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건륭제(乾隆帝)와 후궁들

중은우시 2005. 8. 19. 23:01


향비

 


향비묘(신쟝 카스)

 

건륭제의 후비들 중에서 직위를 받은 사람은 모두 29명이다. 황후(皇后)가 3명, 황귀비(皇貴妃)가 5명, 귀비(貴妃)가 5명, 비(妃)가 7명, 빈(嬪)이 6명, 귀인(貴人)이 3명이었다.

 

건륭제의 황후 3명에 대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푸차씨(富察氏)가 첫번째 황후이다. 옹정5면(1727년) 푸차씨는 보친왕 홍력(후일의 건륭제)의 적푸진(嫡福晋, 정실부인)에 책봉된다. 이 해에 건륭은 17세, 푸차씨는 15세였다. 건륭2년 (1737년), 적푸진 푸차씨는 황후에 책봉된다. 황후 푸차씨는 명문가의 출신이었는데, 증조부 하스툰(哈什屯)은 의정대신을, 조부인 스미한은 강희 때 내무부총관, 호부상서, 의정대신을, 부친인 리롱바오는 차하얼총관, 오빠인 마치는 병부상서, 좌도어사, 의정대신, 무영전대학사를, 오빠 마우는 내무부총관, 상백기몽고도통, 영시위내대신을 동생인 푸항은 호부상서, 군기대신, 보화전대학사를 지냈다. 황후 푸차씨는 명문출신이면서 성격이 현숙하고 검소하며, 사치하지 않았고, 태후에 효성이 지극하였다. 건륭13년(1748년) 1월 황후 푸차씨는 건륭제와 황태후를 따라 동순하여 산동 곡부로 가서 공자에게 제를 지낸다. 3월 11일, 북경으로 돌아오던 중에 덕주의 배위에서 사망한다. 이 때 나이가 37세였다.

 

푸차씨의 죽음에 관하여 야사에서는, 3월 11일 밤에 건륭이 동순에서 돌아오면서, 덕주에 머물면서 배 안에서 연회를 베풀고 술과 여자를 즐겼다. 황후는 간곡하게 진언하였으나, 건륭은 듣지 않았다. 이에 황후는 부끄럽고 분하여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것이다. 채동번의 <<청사연의>>에서는 황후의 동생인 푸항의 부인이 황후의 천추절에 축수하러 왔다. 주연이 끝난 후 건륭이 푸항의 부인과 사통하였는데, 황후에게 발각되었다. 황후는 이때부터 황제와 사이가 벌어졌고, 마침 황후 소생의 아들 영련(永璉)은 황태자로 책봉되었음에도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황후는 동순에 따라갔다가 배 위에서 죽었다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푸캉안(福康安)의 신세내력과 관련한 무수한 얘기도 나오게 된다. 즉, 푸캉안이 건륭과 푸항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건륭제와 푸차씨간의 감정은 매우 좋았다는 것이다. <<청사고, 후비전>>에 따르면 "13년, 황상이 동순하는중 머물렀다. 3월 을미일 황후는 덕주의 배에서 사망했다. 나이 37세였다"고 적고 있다. 건륭은 이에 비통해하며, 연속 9일간 매일 황후의 영전에 3번 공품을 올렸다. 그리고, 건륭은 푸차씨가 생전에 원한대로 "효현(孝賢)"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푸차씨의 영구는 유릉의 지하궁전에 4년여를 두었다. 이 기간동안 건륭제는 그녀를 위하여 모두 100여차례의 제사를 지내주었고, 진심어린 <<술비부>>도 썼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야사에서 말하는 푸항부인과의 일등은 꾸며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라나라씨(烏拉那拉氏)가 둘째 황후이다. 좌령인 나얼부의 딸이다. 좌령은 만주팔기에서 도통, 참령 다음의 최하급 간부에 해당한다. 건륭이 황자이던 시절 우라나라씨는 측푸진에 책봉된다. 이후 건륭제의 등극후 그녀는 한비([女+閑]妃)에 봉해진다. 황후 푸차씨가 죽은 후 그녀는 귀비에서 황귀비로 승급되고, 6국의 일을 통할하여 처리하게 되고, 다시 황후로 책봉된다. 건륭 30년(1765년) 초에 황후는 황태후와 건륭과 함께 네번째 강남유람을 간다. 그런데, 그 도중 황후는 막 48세 생일을 지내게 되는데 그 때 사건이 터진다.

 

채동번이 <<청사연의>>에서 건륭이 허신등과 함께 금릉의 진회하에서 배를 타고 놀면서 기생들과 어울려 흥겹게 지냈다. 황후가 이를 보고는 간하게 되어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인다. 황후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자른다. 황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녀를 바로 북경으로 돌려보내고, 냉궁(冷宮)에 넣는다. 만일, 대신들이 극력 진언하지 않았다면 순치제가 황후를 폐한 것과 같은 일이 또 벌어졌을 것이다. 다음해인 건륭31년(1766년) 7월 14일, 황후 우라나라씨는 냉궁에서 사망한다. 나이 49세였따.

 

이 사건은 청나라 궁전 기록에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윤2월18일, 황후가 행궁에서 아침을 들 때까지는 참석했으나, 저녁 식사시부터는 황후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황후가 미쳤다고 하엿고, 어떤 사람은 항주에서 삭발하고 여승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먼저 북경으로 돌려보냈다고 하였다. 청궁의 상유당의 기록에 의하면 윤2월 18일, 건륭은 사위 푸룽안으로 하여금 황후를 호송하여 수로로 북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황후는 왜 북경으로 쫓겨났는가?

 

<<청사고, 후비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건륭30년(1765년), 황상이 남순시 항주에 도착했다. 황상의 뜻을 거슬렸고, 황후는 머리카락을 잘랐다. 황상이 역정을 냈으며 영을 내려 먼저 북경으로 돌려보냈다. 31년 7월 갑오에 사망하였다"고 적고 있다. 만주의 습속에는 친한 사람이 죽었을 때 비로소 머리카락을 자르므로, 황후가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것은 매우 불경한 행동이었다. 황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건륭제가 무란수렵장에 있었는데, 사냥을 멈추지 않고, 우라나라씨의 소생인 황자에게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도록 지시하였을 뿐이다. 또한, 황귀비의 예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황후의 예로 치르지 못하게 하였다.

 

셋째, 웨이쟈씨(魏佳氏)는 세번째 황후이다. 그녀는 생전에 황후가 된 것은 아니고, 아들인 우염이 가경제에 오르면서 추증되었다. 처음에는 귀인이었으나 후에 빈, 비, 귀비로 승급하였고, 황15자 우염을 낳았다. 건륭40년(1775년)에 나이 49세로 사망하였다. 웨이쟈씨는 아들이 황제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건륭의 황비중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는 순비, 완비, 용비가 있다.  

 

순비(恂妃)의 성은 왕씨(汪氏)로서 원래 건륭이 매우 좋아하였다, 그런데 후에 황제의 총애를 잃으면서 성격이 사나워졌다. 하루는 화를 참지 못하고 궁비를 때려서 숨지게 하였다. 건륭이 장문의 견책문을 보내면서 빈(嬪)으로 강급시켰다.

 

완비(婉妃) 진씨는 건륭이 등극하기 전부터 모셨다. 후에는 비로 올라갔다. 완비는 오래 살아서 92세까지 살았다. 청나라 황궁의 후비중에는 가장 오래 산 경우이다.

 

건륭제때 또 하나의 전설적인 인물은 향비(香妃)이다. 향비가 과연 존재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역사상 논란이 있었고, 향비에 관련된 전설은 적지 않다. 김용의 소설 <<청향비>>가 있고, 신장 카스에는 <<향비묘>>가 있다.

 

향비에 관련된 전설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해피앤딩설인데, 향비는 원래 예쁘고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났다고 한다. 대대로 남강(南疆, 신강 남쪽지구)의 예얼쟝에서 살았으며 어른들이 현지의 훠지의 학정에 불만을 품고 이리(伊犁)로 옮겨갔다. 그녀의 오빠는 훠지에 대항하는 전란중에 청나라에 귀순하여 공을 세웠다. 그들은 이후 북경에 와서 북경에서 거주하였다. 향비는 입궁하여 황태후와 황제의 총애를 받아서 행복한 삶을 보냈다. 향비가 죽은 후, 건륭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으며 그녀의 시신을 신강 카스로 보내어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다른 하나는 비극설인데, 향비는 건륭연간에 회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붙잡혀왔고, 건륭이 그녀의 미모에 반하여 향비로 책봉하였는데도, 향비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몸에 칼을 지니고 건륭제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 알려져 결국 그녀는 죽음을 당하게 되고, 시신은 청동릉에 묻힌다. 이러한 비극설은 채동번의 <<청사연의>>, <<청조야사대관>> 및 김용의 <<서검은구록>>등에서 채택하고 있다. 희극 <<향비한>>, <<향비>> 및 1950년대의 <<이보얼한>>등도 기본적으로 대동소이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설은 전혀 근거가 없다.

 

향비에 대하여는 학자들이 건륭의 후비중 용비(容妃)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용비는 허쭤씨로 회족 타이지 허자라이의 딸이다. 건륭은 그녀를 위하여 별도로 보월루를 만드는데, 현재의 중남해 신화문루이고, 또한 그녀를 위하여 별도로 회족 주방장을 배치해주었다.

 

1979년에는 청동릉의 건륭 후비들의 능원이 비에 무너졌는데, 거기에서 발견된 한 후궁이 위구르족, 즉 회족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용비는 청동릉에 묻혔고, 역사에 기록된 용비에 관한 내용이 사실임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