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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雍正帝)의 즉위에 얽힌 이야기 (2)

by 중은우시 2005. 7. 24.

옹정제의 즉위와 관련하여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유조계위설(유조에 따라 황위를 승계받았다는 설), 둘째는 개조찬위설(유조를 고쳐서 황위를 빼앗았다는 설), 셋째는 무조탈위설(아무런 유조를 남기지 않았으며 황위를 빼앗았다는 설).

 

첫째, 유조계위설

 

이러한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 옹정은 황부 강희의 신임을 받았으며, 그를 천단에 강희를 대신하여 보내어 하늘에 제사지내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강희가 임종전에 옹친왕 윤진에게 황위를 승계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강희의 유지가 증거이다. 강희 61년(1722년) 11월 13일, 강희는 병이 엄중하였는데, <<청성조인황제실록>>의 기재에 따르면, 황삼자 성친왕 윤지, 황칠자 순군왕 윤우, 황팔자 패륵 윤사, 황구자 패자 윤당, 황십자 돈군왕 윤아, 황십이자 패자 윤도, 황십삼자 윤상, 이번원 상서 롱커뚜어가 어탑앞에 부른 후, 말하기를 "황사자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내 뜻을 잘 알며, 능히 대통을 이을만하니, 짐을 이어 등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3) 강희의 유조를 근거로 한다. <<강희유조>>는 중국역사기록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상면에는 "황사자 윤진, 인품이 귀중하고 내 뜻을 잘 알며, 능희 대통을 이을만하니, 짐을 이어 등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둘째, 개조찬위설

 

이러한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 윤진은 비록 강희에게 인상을 좋게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하여금 천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게 하였다는 것은 강희제가 그에게 황제위를 계승하게 할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강희황제는 윤진에게 한번도 군사와 관련된 업무를 하도록 시키지 않았는데, 만일 후계자로 삼으려고 하고 교육시켰다면 군사직위를 부여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에 비하여 황십사자 윤정의 경우에는 대장군왕에 봉하여 몽고, 서역등을 정벌하여 공을 세우도록 기회를 주었다.

 

(2) 강희의 임종당일(13일), 인시에 황삼자, 황칠자, 황팔자, 황구자, 황십자, 황십이자, 황십삼자 모두 7명의 황자와 롱커뚜오를 입궁하게 하였으며, 그들에게 "황사자 윤진, 인품이 귀중하고 내 뜻을 잘 알며, 능희 대통을 이을만하니, 짐을 이어 등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라"는 말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결정을 이 일곱 황자와 롱커뚜오가 있는 데서 하면서 왜 당사자인 황사자 윤진은 부르지 않은 것인지?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사후에 날조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3) 당일의 실록의 기재에 의하면 윤진은 3번이나 강희의 어탑에 불려간 것으로 되어 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3번이나 윤진을 불렀다는 것은 그 때까지 정신이 멀쩡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그 12시간동안 3번이나 불렀으면서 본인에게는 황위계승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상리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거꾸로 강희가 7명의 황자에게 윤진에 계승한다는 유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4) 강희가 죽은 후 왜 롱커뚜오 혼자서 단독으로 윤진에게 황사자가 계승한다는 유조를 읽었는지? 왜 그 때 다른 형제들이나 왕공대신들은 자리에 없었는지?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강희유지는 조작된 것이라고 본다. 강희유조의 작성일자가 13일인데, 그날은 강희가 사망한 날이다. 결국 강희가 직접 유조를 작성했다고는 볼 수 없고, 누군가 대신 써주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 인물이 롱커뚜오이다. 청나라 자료에 의하면 즉위시 옹정이 롱커뚜오에게 보낸 글에서는 "짐의 공신" "보기드문 신하"라는 내용이 있는데, 즉위에 어떤 공을 세웠다고 그렇게 표현했는지는 모른다.

 

(5) 강희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9개의 문은 모두 6일간 닫겨 있었다. 각 왕은 영이 없으면 대궐에 입궁하지 못하였고,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옹정정변의 의문을 갖게 하였다.

 

(6) <<강희유조>>는 강희제가 죽을 때 이미 정한 것이고 강희제가 작성한 것이므로 당연히 강희가 사망한 13일 당일에 선포되었어야 하는데, 왜 16일이 되어서야 공포되었는지> 이로써 볼 때 위조의 혐의를 벗기 힘들다.

 

(7) 청사연구전문가에 의하면 이 <<강희유조>>는 강희 54년(1715년) 11월 21일의 유지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강희유조에는 헛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8) 어떤 사람은 옹정이 사후에 청동릉에 묻히지 않고, 청서릉에 묻었다는 점을 드는데, 이것은 그가 황위를 적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므로, 지하에서 황부 강희와 조부 순치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옹정은 즉위후 강희가 좋아하던 곳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궁도 강희가 머물던 창춘궁에 머물지 않고 다시 원명원을 만들어 거기에 머물렀다. 그리고 강희가 그렇게 가기 좋아하던 승덕의 피서산장에 옹정은 한번도 가지 않았다.

 

(9) 옹정은 여러 형제들에 대하여 죽이거나 감금하는 등 "살인멸구(죽여서 입을 막는 것)" 혹은 "입을 못열게 하는" 조치를 취하였는데, 이것도 의심의 근거로 삼는다.

 

(10) 옹정은 즉위후 연갱요와 롱커뚜오를 살해하는데 이것도 살인멸구의 의심을 받는다.

 

(11) 옹정은 <<대의멸미록>>을 만들어 자신에 관한 10가지 나쁜 소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자신을 변호사는데, 이것은 마치 "여기에 금괴를 묻지 않았음"이라고 쓴 말뚝을 박아두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었다.

 

대체로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윤진이 동모형제인 황십사자 윤정의 황제위를 찬탈한 것으로 얘기한다. 그 이유로서는

 

(1) 강희가 생각한 후계자는 황십사자 윤정이었으며, 그를 무원대장군으로 봉한 것은 그에게 군공을 세워서 군권을 장악한 후 황위를 이어받으라는 의미였다고 주장한다.

 

(2) 어떤 학자는 강희가 죽기전에 옹친왕이 즉위하라는 유지를 남긴 바 없다고 하며, 소위 강희유조는 위조된 것이라고 한다. 강희가 막 죽은 후에 옹정쪽의 사람이 "전위십사자(傳位十四子)"라는 글자를 "전위우사자(傳位于四子)"로 고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관해서는 윤진이 유조를 고쳤다는 설, 롱커뚜오가 고쳤다는 설, 연갱요가 고쳤다는 설의 3개 설이 떠돌았다. 강희황제가 임종전에 서녕에 가 있던 무원대장군 황십사자 윤정을 북경으로 불렀는데, 이 명을 롱커뚜오가 가지고는 발송하지 않고 유조를 고쳤다고도 한다. 이것은 소문에 불과하고 사실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유조를 고쳤다는 것은 성립되기 힘들다고 본다.

 

하나, 당시 번체자로 쓰는 경우에 '우(于)'는 '어(於)'로 써야 하는데, 십(十)을 어(於)로 고치기는 어렵다.

 

둘, 당시 글의 규범은 황X자로 쓰는 것인데, 이것은 우(于)와 사(四)의 사이에 황자를 넣어야 하므로 고치기가 어렵다.

 

셋, 청나라의 국서는 중요한 경우 만주어와 한자를 동시에 쓰는데, 한자는 고친다고 하더라도 만주어는 고칠 방법이 없다.

 

(3) 옹정이 이름을 고쳤는가? 어떤 사라은 강희의 유조에는 "윤정[示+貞](황십사자)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를 윤진[示+眞]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이는 진과 정의 글자가 비슷함으로 인하여 일어난 의심이다. 옹정제는 후에 황14자의 이름을 윤정에서 윤제로 고치도록 명하는데, 그 이유도 이것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윤진의 진이나 윤정의 정이나 한자발음으로 쩐[Zhen]으로 같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서 바꾸게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때 형제들의 돌림자도 윤(胤)에서 윤(允)으로 바꾸게 한다.

 

셋째, 무조탈위설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옹정이 유조에 따라 즉위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모순으로 해석이 명확하지 않다고 보고 그러한 설은 유지되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옹정이 유조를 고쳐서 즉위하였다는 것도 증거가 명백히 부족하다고 본다.

 

옹정이 즉위한 것은 그가 황권경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이며, 이러한 황위경쟁은 드러나거나 감추어지거나간에 40여년에 걸쳐 있어온  것이고 결과적으로 태자당그룹도 실패하고, 8아거그룹도 실패하고 결국 4아거그룹이 승리한 것이라는 것이다.

 

옹정제의 황위는 정도로 취득한 것인가? 비정도로 취득한 것인가? 옹정이 등극한 후 280여년이 지났지만, 학술계에서는 아직도 뜨겁게 다투어지고 있는 주제이고, 연속극등에서도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역사에는 이에 관해 더 이상 적혀 있지 않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고, 정사에는 절대 옹정이 황위취득과 관련하여 조금이라도 올바르지 않은 일을 했다고 적지는 않는다. 강희는 생전에 황위계승의 유조를 내린 적이 없고, 조금이라도 황위계승과 관련한 문건을 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