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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雍正帝)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1)

by 중은우시 2005. 7. 24.


강희제의 유조(遺詔)

 

 

강희제의 사후, 옹정제의 즉위에 관련된 이야기는 중국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가장 재미있는 황권다툼이라고 할 수 있다.

 

강희제는 종전에 차기 황제를 정하지 아니함으로써 야기된 문제를 고려하여, 황태자를 정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만주족들은 황태자를 정하였다고 하여 황위계승다툼이 끝났다고 보지 않으며, 계속하여 황위를 향한 경쟁을 멈추지 않았다는데서 비극이 시작된다. 누르하치가 일찌기 츄잉을 황태자로 세웠으나, 다른 형제들과 대신들이 반발하여 결국 츄잉은 유폐된 후 사사되었다.

 

강희제 때 황태자로 책봉된 아들은 황이자(皇二子, 황제의 둘째아들)인 윤잉(胤잉[示+乃])이었다. 윤잉은 강희 13년(1674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다음해인 1675년에 황태자로 봉해진다. 이 때 강희의 나이 22세였다. 첫번째 황후이자 윤잉의 생모인 허셔리(赫舍里)씨는 청나라 황후중 유일하게 출산중에 난산으로 숨진 황후이다. 강희는 첫째 황후인 허셔리씨에 대한 애정이 유별났으며, 이로 인하여 그 아들인 윤잉을 2살이 되자마자 황태자로 봉하게 된다. 강희의 이런 황태자책봉은 그 조상들이 태자를 세우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사후 발생하였던 형제간의 권력다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일찍 2살밖에 안된 아들을 황태자로 봉함에 따라 문제도 역시 많이 발생하게 된다.

 

강희제는 모두 35명의 아들을 두는데, 그 중 어릴 때 요절하지 않아 배분이 부여된 아들만 24명이며, 성년이 되어 책봉까지 받은 아들은 20명에 불과하다. 당시 의술등의 한계를 알아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20명의 황자들중 강희제의 사망당시에 연령이 성년에 달한 사람은 12명이었고, 그들은 다음과 같다.

 

황장자(皇長子) : 윤제 [示+是] : 돌림자는 윤은 胤이었는데, 후에 옹정이 즉위한 후 형제들에게 윤(允)으로 바꾸도록 하여, 옹정즉위후에는 允으로 쓴다. 

황이자(皇二子) : 윤잉 [示+乃]

황삼자(황삼자) : 윤지 [示+止]

황사자(황사자) : 윤진 [示+眞]

황오자(황오자) : 윤기 [示+其]

황칠자(황칠자) : 윤우 [示+友]

황팔자(황팔자) : 윤사 [示+異]

황구자(황구자) : 윤당 [示+唐]

황십자(황십자) : 윤아 [示+我]

황십이자(황십이자) : 윤도 [示+陶의 오른쪽글자]

황십삼자(황십삼자) : 윤상 [示+羊]

황십사자(황십사자) : 윤정 [示+貞], 후에 옹정의 명에 의하여 윤제[示+題]로 개명함.

 

이들이 바로 차기 황권을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에는 크게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황권을 노리게 된다.

 

첫째그룹 : 황태자그룹

 

황태자 윤잉의 생모인 허셔리씨의 조부는 쑤오니(索尼)이다. 쑤오니는 양황기의 원로대신으로, 순치제의 사후에 보정대신(보정대신은 황제가 어려서 황제를 대신하여 모든 정사를 처리하는 고명대신임)으로 임명되는데, 그 중 쑤오니가 우두머리였다. 허셔리씨의 부친은 거부라(褐布剌)로서 당시 영시위내대신(만주족 신하중 최고직위로 여섯명이 임명됨) 중의 하나였다. 숙부는 쑤오어투(索額圖)로서 당시 대학사 겸 영시위내대신으로써 신하들중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쑤오어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황태자를 중심으로 그룹을 만들어서 국정과 대사를 논의하곤 하였다. 당시 강희는 이미 늙어가고 시간이 흐르면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권력을 쫓는 많은 무리들은 황태자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강희제로 하여금 경계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강희는 쑤오어투에게 "너희들이 배후에서 꾸미는 일, 너희가 결탁하여 하고 있는 일체의 일, 너희가 배후에서 원망하는 말, 이런 걸 여기서 다 꺼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난 똑똑히 알고 있다"라고 하며 "어느날 내가 독살당하거나 피살당할지도 몰라, 매일 경계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 후에 강희제는 쑤오어투를 사사하였으며 황태자 윤잉에게는 경고하였다고 한다. "전에 쑤오어투가 너를 도와 꾸민 사정은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쑤오어투를 죽인 것이다". 문제는 이후에도 황태자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으며 계속 세력을 모으고 국정을 논단하였다. 강희는 결국 강희 47년(1708년) 황태자를 폐하였다. 황태자를 폐하는 명을 내리면서 강희제는 한편으로 읽으면서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고,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고 한다. 다 읽은 후에는 슬퍼하고 괴로워함이 매우 심하여 이후 6일 밤낮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않으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중풍까지 들어 왼손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황태자가 자리에서 밀려나자 다른 야심있는 황자들이 그룹을 만들어 대권을 노리기 시작하는데, 태자당외에 팔아거당(八阿哥黨)과 사아거당(四阿哥黨)이 나타난다. 아거는 청나라때 황자를 가리키는 만주어이다.

 

둘째그룹, 팔아거그룹.

 

여덟째 윤사는 재능이 있고, 덕도 있으며, 총명하고 능력이 있어 안팎으로 인심을 많이 얻었따. 처음에 황태자를 폐한 후에 윤이는 내무부총관사를 맡았으며, 그룹을 모아서 대권을 노렸다. 팔아거당에 속한 황자들은 황장자 윤지, 황구자 윤당, 황십자 윤아, 황십사자 윤정 등으로 가장 큰 그룹을 이루었다. 이외에 대신들중에서도 아링아, 어룬다이, 쿠이슈, 왕홍서등이 모두 윤사의 편이었다.

 

황장자 윤지는 생모가 혜비로서 서출이며, 외숙은 한 때 쑤오어투와 더불어 양대산맥을 이루었으나 면직된 명주(明珠)였다. 윤지의 입장에서는 세력이 없고, 생모인 혜비가 윤이를 기른 인연이 있어 두 사람이 연합하였다. 그런데, 윤지는 황태자 윤잉을 폐한 후 강희에게 자기 손으로 윤잉을 처리하겠다고 말했다가 강희의 노여움을 사 작위를 박탈당하고 유폐되게 된다.

 

대신들이 다시 황태자를 세우자는 건의를 올리자, 강희는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신하들에게 누구를 태자로 세우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밀주(비밀리에 황제에게 글로 써바치는 것)를 올리도록 요구한다. 대학사인 마치를 비롯한 대신들은 모두 황팔자 윤사를 천거하였으며, 윤사도 자신이 황태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고, 많은 형제들과 신하들이 윤이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로써 윤사의 주위에는 점차 황태자의 지위를 노리는 하나의 정치집단이 형성되었다.

 

이후 강희제는 윤사를 체포하고 작위를 박탈하였다. 황14자인 윤정이 선처를 호소하자, 강희가 대노하여 칼을 뽑아 윤정을 치고자 하였다. 윤기등이 무릎을 꿇고 강희를 붙들며 말렸다. 모든 황자들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박으며 진노를 가라앉힐 것을 간청하자, 약간 화가 풀려, 황자들에게 윤사를 채찍으로 치게 하였다.

 

황태자를 폐한 후 황자들간의 다툼이 점차 치열해지고 복잡해지는 것을 본 강희는 다음 해에 윤잉을 다시 황태자로 봉한다. 그러나, 다른 황자들은 이미 한번 윤잉을 폐한 적이 있으니 다시 또 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황태자그릅과 팔아거그룹간의 암투는 더욱 치열해지고 격화된다. 강희 51년(1712년)에 강희는 다시 윤잉을 황태자에서 폐한다. 강희는 자식들간의 황위다툼에 넌더리를 내며, 그 당료들을 더욱 엄하게 처벌한다. 상서 제세무는 벽에 쇠못으로 박아서 죽게 하였으며, 옥에서 죽은 투오허는 시체를 불에 태워버린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되고, 황태자그룹과 팔아거그룹의 사이에 사아거그룹이 형성된다.

 

셋째그룹, 사아거그룹.

 

황사자 윤진의 그룹에는 황십삼자 윤상과 황십칠자 윤례(胤禮)가 소속되고, 대신들 중에는 롱커뚜오(隆科多), 연갱요(年羹堯)등이 있다.

 

윤진은 심계가 깊고, 관찰력이 뛰어나며, 겉으로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첫번째 폐위되자 풍향을 잘 읽고 황태자를 위한 말을 강희에게 함으로써 강희로부터 형제간 우애가 있다는 좋은 평을 받았다. 8아거그룹에는 따르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대립하지도 않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부친인 강희제의 말에 따라 "안정수분(安靜守分: 조용히 지내면서 분수를 지키는 것)"하고 불법을 깊이 연구하고, 널리 좋은 사람을 많이 사귀며 교묘하게 자신을 감추어갔다. 부친에게는 충효를 다하고, 형제들에게도 항상 좋은 말을 하였으며, 조정대신들과도 널리 사귀어갔다. 동모소생인 황십사자 윤정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윤정이 팔아거그룹과 어울리는데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그룹과 팔아거그룹간의 당쟁으로 부친인 강희, 형제, 왕공, 대신들의 시선이 그 두 그룹에 집중되어 있을 때, 윤진은 어부지리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진의 심복이자 참모였던 따이뚜오(戴鐸)가 윤진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으며, 윤진은 따이뚜오의 건의를 매우 고마워 하고 감사하였는데, 그 내용은 (1) 황부에게는 효성을 다하고,  재능은 적당히 나타내라는 것이다. 재능을 전혀 나타내지 않으면 부황이 무시할 것이고, 재능을 너무 나타내면 마찬가지로 황부가 의심하고 꺼릴 것이다. (2) 형제에게는 우애를 다하고, 크게 포용하고 화목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3)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화평하고 참으라는 것이다. 잘 지낼 수 있으면 잘 지내고, 한 편으로 만들 수 있으면 한편으로 만들고, 참을 수 있으면 참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4)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참으라는 것이다(戒急忍用). 윤진의 성격은 두가지로 표현되고 있는데 하나가 기쁜 것과 노하는 것이 일정치가 않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처리에 너무 조급해 한다는 것이다. 강희제도 윤진에게 여러번 이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강희의 35명의 아들은 전부 다음과 같다. 순서를 받은 경우는 진한 글자로 표시하였고, 순서를 받지 못하고 어릴 때 요절한 아들들은 그냥 순서대로 이름만 적었다.

 

1、承瑞
2、承祜
3、承庆
4、赛音察混
5、
皇长子胤褆 褆:通“祗”,敬的意思。
6、长华
7、皇二子胤礽 礽:福的意思。
8、长生
9、万黼
10、
皇三子胤祉  祉:福的意思。
11、皇四子胤禛  禛:吉祥,多用于人名。  
12、胤襸
13、
皇五子胤祺  祺:吉祥
14、
皇六子胤祚  祚:福。
15、皇七子胤祐  祐:神灵的帮助、护佑。
16、皇八子胤禩  禩:祭祀。
17、胤礻禹
18、
皇九子胤禟  
19、
皇十子胤礻我
20、
皇十一子胤禌  
21、
皇十二子胤裪  
22、
皇十三子胤祥  祥:吉利。
23、皇十四子胤禵(胤祯)  祯:吉祥。  禵:福。
24、胤禨      禨:祥,事鬼神以求福。  
25、皇十五子胤礻禺
26、十六子胤禄  禄:福
27、
皇十七子胤礼  礼:祭神祀祖
28、
皇十八子胤衸  
29、
皇十九子胤禝  
30、
皇二十子胤袆  袆:美好(多用于人名)。
31、皇二十一子胤禧  禧:幸福,吉祥。
32、皇二十二子胤祜  祜:福。
33、皇二十三子胤祁  祁:盛、大。
34、皇二十四子胤袐  袐:奥秘,奥妙。
35、胤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