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황제 12명중에서 출생지에 대하여 이론이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누르하치이고, 다른 한 사람은 건륭제이다. 누르하치는 출생당시에 만주글자도 없었고, 출생당시에는 그다지 뛰어난 집안도 아니었으므로 이해가 되지만, 건륭제와 같은 경우에 출생지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는 것은 좀 특이하다.
특히, 건륭제의 출생지와 관련해서는 그의 혈통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데, 모친이 누구인지, 그가 한족 혈통인지, 만주족 혈통인지등과 관련하여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의 생모와 관련하여서는 정사에 기재된대로 승은공 능주의 딸 뉴구루씨인지, 열하의 궁녀 이금계인지, 내무부 포의여자인지, 사대저인지, 촌고인지, 해녕 진부인인지등
건륭제는 옹정제의 넷째아들이고 강희50년(1711년) 8월 13일에 출생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강희 50년(1711년) 7월 26일, 강희제는 북경에서 출발하여 피서산장으로 갔고, 9월 22일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건륭의 부친 옹친왕 윤진은 7월 26일 열하로 가서 문안을 드리고, 8월 13일에 건륭이 출생했다. 이 사이에는 단지 17일의 간격만 있다. 즉, 만일 건륭이 피서산장에서 출생했다면, 그의 모친은 출산17일전에 만삭의 몸을 이끌고 옹친왕을 따라 피서산장으로 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건륭제가 옹화궁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생모로 기록된 뉴구루씨이겠지만, 만일 피서산장에서 태어났다면 뉴구루씨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건륭제의 출생지가 어디인지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1. 옹화궁설
건륭이 옹화궁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건륭 스스로 말한 것이다. 옹화궁은 옹정제가 즉위한 이후에 라마교사원을 만들면서 붙인 것이고, 즉위전까지는 옹친왕부였다. 건륭은 시를 짓거나 시에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자신이 옹화궁에서 태어났음을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첫째, 건륭 43년(1778년) 봄에 건륭제는 <<신정지옹화궁예불즉경지감>>시에서 "여기 올 때마다 처음 때어난 때를 생각한다"는 문구가 있다. 이것은 건륭이 자기 출생지가 옹화궁이라고 명확히 말한 것이다.
둘째, 건륭 44년(1779년) 봄에 건륭제는 다시 <<신정옹화궁첨례>>라는 시에서 "재각 동상의 익숙한 길에 오니 부모님이 나를 처음 나으신 때가 생각난다"는 내용의 싯귀가 있다. 건륭은 여기에서 자신이 태어난 곳이 옹화궁일 뿐아니라 구체적인 출생지점까지 동상방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셋째, 건륭 47년(1782년) 1월 7일, 건륭인 <<인일옹화궁첨례>>라는 시에서 주석으로 "나는 강희 신묘해에 이 궁에서 태어났다"고 적었다. 인일(人日)은 1월 7일을 말한다.
넷째, 건륭54년(1789년) 1월 7일, 건륭은 다시 <<신옹화궁첨례>>시에서 주석으로 "나는 강희 신묘년에 이 궁에서 태어나고 12살이 되어 황조의 은혜로 궁중에서 양육되었다"고 적었다.
이런 여러 시들과 그 주석에서 건륭은 스스로 옹화궁에서 태어났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고, 생일날인 1월 7일에는 옹화궁에 매년 들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건륭이 이런 시를 남긴 것은 말련네 그의 출생지와 생모에 대하여 소문이 떠도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2. 피서산장설
첫째, 관세명(管世銘)이다. 건륭이 피서산장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처음 나온 것은 그의 시이다. 그의 시에서 "사자원의 옆에서 성은에 감격한다"는 문구가 있는데 그 주석에 "사자원은 황상이 태어난 곳이고, 항상 옹정제의 기일에는 여기 와서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관세명은 건륭에 비하여 20여세가 어리고, 군기처에서 일을 하며, 건륭을 따라 피서산장에도 가고, 목란사냥터에도 갔으므로, 건륭제에 관하여는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둘째, 가경제(嘉慶帝)이다. 가경제는 건륭의 아들로 건륭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는데, 가경제는 건륭61년(1796년), 건륭제가 피서산장에서 태상황의 신분으로 생일축하연을 하게 되는데, 거기의 축시를 짓고 주석으로 "강희 신묘년에 산장을 지었다. 황부(건륭)는 이 해에 도복지정(都福之庭)에서 탄생하셨다...그 인연이 불가사의하다"라고 적었다. 다음해인 가경원년(1797년)에 다시 피서산장에서 생일축하연을 하고는 시를 짓고 "황부가 신묘년에 산장 도복지정에서 태어나셨다"고 적었다. 이 두개의 시에 덧붙인 주석으로는 가경제는 이때까지 건륭제가 피서산장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건륭제 사망후 실록을 정리하면서 건륭에 스스로 지은 시에서 본인이 스스로 옹화궁에서 태어났다고 한 내용이 있음을 당시 실록을 편찬하던 유풍호(劉風浩)가 가경제에게 고하자, 가경제는 건륭제의 말에 따라 실록을 정리하도록 지시한다.
셋째, 도광제(道光帝)이다. 가경제가 죽은 후 유조를 반포하는데, 유조에는 "나의 황부께서 태어나신 피서산장에서 내가 죽으니 여한이 없도다"라고 적었다. 이 유조를 당시 유구, 월남, 버마, 조선등 당시 조공국에도 보냈는데, 유조를 가지고 떠난 후 이 글이 있음을 알고, 도광제는 다시 불러서 유조를 수정해서 보낸다. 수정한 유조는 "나의 황부의 화상이 있는 피서산장에서 내가 죽으니 여한이 없도다"로 수정했다. 도광제는 유조를 회수하면서 "나는 황조(건륭)이 피서산장에서 태어나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황조실록을 자세히 읽어본 후에 비로소 황조께서 옹화궁에서 태어나신 것을 알았다"고 적었다. 결국 도광제도 실록을 보기 전까지는 건륭제가 피서산장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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