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奴爾哈赤, 1559-1626)는 황제로 칭하지 않았으므로 그 부인들을 당시에는 황후로 부르지는 않았다. 만주어로 부인은 푸진(福晉)이라고 불렀고, 정실부인을 대푸진(大福晉)으로 불렀으며, 이후 역사서에서는 대비(大妃)로 불리운다. 누르하치의 대비는 전후 4명이 있다.
첫째 정실부인은 통쟈씨([人+冬]佳氏)이다. 이름은 하하나자칭(哈哈納札靑)이다.
1577년, 누르하치가 첫번째 결혼을 할 당시에 나이는 18살에 불과하였다. 누르하치는 10살에 모친을 여읜 후 계모 하다나라씨(哈達那拉氏)로부터 학대를 받았으며, 심지어는 인질이 되어 명나라 장군 이성량(李成梁)에게 보내져서 천한 일을 하기도 하였다. 바로 그가 결혼한 이 해에 부친은 계모의 사주를 받아, 그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분가시켰다. 그런데, 나눠준 가축이 너무 적어 도저히 이 젊은 부부가 생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통쟈씨의 부친은 재산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누르하치는 아예 이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이 때부터 누르하치는 아이신줴뤄(愛新覺羅)성인 동시에 통쟈성도 가지게 되었다. 군대를 일으킨 초기에 명나라에 보낸 글에서 스스로 '통누르하치'로 칭하고 있다.
그런데, 통씨는 원래 여진인은 아니었고, 오랫동안 요동에 살면서 여진화된 한인이었으며, 청나라가 건국된 후에 만주족에 편입되었다. 여기에 개국황제가 데릴사위를 했다는 것이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이 때의 기록은 관에서 쓴 역사서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하하나자칭은 누르하치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게 된다. 장녀는 1578년에 태어나는데, 후에 5대신중의 하나인 동악씨 허허리(何和禮)에게 시집을 보낸다. 바로 동과공주(東果公主)이다. 장남은 1580년에 태어난 추잉([衣+者]英)이고, 차남은 1583년에 태어난 따이샨(代善)이다. 이 두 아들은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둘째 정실부인은 푸차씨(富察氏)이다. 이름은 군다이(袞代)이다. 바로 9부연합군이 쳐들어오는데도 깊은 잠에 들어있는 누르하치를 보고 흔들어 깨웠다는 바로 그 부인이다. 그녀는 통쟈씨가 죽은 후에 대푸진이 되었으며, 역사서에서는 계비(繼妃) 또는 계취군다이황후(繼娶袞代皇后)로 칭해진다.
군다이는 누르하치에게 시집간 것이 누르하치와 마찬가지로 재가였다. 그녀는 전 남편소생인 아들을 하나 데리고 시집오게 되는데, 그 아들은 양아라(昻阿拉)이다. 그녀가 특별히 아름다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당시 만주족의 형사취수(兄死娶嫂)의 방식대로 사망한 형제의 처를 물려받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군다이가 누르하치의 처가 된 시기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늦어도 1586년이전이다. 왜냐하면 그넌 1587년에 누르하치의 다섯째 아들인 망구타이(莽古爾泰)를 낳았기 때문이다. 1598년에는 셋째딸인 망구지(莽古濟)를 낳고, 1596년에는 열째 아들인 더거레이(德格類)를 낳는다.
후에 군다이는 죄를 받아 대푸진의 지위를 잃게 된다. 가장 비참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친아들인 망구타이의 손에 죽게 된다는 것이다. 군다이가 누르하치에게 죄를 지어, 누르하치의 노화가 극에 달했을 때, 화가나서 주변사람에게 군다이를 죽이라고 명령하는데, 집행하는 자가 망설이고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중에라도 누르하치의 화가 누그러지면 사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때 가장 군다이를 보호해야할 친아들인 성격이 거치르고 야만스러운 망구타이가 손을 써 자기의 친어미를 죽여버리게 된다.
어미를 죽이는 것은 짐승들도 하지 않는 일인데, 망구타이는 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추산컨대 망구타이가 14,5살 쯤 되었을 때가 된다. 어려서 철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인지? 모자간에 무슨 원한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가 무슨 음모를 꾸몄는데 들통날까 두려워 모친을 죽여 입을 막은 것인지? 이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이고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30여년후에 일어난 구타이의 역모사건을 보면, 망구타이라는 사람의 품성이 형편없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누르하치로서는 어쨌든 자기가 명을 내려서 일어난 일이니 망구타이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망구타이가 누르하치의 눈에서 벗어난 것은 확실하다. 군다이에 대하여도 누르하치는 미안한 감을 가졌던 것같다. 그녀는 여전히 가족의 묘원에 묻혀있다. 누르하치는 허투아라에서 심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황친릉도 옮기게 되는데, 황후 통쟈씨뿐아니라 군다이의 묘도 함께 심양으로 이장하는데, 이것을 보면 누르하치가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부인은 예허나라씨(葉赫那拉氏)이다. 통상 멍구제제(孟古姉姉)라고 불리우는 여인으로 1597년에 정식 세번째 대푸진이 된다. 그녀는 단 한 명의 아들을 두는데, 그가 바로 여덟째 아들 황타이지(皇太極)로 후에 누르하치를 이어 청태종이 되는 인물이다.
그녀와 누르하치간에는 연분이 깊은 편이다. 여러해전에 당시 17세이던 누르하치는 명나라 병사로부터 쫓기고 있었는데, 계속 도망쳐 해서여진의 예허부락에 이른다. 당시 예허부락의 수령인 양지누(楊吉弩)는 한눈에 이 젊은이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이마가 풍만하고, 턱이 둥글며 각지고, 눈이 봉과 같고, 귀도 크니 타고난 복있는 관상이며 앞날이 크게 기대된다고 하고 가장 아끼던 딸을 시집보내려고 한다. 누르하치가 당시 양지누의 큰 딸을 취하겠다고 하였는데, 양지누는 정중하게 말하기를 작은 딸이 용모가 뛰어나고, 기품이 남다르니, 누르하치의 배필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다른 딸들은 그런 복을 타고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작은 딸은 아직 너무 어려서 결혼할 나이가 아니었으므로, 나중에 결혼할 나이가 되면 누르하치에게 보내서 혼인시키기로 하였다.
혼약한 때로부터 결혼한 것은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또한 그동안 누르하치도 하나의 보통 여진족 장수에서 건주여진의 수령으로 성장하였다. 양지누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멍구제제가 누르하치에게 시집온 것은 겨우 14살때였다. 그녀는 미모를 갖추었을 뿐아니라 단정하고 무게가 있으며, 온화하고 검소하였다. 아부하는 말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나쁜 말을 들어도 표시를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 비하여 문화적인 소양도 있었으며 누르하치의 부인들 중에서는 독보적이었으므로 누르하치가 매우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푸차씨를 대푸진으로 올린지 얼마되지 않았고, 푸차씨가 이미 아들을 낳았으므로 나이도 어린 멍구제제를 푸차씨를 대신하여 대푸진으로 올리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었다.
1592년 10월 25일 예허나라씨가 17세인 때, 여덟째 아들인 황타이지가 태어나며, 멍구제제를 대푸진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런데, 이 때를 전후해서 건주여진(누르하치 소속 부족)과 해서여진(멍구제제의 예허족이 속한 곳)과의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특히 해서여진중에서도 예허족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토지와 사람을 둘러싸고 매년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결국 다음 해에 예처족이 9부연합군을 결성하여 건주여진을 치는 큰 전쟁이 벌어진다. 그런데, 예허족의 수령이자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바로 다름아닌 누르하치에게 여동생을 시집보내기 위해서 친히 건주까지 왔던 나린부루(納林布祿)였다. 예허와 건주는 적국이 되었으니, 예허나라 멍구제제가 대푸진의 보좌에 오르기는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발생해도 누르하치의 멍구제제에 대한 사랑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또한 멍구제제가 나은 황타이지도 역시 사랑하여 생활의 면에서도 매우 우대를 해주었다. 대푸진 군다이의 아들인 망구타이가 냉대를 받은 것과는 현저히 비교되었다. 어릴 때 황타이지는 자기가 받은 것을 입거나 먹으면서 그보다 5살 많은 망구타이에게 자랑하기도 하고, 일부를 나눠주기도 하였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황타이지가 망구타이에 대하여 어릴 때 나한테 의지하여 주인처럼 여겼다라고 자부심을 나타냈다.
1597년이 되어, 누르하치가 강한 부족과는 연합하고, 약한 곳은 치는 전략을 쓰면서 예허족과는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 때가 되어서 예허나라씨 멍구제제는 비로소 대푸진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4년후에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중의 우라나라(烏拉那拉)씨가 결맹을 맺으면서 양부족간의 정략결혼이 여러 건 맺어진 후에 누르하치가 넷째부인을 총애하자 넷째부인이 온지 2년후인 1603년에 멍구제제는 오랜 병을 앓은 끝에 사망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 28세이다. 당시 멍구제제가 죽기 직전에 어머니를 보고싶다고 하자, 누르하치는 예허부족과의 구원에도 불구하고 사자를 보내서 장모를 청하게 되는데, 나린부루는 이를 거절하고 만다. 결국 멍구제제는 한을 품고 죽게 된다.
멍구제제가 젊은 나이에 죽자, 누르하치는 매우 비통해 한다. 밤낮으로 곡을 하고, 장례를 매우 후하게 치르게 하여, 자신의 애정을 표시한다. 소와 말 각 100마리를 잡고, 1개월간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았고, 관을 3년간이나 집안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망령앞에서 예허에게 보복할 것을 맹서하고, 멍구제제의 생전 시비 4명을 순장시킨다. 이것은 청나라에서 황제나 황후가 죽은 후에 행하여진 첫번째 순장의 예이다.
넷째 부인은 우라나라씨로 이름은 아바하이(阿巴垓)다.
1601년에 건주여진은 우라나라부와 결맹을 맺는데, 이때 우라부의 수령인 부잠타이(布占泰)는 질녀인 우라나라씨 아바하이를 누르하치에 보내어 결혼시킨다. 누르하치가 43세, 아바하이가 12세, 멍구제제가 27세, 황타이지가 9살때의 일이다.
누르하치는 어리고 아름다우며, 나이로 따지면 손녀쯤에 해당하는 아바하이를 매우 아끼고 사랑한다. 멍구제제가 죽은 후에 누르하치에게는 9명의 부인과 18명의 자녀가 있었다. 9명의 부인 중에는 현명함으로 따지면 쟈무후줴뤄(嘉穆瑚覺羅)씨 전거(眞哥)가 있고, 자격으로 따지자면 멍구제제와 같은 시기에 왔던 아민제제(阿敏姉姉)가 있었으며, 연령으로 따지면 누르하치와 별 차이가 없던 자오쟈씨(兆佳氏)가 있었으며, 고귀함으로 따지면 멍구제제의 동생인 예허나라씨도 있었다. 그러나 멍구제제의 사망과 더불어, 누르하치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14살에 불과한 아바하이를 대푸진으로 삼는다.
어리고 예쁘며, 교태를 부릴 줄 아는 것이외에는 어떤 측면에서도 다른 부인들에 미치지 못하는 어린 아가씨가 모든 사람들의 윗사람이 된 것이다. 각 부인들이 따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런 저런 소동도 있고, 뒤에서 말들이 많았다. 아들 딸들도 그들의 모친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보다 오히려 나리가 몇살이나 어린 여자 아이에게 매일 무릎을 꿇고 문안을 하는 것에 대하여 난처해하고 분노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누르하치가 두눈을 부릅뜨고 있는 한 그런 일은 용납될 수 없었다.
마음 속에 가장 분노를 강하게 가지고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당연히 막 모친을 잃은 황타이지였다. 그 때 그는 11세였다.
아바하이도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일단 대푸진의 지위를 얻자 마자, 예전의 천진함을 거두고 이 집안의 여주인으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명에는 자손복이 있는지 대푸진이 된 3년째 되는 해, 즉 그녀가 16살이 되는 해에 열두째 아들인 아지거(阿濟格)을 낳고, 7년 후인 1612년 열네째 아들인 뚜얼곤(多爾滾)을 낳고, 1614년에 다시 열다섯째 아들인 뚜어뚜오(多鐸)을 낳는다. 누르하치의 부인들중에서 유일하게 아들을 셋을 낳은 여인이다. 이 때가 되자 가족내에서도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강열하게 무를 숭상하는 정신을 가진 민족에서는 예로부터 아들을 잘 낳는 것이 가장 좋은 부인이었다.
남자가 막내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여자보다 더하다는 옛말이 있는데, 누르하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르하치는 아바하이가 낳은 세 어린 아들을 보배처럼 아꼈다. 황타이지는 생모가 죽은 후 지위가 계속 내려갔다. 더이상 부친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 아니었다. 세명의 어린 동생들이 태어나고 황타이지가 성인이 되면서 부친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바로 이런 외롭고 어려운 시절에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무예를 익히고 글을 읽고, 스스로의 능력과 견식을 넓혀갔다. 결국 전장에서의 공으로 누르하치의 중용을 받고,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해에는 4대패륵중의 하나가 되었다.
누르하치가 죽고 황타이지가 등극하면서 황타이지등 아들들은 부친의 유언임을 들어 아바하이를 순장시킨다. 아바하이는 자결전에 어린 아들을 황타이지에게 부탁하면서 맹세를 하게 하고, 황타이지는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피겠다고 맹세를 한다. 누르하치가 아바하이를 순장시키라는 유언을 과연 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이론이 있으나, 아바하이는 누르하치 사후 자결한 후 순장된다.
누르하치에게는 정실부인 4명이외에도 12명의 부인을 더 두고 있으며, 합쳐서 16명의 부인을 두었다.
수강태비(壽康太妃) 보얼지지터씨(博爾濟吉特氏, 博爾濟錦氏로 쓰기도 한다) : 몽고왕야 콩궈얼(孔果爾)의 딸이다. 콩워얼의 큰 형인 망구스의 딸은 황타이지의 정실부인이고, 망구스의 두 손녀는 황타이지의 비가 된다.
측비(側妃) 이얼근줴뤄씨(伊爾根覺羅氏) : 아바타이(阿巴泰)의 생모임.
측비 예허나라씨. 멍구제제의 동생. 청나라에서는 자매가 같은 남편을 모시는 일이 많았다.
측비 보얼지지터씨. 몽고왕야 밍안(明安)의 딸이다. 밍안은 콩궈얼의 둘째 형이다.
측비 하다나라씨(哈達那拉氏) 하다패륵 후얼깐(扈爾幹)딸이다.
서비(庶妃) 자오쟈씨(兆佳氏) : 아바이(阿拜)의 생모임.
서비 뉴구루씨 : 탕구다이(湯古代), 타바이(塔拜)의 생모임.
서비 자무후줴뤄씨. 이름은 전거(眞哥)이고, 바부타이(巴布泰), 바부하이(巴布海)의 생모임.
서비 시린줴뤄씨. 라이부무(賴慕布)의 생모임.
서비 이얼근줴뤄씨
서비 아지근(阿濟根) : 누르하치 사망시 순장됨
서비 더인저(德因澤) : 누르하치 사망시 순장됨
이를 보면 16명의 처는 만주와 몽고의 각 부족에서 데려왔다는걸 알 수 있고, 한 부족을 점령할 때마다 처를 하나씩 얻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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