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의 이름은 홍력(弘曆)으로, 옹정제의 4째아들이다. 그는 생모가 누구인지, 출생지가 어디인지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지만, 청나라 황제들 중에서 즉위나 사망에 관하여 별다른 이설이 없는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옹정제는 모두 5명의 아들을 두었다. 다만, 첫째와 둘째는 모두 요절하였고, 셋째 홍시(弘時), 넷째 홍력, 다섯째 홍주(弘晝)가 성인으로 성장하였다. 그 중 홍주는 어릴 때부터 유약하고 병이 많았으며, 형들과 황위를 다툴 의향도 없었고, 그러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셋째 홍시에 관하여 남아 있는 자료인 청조옥첩(황실족보)에서는 "옹정의 제3자 홍시는 아들을 하나 두었다. 강희 43년 갑신 2월 13일 자시에 출생하였고, 생모는 제비(齊妃) 이씨(李氏)인데, 지부 이문휘(李文輝)의 딸이다. 옹정 5년 정미 8월 초6일 신시에 죽었다. 나이 24세이다. 적처는 동악씨이고 상서 쿠얼다의 딸이다. 첩은 종씨로 종다의 딸이다. 첩 전씨가 있다." 이외 자료들을 종합하면, "옹정 3년에 궁에서 쫓겨나고 황팔자 윤사(允祀, 사는 [示+異]로도 쓴다)의 아들로 입적시켰고, 옹정 4년 2월 종실에서 축출하였으며, 윤도(允陶, 도의 왼쪽 변은 示)에게 주어 기르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홍시와 홍력은 묘한 관계에 있다. 홍시와 홍력의 관계를 보면 (1) 홍시는 홍력보다 7살이 많았다. (2) 홍시는 측푸진인 제비의 소생으로 제비의 시녀출신을 생모로 둔 홍력에 비하여는 모친의 신분이 더 고귀하였다. (3) 홍시의 모친은 한족인데 반하여 홍력의 모친은 만주족이다. (4) 강희제는 홍력을 매우 아껴, 황궁에서 기거하게 하며 직접 가르켰다. 강희제가 아껴 궁중에서 양육한 손자는 홍력 이외에도 여럿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폐세자인 윤잉의 아들인 홍석(弘晳)도 있다.
이런 여러가지 관계를 종합하여 후세 사람들은 홍시가 홍력에 비하여 나이나, 모친의 신분등에서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홍력은 재능이 뛰어나고, 만주족을 모친으로 두었으며, 강희황제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점 등에서 홍시는 홍력을 시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홍시는 부친의 정적인 황팔자 윤사의 편에 나중에 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옹정이 홍시를 윤사의 양자로 보내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홍시가 처벌받고 족보에서 지워진 이유에 대하여는 홍력을 살해하려 했다는 설도 있고, 황팔자 윤사등 옹정으로부터 살해,핍박받은 숙부들을 동정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황팔자 윤사의 당에 가입하였기 때문이라는 설등이 있다.
어쨋든, 옹정의 사망시에는 홍력과 홍주의 두 아들이 있는데, 홍주는 어려서부터 몸도 약하고,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사실상 경쟁가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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