 천계제 희종(熹宗)때 일어난다.
1. 정격안.
정격안의 정은 곤봉이라는 뜻이다. 만력제는 재위에 48년간 있었으며, 명나라 황제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황제였다. 만력제의 황후는 왕황후였는데, 자식이 없었다. 장자인 주상락(朱常洛, 후에 광종)은 왕씨성을 가진 궁녀의 소생이었다. 후에 궁녀는 궁비에 봉해지지만, 만력제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만력제는 정비(鄭妃)를 좋아하였는데, 정비 소생인 셋째 아들 주상순(朱常洵)을 매우 아꼈다.
당시, 신하들은 모두 주상락을 하루빨리 태자에 앉히기를 주청했으나, 만력제는 주상락보다는 주상순을 좋아하여 계속 미루었다. 명나라때는 장자를 우선하는 원칙을 엄격히 따랐으므로 신하들은 계속하여 주상락을 태자로 세우기를 주청드렸고, 결국 주상락이 20살 되던 해에 주상락을 동궁태자에 앉히게 된다.
그런데, 만력 43년(1615년)에 하나의 괴이한 사건이 일어난다. 한 명의 중년남자가 나무곤봉을 들고 태자 주상락의 자경궁을 침범하였는데, 문지기들이 막지 못하여 이 남자는 사람을 곤봉으로 때리며 들어갔다. 다행히 문지기가 적시에 통보하여 위사들이 이 남자를 체포하였다. 태자의 동궁을 흉기를 들고 침입한 사건이므로 범인은 엄히 문초를 당했는데, 처음에는 이름만 얘기하다가 나중에 혹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장오아(張五兒)이며, 직업없는 백수로 이번 자경궁에 난입한 것은 방보(龐保), 유성(劉成)의 두 환관이 시켰으며, 나중에 후하게 돈을 주겠다고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방보와 유성은 바로 정비의 궁안에 있는 환관들이었다.
만력황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정비를 찾아가서 추궁하니, 정비는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만력제는 정비를 차마 처벌하지 못하고, 사건을 흐지부지 끝내게 된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에 주상순은 더 이상 태자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 다음날 만력제는 조정에서 "장자 주상락을 태자로 세우는 것은 고금의 도리이다. 현재 어떤 사람이 태자를 모해하고자 하나, 내가 용서치 않겠다"고 하고 장오아, 방보, 유성을 모두 처형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정비의 소행이라는 설과 주상락 태자가 스스로 꾸민 일이라는 설이 있다. 후자의 설은 혼자 몽둥이 하나만 들고 태자궁에 뛰어든 것은 너무나 경솔했고, 이 사건으로 가장 득을 본 것이 태자라는 것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2. 홍환안
태자 주상락, 즉 광종(태창제)은 40세가 되어 황제에 오르는데, 황제에 오른지 1개월만에 허무하게 죽고 만다. 주상락은 원래 신체가 허약하였는데, 매일 술을 마시고 향락을 즐겼다. 정비인 곽씨가 죽고난 후 4명의 선시(選侍)를 뽑았는데, 선시는 등급이 낮은 후궁이다. 이들 외에도 많은 여인을 가까이 하여 광종의 몸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 해 9월에 갑자끼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팠다. 태의를 불렀는데, 얼마후 이가작(李可灼)이라는 관리가 붉은환약(紅丸)을 광종에게 바치면서,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의 약인데 백병이 다 낫는다고 하였다. 광종은 붉은 환약을 보자마자 바로 먹어버렸다. 그런데, 약을 먹자마자 정신이 맑아지고 얼굴에 붉은 화색이 돌았다. 이가작의 충성을 칭한 하고 이가작에게 다시 한 알을 바치라고 명하였다. 이가작이 두번째로 바친 붉은 환약을 먹은 광종은 바로 사망한다. 누구도 황제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몰랐으며, 이 '홍환안'도 천고의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홍환안의 주모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도 수수께끼이나, 정귀비가 용의선상에 오른다. 그녀는 태자에게 미녀들을 보내고, 최문승을 시켜 약을 올리게 한 일도 있으므로, 이가작이 약을 올린 것에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녀가 일차적인 혐의자임은 분명하다. 정귀비는 자신이 태자였던 광종에게 바친 이선시를 황후로 앉히고, 자신은 태후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었으나, 광종이 한달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이러한 꿈은 물거품이 된다.
3. 이궁안
광종이 죽자 그의 16살된 아들 주유교(朱由校)가 희종(천계제)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그가 등극한 후 얼마되지 않아 이궁안이 발생한다.
이궁안은 원래 광종의 4명의 선시중의 한명인 이선시(李選侍)가 일으킨 것이다. 원래 주유교는 왕재인(王才人)의 아들로 왕재인은 신분은 이선시보다 높았으나, 이선시가 광종의 총애를 받아 결국 왕재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왕재인은 임종시에 "나와 이선시는 원수간이다, 한을 풀 길이 없구나"라는 유언을 남긴다. 주유교도 어릴 때부터 이선시에게 핍박을 당하여 매일 울면서 지냈고, 심리적으로 이선시를 무서워하는 연약한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광종이 등극한 후 이선시는 건청궁으로 함께 가게 되고, 1달 후에 광종이 죽자, 이선시가 건청궁(乾淸宮)을 장악하고, 환관 위충현을 시켜 주유교를 끼고 황태후가 되어 조정을 장악하고자 한다.
광종이 죽자, 양련, 유일경등이 바로 건청궁으로 가 태창제에게 곡을 하며, 황장자 주유교를 배알하고 즉위문제를 논의하고자 하나, 이선시가 방해하여 만나지를 못한다. 신하들이 계속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이선시는 신하들과 주유교를 만나게 해준다. 신하들은 주유교를 만나자마자, 주유교에게 만세를 외친 후, 바로 보호하여 문화전으로 옮겨 대신들의 배알을 받는다. 이후 대신들은 6월 6일을 즉위일로 정하고, 주유교의 안전을 위하여 태자궁에 거주하도록 조치하고 환관 왕안등에게 신변보호를 맡긴다.
이선시는 주유교를 붙잡고 권력을 행사하려던 꿈이 무산되자, 이번에는 신하들이 올리는 글을 자신이 먼저 본 후에 주유교에게 넘기겠다고 하였으나, 이것도 조정신하들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친다. 신하들은 이선시에게 건청궁에서 나와 세란궁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이선시는 거절하고 자신을 황태후로 앉힌 후, 주유교를 황제에 즉위하도록 해달라고 요구한다. 물론 신하들은 이를 거절하며 양측의 대립은 격화된다. 즉위일 하루전인 6월 5일가지도 이선시가 건청궁을 나가지 않자. 신하들과 왕안등이 강력하게 이선시에게 요구하여 결국 이선시는 자신의 소생인 팔공주를 데리고 건청궁에서 나와 인수궁의 세란전으로 옮긴다. 주유교는 6월 6일 정식으로 즉위하여 희종 즉 천계제가 된다.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선시가 세란전으로 옮긴 후 며칠되지 않아서, 세란궁에 불이 나서, 겨우 이선시 모녀의 목숨을 구해내게 된다. 이궁에 반대하던 관리들은 "이선시는 목을 메고, 그 딸은 우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면서 "팔공주가 우물로 뛰어 들었지만 누가 슬퍼해 줄 것인가, 미망인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려, 주유교의 불효를 질책했다. 주유교는 양련등의 신하의 도움을 받아 이런 소문을 반박하고 이선시와 동생은 잘 돌볼 것이며, 이것이 황부의 뜻을 받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을 알린다. 이것으로 이궁안과 관련된 풍파는 잠시 가라앉는다.
이선시는 정귀비의 사주를 받아 건청궁에 눌러앉아 태후를 요구하는 일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이궁안이 종결된 후 정귀비는 자결한다. 그러나, 이선시는 이후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객씨(客氏)와 득세할 때, 다시 비로 오르며 복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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