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건륭제)

중국과 영국의 대면(건륭제와 영국사신 맥카트니)

중은우시 2005. 8. 4. 00:00


영국전함 사자호

 


매카트니가 북경에 머문 곳


서기 1792년 9월 26일, 영국의 황실전함 "사자호"와 "인두스탄호"등 몇 척의 배가 영국을 출발했다. 이것들은 영국왕 조지3세가 파견하는 방대한 중국방문사절단의 선박들이었다. 사절단의 단장은 조지 맥카트니(George McCartney)였으며, 부단장은 조지 스탠튼(George Stanton)이었다. 중국방문인원은 모두 800여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멀리 바다를 건너 멀고먼 나라 중국으로 가서 당시 건륭황제의 83세 생일축하연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18세기말의 영국은 자본주의의 상승단계에 있었고, 상품경제가 고도로 발전하여, 급박하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필요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매카트니의 이번 사행의 목적은 동방의 청왕조의 대문을 두드려 여는 것이었다.

 

9개월후, 영국사절단은 마침내 건륭58면 5월 14일 중국에 도달하였다. 마카오의 외만산군도에 있는 주커주 섬에 닻을 내려서 기다렸다.

 

영국사절단이 중국에 도달하였다는 소식은, 영국동인도회사의 체어맨인 프란시스, 바이런의 편지를 통하여 양광총동(광동, 광서를 관할하는 총독)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양광총독에게 건륭황제에게 전달해주도록 부탁하였다. 건륭황제는 양광총독의 글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바로 어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장로염정 징루이와 직예총독 량컨탕을 흠차대신으로 하여 영국사절단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건륭황제로부터 환영의 뜻을 전해받고, 영국사절단을 태운 배는 마카오를 떠나 천진으로 향했다. 천진에서 그들은 내륙선으로 갈아탄 후 통주에 도달하였고, 마침내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 서북쪽의 원명원에서 며칠간 휴식을 취한 후 매카트니는 수행원 92명을 이끌고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갔다. 왜냐하면 건륭황제의 83세 생신축하연이 거기에서 거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경에서 피서산장으로 가면서 만리장성을 지나갔는데, 그 거대한 공사와 장관인 경치는 영국사절단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건륭 58년 8월 4일(1793년 9월 8일), 매카트니, 스탠튼은 수행원들과 열하에 도착했다. 일찌기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건륭황제는 행궁 어화원의 높은 대에 서서, 사절단이 줄을 맞춰 피서산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구경했다.

 

청정부는 영국사절단의 내방을 매우 중시했다. 황제는 일찌기 군기처에 명을 내려 접대방안을 마련하도록 하였는데, 접견, 선물, 연회, 극관람, 유람등의 활동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 방안을 기록한 것이 청궁당안중의 <<상유당>>책에 들어 있다.

 

마침 쌍방이 흥미진진하게 정식 회견을 기다리고 있는 때, 하나의 유쾌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접견의 예의문제로 쌍방간에 큰 의견차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규정에 따르면, 외국사신은 중국황제를 배알할 때 반드시 삼궤구고(세번 무릎꿇고 9번 머리를 땅에 닿게 하는 절)를 행하여야 한다. 그런데 매카트니는 중국황제에게 삼궤구고의 예를 행하는 것은 대영제국의 존엄에 손상이 간다고 생각하여, 그는 회견시 황제게게 한쪽 무릎을 꿇는 영국식 예절대로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건륭황제는 영국사절단의 태도에 분개하였다. <<상유당>>에는 이러한 기재가 남아 있다. 건륭황제는 당시에 말하기를 저들이 이토록 광망자대하니 아주 불쾌하도다. 이처럼 무지한 변방의 사람들은 우대해줄 가치가 없다.

 

영국사절단은 쫓겨날 위험에 처하게 되었따. 매카트니는 부득이하게 자존심을 내세우는 태도를 거둘 수밖에 없었고, 청나라 정부도 약간의 양보를 하였다. 쌍방은 이렇게 합의했다. 8월 6일 만수원에서 행해지는 환영연회에서는 영국사절이 영국식 예절로 행한다. 그러나 8월 13일의 담박경성전에서 정식으로 행하는 건륭황제의 만수전례때에는 그들이 중국의 삼궤구고의 예를 행한다는 것이다.

 

건륭황제는 쌍방이 타협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는 태도가 약간 완화되었다. 그는 이 자들이 바다 멀리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법도에 익숙지 못한 탓이다. 부득이하게 약간 압박을 가하니, 이제 성의를 다하고 잘 따르는 구나. 마땅히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건륭은 또한 군기대신 허션에게 명하여 사신일행에게 피서산장을 참관하고 유람하도록 하여, 청나라 황가정원의 경치를 느끼도록 해주었다.

 

건륭 58년 8월 13일, 융중한 "만수"경전활동이 승덕의 피서산장의 담백경성전에서 거행되었다. 담백경성전에는 등을 걸고 채색의 비단을 걸고, 문무백관과 국외사절이 삼궤구고의 예를 거행하여 황제의 만수무강을 감축하였다.

 

영국의 선물은 모두 19종, 590건이었는데, 모두 영국의 최상품들이었고, 영국의 선진과학기술의 대표작들이었다. 청왕조는 "박래후왕"(오는 것은 적게, 보내는 것은 후하게)"의 원칙하에 각각 영국왕과 사신, 수행원들에게 비단, 자기, 옥기 기타 공예품 3000여건을 선물로 내린다. 영국의 선물은 후에 각각 자금성, 원명원, 피서산장 등지에 진열되어 황실친척들과 문무백관이 감상하도록 하였다.

 

경전의식후, 영국사절단 일행은 청음각에서 희극을 구경하였다. 다음 날에는 그들은 만수원에서 거행된 가무공연을 관람하였고, 저녁에는 불꽃만회를 보았다.

 

매카트니 일행이 건륭황제를 배알할 때 삼궤구고의 예를 행하였는지의 문제에 대하여는 중국과 외국의 사학계에서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청사고, 고종순황제본기>>에 기재하기는 영국사절 매카트니등이 비록 고두에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황제의 면전에서는 무릎을 꿇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는 적지 않다. 원더는 매카트니의 친척이고 사절단의 비서였는데, 그가 영국사절단이 건륭황제를 배알한 그 날의 일기중에 이러한 기술이 있다. "황제폐하가 지나갈 때,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장막에서 나가도록 통지하였고, 우리는 중국관원과 타타르왕공의 건너편에 줄을 서 있었다. 우리는 현지의 방식으로 예를 표하였다. 즉 바닥에 꿇고, 머리를 9번 조아리는 것이다"

 

영국사절 매카트니 일행이 건륭의 만수경전활동에 모두 참가한 후, 바로 북경으로 돌아갔다. 청나라 정부는 일찌기 모든 외국사절이 북경에 머무르는 기간은 40일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이때문에 구정을 북경에서 보내려던 매카트니의 계획은 거부되었다. 이와 동시에 매카트니는 건륭황제에게 건륭의 만수무강을 비는 영국국왕의 문서를 전달하였으며, 북경의 서방전도사가 번역하여 건륭황제에게 보냈다. 이것은 아직도 중국 제1역사당안관에 보관되어 있다.

 

건륭은 문서의 내용을 읽고는 크게 화를 냈다. 원래 영국은 사람을 파견해서 북경에 상주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건륭은 엄히 지적하며, "이것은 우리나라의 체제와 맞지 않는다. 절대 안된다" 곧, 건륭은 황제가 천하의 신하들에게 발하는 유지의 형식을 빌어 영국국왕에게 회신을 작성하고, 매카트니에게 주어 가져가도록 한다.

 

이 때 건륭황제는 이미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영국사신이 중국에 온 목적은 단순히 진공하고 축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을 재촉하여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건륭황제의 엄정한 입장과 강경한 태도를 확인하고, 매카트니는 사태의 엄중함을 깨달았다. 원래 영국을 떠날 때, 영국국왕은 그에게 하나의 매우 중요한 서신을 주어 건륭황제에게 전달하도록 한 바 있다.

 

글의 내용에 대하여는 매카트니가 열하에 도착하였을 때 여러차례에 걸처 대학사 허션을 통하여 건륭황제에게 전달하고자 하엿따. 그러나 매번 말을 꺼내자 마자 허션은 교묘하게 이를 회피하였따. 그래서 매카트니는 서신의 내용을 직접 건륭황제에게 하나의 서신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방안을 찾아 이 서신을 건륭황제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고자 하였다. 이 서신의 표제에 쓴 걸은 "그레이트브리튼국왕이 중국황제폐하에게 특사가 제출하는 요구사항을 적극고려해주기 바랍니다"였다. 매카트니가 편지에서 요청한 사항은, 영국상선이 주산, 닝보, 천징등에서 장사에 종사하도록 해주고, 영국상인이 북경에 양행을 열어 화물을 매매할 수 있도록 해주고, 주산, 광주부근의 하나의 작은 섬을 떼어 영국상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고, 영국상인의 화물에 면세 또는 감세를 해달라는 것을 청구하였으며, 영국인이 중국에서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등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영국은 쌍방무역을 요구하는 동시에, 식민지를 확장하고자 하는 야심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이 제출한 주산 또는 광주부근에 하나의 작은 섬을 떼어네어 영국상인들에게 사용하게 해달라는 것은 명백히 일종의 중국영토를 침범하는 침략적인 요구였다. 이에 대하여 건륭황제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모든 중국영토는 모두 중국의 판도에 속한다. 국경은 명확하다. 섬이건 모래사장이건 모두 속하는 곳이 있다. 어찌 이렇게 마음대로 떼어낼 수 있단 말인다. 영국의 다른 각각의 조항에 대하여도 건륭은 영국왕에 대한 칙서에서 하나하나 반박하였다.

 

건륭은 영국의 요구를 거절하는 칙서를 교부한 것은 매카트니 사절단의 중국방문이 실패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영국사절단의 마지막 희망까지 철저히 사라졌다. 청정부는 영국사절단을 신속히 귀국하도록 조치하고 연도의 관원들에게 명을 내려 영국인들이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단속하게 하였다.

 

건륭 58년 9월 3일, 건륭은 시량 송균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영국사절단 일행이 북경을 떠나는 것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사절단은 운하를 따라 남하한 후 광주에 도착하였다. 건륭 58년 12월 7일 광주를 떠나 영국으로 향하였다.

 

매카트니의 중국방문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번 접촉과 충격은 동서 양대국간에 서로 초보적인 이해를 하게 하였다. 이후의 중국영국관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23년후 즉 가경 21년 영국국왕은 제2차 중국사절단을 파견한다. 아미스더를 정사로, 부사 스탠톤의 아들인 토마스 스탠튼을 부사로 하여 목적은 다시 영국의 요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영국사절단이 가경황제게에 삼궤구고의 예를 행하는 것을 거절하여 쫓겨나게 된다.

 

다시 24년이 지난 후 서기 1840년에 아편전쟁이 폭발하며, 영국제국주의자는 대포로 중국의 문을 연다. 도광 22년 7월 24일 영국사절단이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후 반세기가 지난 후에 청정부는 영국과 치욕적인 <<남경조약>>을 체결한다. 건륭시기에 영국사절단이 얻고자 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던 것을 영국군대는 튼튼한 배와 대포를 가지고 모두 얻었다.

 


                                                    매카트니와 스탠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