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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 역사상 유일한 황제와 평민의 변론서

by 중은우시 2010. 2. 25.

글: 유계흥(劉繼興)

 

청나라 옹정7년(1729), 옹정제(雍正帝)는 증정(曾靜)의 반청사건으로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을 펴낸다. 이 책은 4권으로 되어 있는데, 옹정제가 친히 편찬한 것이다. 그 안에는 옹정제 본인이 내린 10개의 상유(上諭), 재판기록과 증정의 구두진술 47편, 장희(張熙)등의 구두진술 2편이 포함되어 있고, 맨 뒤에는 증정이 쓴 <<귀인설(歸仁說)>> 1편이 붙어 있다. 이 책을 편찬한 목적은 반청복명사상을 지닌 한족 지식인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지존인 황제가 일개 평민죄수와 변론한 책이다. 또한 역사상 궁중의 내막과 비밀을 가장 많이 공개한 황제가 쓴 국서이다.

 

<<대의각미록>>의 간행은 호남에서 발생한 증정의 투서(投書)사건에서 비롯된다.

 

증정이라는 사람은 성격이 활달하고, 도학을 논하기를 즐기며, 반청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청나라때의 유명한 서생 혁명가이다. 그는 1679년에 태어났고, 1741년에 죽었다. 호남 영흥 이어당진 사람이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모친이 그를 키웠다. 집안사정은 아주 빈한했다. 그는 과거에 뜻을 품고 여러번 응시했으나 모두 실패한다. 그리하여 과거를 보고 관직에 나가겠다는 뜻을 접는다. 그는 시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제자들에게는 자주 반청사상을 얘기했다.

 

옹정5년, 증정은 호남성의 장사로 갔다가 청나라초기의 걸출한 사상가, 시인 겸 시정평론가인 여유량(呂留良)의 글을 읽는다. " 그 동안에 비록 수십년이 흘렀지만, 하늘은 황량하고 땅은 무너졌으며 인간사는 세상이 아니로다(其中雖有數十年, 天荒地非人間)"라고 한 싯구를 읽고는 감탄해 마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여유량이야말로 황제의 재주를 타고났으나 황제의 운명을 타고나지는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유량을 존경하는 마음에, 증정은 그의 애제자인 장희를 절강성으로 보내어 여유량을 배알하게 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여유량이 죽은지 40여년이 흐른 후였다. 여유량의 아들인 여의중(呂毅中)은 장희에게 자신의 부친이 남긴 일련의 저작을 넘겨준다. 일기찬 1본, 시집 1본, 일기초본 4속, 초본문집 4본, 산시고 1속등이다. 장희가 이들 저작을 가지고 되돌아오자, 증정은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여 마지 않았다.

 

증정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혁명스승'인 여유량의 이들 문집을 자세히 연구한다. 그리하여 증정은 더더욱 자신의 반청사상을 견고히 한다. 그는 <<지신록>>, <<지기록>>의 두 권을 쓰는데, <<지신록>>에서는 대담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지금은 팔십여년간 군주가 없다. 부득이 여러 성을 돌아다녀, 총명하고 예지를 지닌 인물을 찾아서 주공으로 삼아야 한다..." "중원의 땅은 가라앉고, 오랑캐가 그 빈틈을 뚫고 들어와서는 신기를 훔쳐서 차지하고 있으니,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이다."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은 군신의 구분보다 크다.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은 사람과 물건을 구분하는 것과 같다." "춘추시대에 황제는 당연히 공자가 되었어야 하고, 전국시대의 황제는 당연히 맹자가 되었어야 한다. 진나라이후의 황제는 당연히 정자(程子)가 하였어야 하고, 명나라의 황제는 당연히 여유량이 했어야 하는데, 지금 호강(豪强)이 누리고 있다." 그는 또한 옹정황제의 "10대죄행"을 수집하여 열거하고 있는데, 바로 모부(謀父, 부친을 죽이다) 핍모(逼母, 모친을 죽도록 핍박하다), 시형(弑兄, 형을 죽이다), 도제(屠弟, 동생을 죽이다), 탐재(貪財, 재물을 탐하다), 호살(好殺, 사람죽이기를 즐기다), 후주(酒, 술에 빠지다), 음색(淫色, 음란하다), 주충(誅忠, 충신을 죽이다), 임공(任, 아첨꾼을 기용하다)등이었다. 한마디로 옹정제는 역사상 보기드문 폭군이라는 것이다.

 

증정은'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이론을 가지고 만주족을 배척해야한다고 사방에 선전했고, 군중들이 단결하여 만주족통치에 항거하자고 고무시켰다. 한족의 나라를 되찾자고 주장한다. 마치 모두 취해있는데 홀로 깨어있는 계몽사상가와 같았다.

 

옹정6년, 증정은 천섬총독(川陝總督, 사천과 섬서를 관할하는 총독) 악종기(岳鍾琪)가 두번이나 북경으로 가서 황제를 배알하겠다고 하였으나 황제에 의해 거절당한 일이 일어나자, 악종기는 악비(岳飛)의 후예이고, 악비가 원래 여진과 송나라간의 전쟁와중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점을 생각하여, 악씨집안은 만주족(여진족과 같은 족속)과 대대로 원수지간이라고 생각했다. 증정은 제자인 장희에게 그의 서신을 가지고 서안으로 악종기를 찾아가도록 보낸다. 그리고 악종기로 하여금 금나라의 후손인 만주족들과의 투쟁에 나서서, 송나라와 명나라의 두 왕조의 복수를 하자고 설득한다.

 

악종기는 악비의 21세손이다. 원래 무장집안이다. 조부인 악진방(岳鎭邦)도 좌도독, 소흥총독을 지냈다. 악종기 본인은 강희말기에 티벳의 난을 진압할 때 전공을 세워 사천제독이 되고, 다시 옹정2년(1724년)에 연갱요 대장군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청해로 가서 나복장단진의 반란을 진압한다. 전공이 탁월하였고, 연갱요가 발호하다가 옹정제에게 제거되자, 악종기는 연갱요의 천섬총독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그는 한참 잘나가고 있었다.

 

다만, 천섬총독의 자리는 계속하여 만주족 귀족들이 차지하던 것이었다. 악종기는 비록 한군팔기출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만주족은 아니었다. 만주족들의 중상모략으로 그는 많은 상처를 입었다. 일부 사람들은 몰래 옹정제에게 그를 무고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악종기가 역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옹정제가 나중에 한 말에 따르면 한바구니에 가득 담을 만큼 많았다고 한다. 이런 시기와 비방은 모두 아무런 근거없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바로 전해(옹정5년, 1727년)에 노한민(盧漢民)이라는 사람이 돌연 성도(成都)의 길거리에서 소리를 치며 돌아다녔다: "악공 어르신이 사천과 섬서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서성문의 바깥에 이미 거점을 차렸다. 사람들을 죽일 것이다." 졸지에 유언비어가 퍼져나나고, 인심은 흉흉해졌다. 당연히 이 노한민이라는 자는 관청에 붙잡혀온다. 자세히 조사해보니 이 자는 정신질환자였다. 그리하여 관련부서에서는 그를 죽여버리고 사건을 마무리짓는다.

 

"노한민사건"이 발생하자, 악종기는 어쩔줄 몰라하며, 조정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옹정은 이를 별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겼다. 그는 악종기를 책망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악종기로 하여금 계속하여 '정신을 차리고, 짐을 도와서, 백성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해서, 후손들에게 남겨주라"고 하였다.

 

황상이 이처럼 관대하게 그를 대하자, 악종기는 당연히 감격해 마지 않았다. 그는 청나라조정에 충성심이 강했고,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황상에게 보답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이번에 장희가 악종기에게 반란을 종용하러 오자, 악종기는 이를 황제에게 충성심을 나타낼 좋은 기회라고 여긴다. 사건이 중대하므로, 악종기는 사람을 보내어 이 서신을 가장 빠른 방법으로 옹정제에게 비밀리에 보고한다. 그리고 처리지시를 요청한다. 밀지는 금방 도착한다. 옹정제는 밀지에서 화를 참지 못하고 이렇게 썼다: "이런 괴물을 만나다니, 부득이 기이한 처리방법을 써야겠다"고 하며 엄히 심문하라고 한다. 옹정은 그 외에 적극적으로 이렇게 방안을 내놓는다. 원래처럼 간단하고 거친 고문방법보다는, 인사출동(引蛇出洞)식의 방법으로 진술을 유도하는 것이 좋겠다고. 그렇게 해서 사건의 진상을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악종기는 옹정의 밀지에 따라, 비밀리에 장희를 심문하기 시작한다. 장희는 어쨌든 기개가 있는 자였다. 죽어라 말하지 않았다. 악종기는 궤계를 쓴다. 앞에는 너를 시험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와 피를 내서 맹세를 한다. 악종기는 장희가 자신의 계략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일찌감치 반란을 생각했다고 말한다. 다만 자신의 곁에는 제갈량, 유백온 같은 모사가 없어서, 손을 쓸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장희는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속아넘어갔다. 자신의 스승인 증정이 총명하고 예지가 있다. 그런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뿐 아니라, 장희는 아주 만족하여 악종기에게 이렇게 말한다. 증정은 이미 호광, 강서, 양광, 운귀 6성에 군중들을 움직일 수 있다. 말한마디만 하면 다 들고 일어날 것이니, 반청사업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이때 악종기는 비로소 증정이 배후인물이라고 알아차린다. 악종기는 이 상황을 파악한 후, 즉시 옹정제에게 보고한다. 장희가 이미 내부사정을 다 얘기했으므로, 증정도 더 이상 속일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이미 절강의 여의중, 여유량의 제자인 엄홍규(嚴鴻逵)등과 연락하고 있다고 실토한다. 그후 옹정은 형부시랑 항난록, 부도통 당라해를 파견하여 호남순무 왕국동과 공동으로 증정을 심문하게 한다.

 

옹정은 증정의 황당한 거동이 여유량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미 죽은지 한참된 여유량에 대하여 뼛속까지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다. 여유량은 스스로 자중하며, 청나라의 관직을 받지 않고, 제자를 기르고 강의를 하여 명성이 높았다. 순치제때, 그는 과거에 참가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나중에 산림에 은거한다. 지방관리가 몇번이나 그에게 관직을 맡아달라고 얘기했지만, 그는 모두 거절한다. 여유량이 제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한족의 입장을 강조하고, 오랑캐정권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그의 말과 글에서 청나라정부를 합법정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강희제때, 어떤 사람이 여유량에게 '박학굉사'로 선발에 참가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참가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는 삭발하여 승려가 된다. 강희22년에 병사한다. 비록 여유량은 산림에 은거해 있었지만, 책을 쓰고 이론을 세워서, 그의 반청복명의 사상과 기개는 대강남북의 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다.

 

옹정제는 증정과 여유량을 엄격히 구분했다: "증정은 그저 짐을 비방했다. 그러나 여유량은 위로는 순치,강희의 성덕을 모욕했다; 증정의 비방은 유언비어를 믿었기 때문이지만, 여유량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반란을 일으키려는 요망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여유량의 죄는 극악무도하고, 증정보다 몇배나 크다"

 

그리하여, 옹정제는 이렇게 명을 내린다: "대역죄인 여유량의 모든 문집, 시집, 일기와 기타 책들은 모조리 불태워 버린다"

 

청나라의 관리들은 한편으로는 호남에서 증정, 장희를 체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절강에서 여유량의 가족들을 박해했다. 여의중과 심재관(엄홍규의 제자)는 주살당하고, 서거한지 오래된 여보중(여유량의 아들)도 부관참시의 처분을 받는다. 여, 엄의 두 가문직계가족으로 16세이상인 남자는 모조리 참형에 처한다. 15세 이하는 남자와 모처자매는 간살당하거나 청나라공신집안의 노비로 들어갔다.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여유량의 '역서'를 출간한 차정풍, 차정비도 모조리 참수당한다. 공용극, 주경여는 금서를 소장했다는 이유로 역시 참형을 받는다.

 

옹정제는 증정, 장희를 살아있는 증인으로 삼기 위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이들을 설득한다. 심지가 굳지 못한 증정은 반청에서 마음을 바꾸어 여유량을 책망하고, 청왕조를 찬양하게 된다. 그리고 <<귀인설>>이라는 글을 1편 쓴다. 이론상으로 청나라통치의 합법성을 진술하고, 세상사람들에게 청나라로 복속하도록 권하는 내용이다. 증정은 동시에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끈 여유량의 사설(邪說)에 대하여도 깊이 참회한다. "죽어 마땅한 죄는 모두 여유량의 주장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명한 군주를 오해하였다. 동시에 옹정제에 대하여는 대거 찬양한다. "우리의 황상은 이토록 모든 도덕을 겸비했으니, 수천년래의 일대성인이다"

 

나중에 옹정은 증정을 아주 우대한다. 그에게 벌을 가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에게 좋은 음식과 의복까지 내려주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 그는 지방관리에게 증정을 호남관풍정속사의 직위를 수행하도록 어레인지하고, 혁록에게 그를 데리고, 강녕(남경), 항주, 소주등지의 각성학부로 가서 직접 얘기하도록 한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옹정제에 대한 유언비어를 바로잡으며, 옹정제의 인, 효 및 근정애민등 각종 공덕을 찬양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전국의 문인들에게서 반청감정을 소멸시켜보고자 했다.

 

증정에 대한 심문을 통하여, 옹정제는 자신의 동생인 윤사, 윤당등이 심복들이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불법적인 수단으로 황위를 찬탈했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증정, 여유량 및 그 제자 엄홍규의 반청관점에 대하여,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변론을 펼친다. 그리고 증정의 진술과 <<귀인설>>을 묶어서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으로 펴낸다. 이 책의 첫머리에는 옹정제의 만자에 이르는 글이 있다. 그 뒤에는 증정등이 옥중에서 심문받은 진술이 있고, 마지막에 증정의 <<귀인설>>이 있다.

 

4권짜리 <<대의각미록>>은 증정사건의 역사기록이며, 아주 높은 역사사료적 가치가 있다. 옹정은 증정투서안을 종결한 후, 친히 편찬하여 책으로 간행하였다.

 

<<대의각미록>>이 간행된 후, 옹정제는 전국의 모든 학당에 보급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교관들에게 이 책을 숙독하도록 지시한다. 공부하지 않는 자는 처벌하겠다고 한다. 1730년 4월 4일, <<대의각미록>>의 첫번째 판본이 완성된다. 1차로 500책을 인쇄하여, 북경의 문무대신들에게 나눠준다. 제2차부터 인쇄가 끝난 책은 각성의 고급관리, 각성총독, 순무에게 보내고, 1부는 각성의 인서관에 보내어 이를 기초로 간행하게 한다. 새로운 목판을 새겨서, 각 성의 하급관리들에게 배포하게 한다.

 

나라의 영토가 넓었던 대청제국의 대부분 사람들은 글을 몰랐다. 옹정제는 재능과 도덕을 갖춘 신뢰성있는 문인들을 골라서 서북으로 가서 <<대의각미록>>의 뜻을 보급하도록 시킨다. 유학경전과 권력투쟁에 골몰했던 북경의 관리였던 이들은 시골로 간다. 거기에 임시 건물을 세우고, 향을 사르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 후에 큰 소리로 <<대의각미록>>의 내용을 강의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난주의 한 강연에서 강연자는 정선보인데, 개략 1만명의 사병과 백성이 모여서 경건히 경청했다고 한다. 주천에서는 2만명의 청중이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전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책읽는 소리가 낭랑했고, <<대의각미록>>에 대한 선전보급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옹정10년, 세상을 뒤흔들었던 증정투서사건은 윤사의 추종자 및 여유량의 후손들을 엄벌하고, 진정, 장희등을 석방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옹정제는 이렇게 말했다: "짐이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고 하여 한 사람에게 상을 주지도 않을 것이며, 개인적으로 싫어한다고 하여 한 사람에게 벌을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명을 내린다: "증정은 짐이 특별사면한 사람이다. 짐의 자손은 짐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책임을 추궁하여 살륙하지 말라."

 

그후에 옹정의 후계자인 건륭은 옹정의 사건처리방식과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같다. 심지어 반대되는 길을 걷는다. 옹정이 죽은 후, 새로운 황제인 건륭제는 등극후 겨우 43일만에, 증정, 장희를 극형에 처한다. 그리고 <<대의각미록>>을 회수하여 소각한다. 그리고 금서로 지정한다. 만일 민간에서 이 책을 사사로이 소장하거나 읽는 자가 있으면 일률적으로 사형에 처하겠다고 한다. 이때부터 <<대의각미록>>은 세상에서 보기힘든 책이 된다. 이백여년동안 햇벝을 보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이 책에 더욱 신비로운 광채를 덧붙여 주었따. <<대의각미록>>은 지금도 옹정연간의 내무부간행본과 각성의 번각본이 있다. 그 외에 광서말기 홍콩인사서국의 연인본이 있다. 해방후에는 중화서국의 배인본이 있다.

 

건륭이 옹정의 처리방안과 다른 조치를 취한 것에는 그 나름대로 주도면밀한 배려가 있었다. 그는 청년시기에 이 사건을 목도한다. 그는 분명히 인식했다: 부왕은 비방을 천하에 공포하고, 이를 통하여 스스로의 청백함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증정모반사건과 여유량문자옥의 공개심판과 비판은 실제로 부왕 자신을 심판대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옹정의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에 관한 새로운 해석, 십대죄상에 대한 스스로의 해명, 황궁의 여러가지 스캔달과 비사의 폭로, 황자들간의 다툼, 문무대신들간의 암투등등이 모조리 <<대의각미록>>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만승지존인 황제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고, 국가와 궁중의 기밀사항을 공개한 것이 되엇다. 그리하여 오히려 악영향이 나타난다. 원래 계획했던 백성들을 '깨우쳐주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다. 그저 사람들의 반청감정만 강화시킬 뿐이었다. 이는 청나라통치에 아주 불리했다. 그리하여 반드시 이단사상이 만연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중대범죄인 2명을 살려두어 '반면교사'로 삼게 하려는 것도 감화교육의 작용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예 죽여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