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의 즉위후의 뒷이야기이다. 그와 대결하였던 형제들의 뒷이야기이다.
1. 황장자 윤제. 황태자를 폐했을 때, 강희에게 윤잉을 자기손으로 죽이겠다고 말했다가 노여움을 사서 작위를 박탈당하고 집에 유폐되었다. 강희제는 패륵 연수등을 파견하여 감시하게 하였으며, 명을 내려 만일 감시에 소홀하면 일족을 멸하겠다고 하였다. 윤시는 이미 하늘을 볼 수 없는 죽은 호랑이였다. 옹정 12년(1734년)에 죽었고, 패자(貝子)의 예로 장사지내졌다.
2. 황이자 윤잉. 함안궁에 유폐되었다. 옹정제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한편으로는 그를 이군왕으로 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산서성 기현 정가장으로 윤잉을 보내어 유폐하였다. 옹정2년 (1724년)에 사망하였다.
3. 황삼자 윤지. 원래 황권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고, 단지 책을 편집하는데 열심이었는데, 사건에 연루되었다. 옹정즉위후 "윤지가 황태자와 원래부터 친했다"는 것을 이유로, 윤지에게 강희의 능인 경릉(景陵)을 지키도록 보내어 졌다. 윤지는 당연히 불쾌해 하였고, 혼자서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것이 옹정의 귀에 들어가서 윤지의 작위를 박탈하고 경산 영안정에 유폐하였다. 옹정 10년 (1732년)에 사망하였다.
4. 황오자 윤기. 강희제가 준거얼을 친정할 때, 정황기 대군을 이끌었다. 후에 항친왕(恒親王)에 봉해졌다. 윤기는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황위다툼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옹정 10년(1732년)에 사망하였다.
5. 황칠자 윤우. 옹정 8년(1732년)에 사망하였다.
6. 황팔자 윤사. 옹정의 형제중 가장 능력있고 우수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를 폐한 후 윤사가 황권을 노골적으로 노리자 강희가 그를 미워하였다. 옹정의 즉위후 윤사와 그의 그룹은 눈의 가시와 같이 여겼다. 윤사도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마음 속으로 앙앙불쾌하였다. 옹정은 우선 윤사를 친왕으로 올려주었다. 부인이 윤사에게 축하를 하자, 윤사는 "뭐 축하할 일이 있느냐. 결국 목이 달아날 일인데..."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옹정에게 들어갔다. 후에 옹정은 그의 왕위를 삭탈하고, 집에 유폐시시켜 이름을 "아치나(阿其那)'로 불렀다. 아치나에 대하여는 과거에는 만주어로 돼지라는 의미라고 해석하였으나, 지금은 학자들이 "후안무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7. 황구자 윤당. 윤사와 같은 그룹에 속하였으므로 옹정이 용서할 리 없었다. 윤당도 이것은 명확히 알았다. 그래서 "난 출가하여 중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옹정은 그가 출가하여 중이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핑계를 잡아 윤당을 족보에서 빼고,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어 싸쓰헤이(塞思黑)라고 하였다. 싸쓰헤이는 과거에는 만주어로 개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으나, 요즘의 학자는 "후안무치"로 해석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당은 28의 조목으로 직예총독부에 유폐된다. 유폐중 죽었으나 독살된 것이라고 얘기된다.
8. 황십자 윤아. 윤사그룹에 들었으므로 옹정이 싫어하였다. 옹정원년(1723년), 윤아에게 몽고에 사신으로 가도록 하였으나, 윤아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옹정은 장가구에 거주하도록 하고, 같은 해 작위를 박탈하였으며 북경으로 불러 유폐하였다. 건륭2년(1737년)에 비로소 석방되었다.
9. 황십이자 윤도. 강희말년에 상황기 만주도통을 맡았으며 중용되었고 권한을 가졌으나 황자의 당에는 가입하지 않았었다. 옹정이 즉위하면서 윤도를 이군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작위를 박탈하고 패자(貝子)로 대우하다가 다시 진국공으로 낮추었다. 건륭즉위후에 다시 이친왕으로 봉해졌다. 건륭 28년(1763년)에 7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0. 황십사자 윤정. 옹정과 동모소생이다. 그러나 윤사와 같은 그룹에 속하였으며 소문에 의하면 윤진이 유조를 고쳐서 원래 윤정에게 돌아갈 황제위를 윤진이 빼앗았다는 것이며, 이렇게 두 형제는 서로 원수가 되었다. 옹정즉위후 윤정에게 북경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준화에서 강희제의 무덤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그 부자를 경산 수황전 좌우에 연금하였다. 건륭즉위후에 석방되었으며 건륭에 의하여 중용된다.
11. 황십오자. 윤우. 장희제 사후 경릉에서 강희의 묘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들 외에 비교적 상황이 좋았던 사람은 3명이다.
12. 황십삼자 윤상. 윤상은 강희시절에 유폐되었는데, 이유는 불분명하다. 옹정즉위후 이친왕으로 존중받았다.
13. 황십육자 윤록. 윤록은 장친왕 보궈뚜오를 이어 장친왕의 작위를 승계하였다.
14. 황십칠자 윤례. 윤례는 옹정 즉위후 과군왕이 되었다가 과친왕으로 승급하였다. 먼저 이번원을 장악하고, 종인부와 호부를 맡았다. 윤상과 윤례는 4아거그룹에 들었으나, 강희가 살아있는 동안은 비밀로 하였고 대외에 드러내지는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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