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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의 사망원인

by 중은우시 2008. 12. 26.

글: 김항원(金恒源)의 원저 정리

 

옹정(雍正)의 죽음은 시종 신비한 안개에 휩싸여 있는 미스테리와 같다. 공식자료상에 적힌 옹정의 죽음에 관한 기록은 아주 간단하다. 그래서 역대이래로 그의 사인에 관하여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전설에 의하면 여사랑(呂四娘)이 암살한 것이라고도 하고, 궁녀와 태감에 의하여 목졸려 죽었다고도 한다. 이외에 많은 학자들은 단약을 먹어 독사되었다고도 한다. 이런 주장중 어느 것이 믿을만한가? 옹정의 죽음에 관하여 역사는 어떤 단서를 남겨놓았을까?

 

사서에 기록된 옹정의 죽음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옹정제가 원명원에서 병이 심해졌다. 다음날 오후에 위독해져서 대신을 불러모은다. 그날 밤에 죽어버린다. 도대체 무슨 원인으로 옹정이 죽었는지는 사료에 아무런 기록이 없다. 옹정의 심복대신인 장정옥의 개인기록을 보면, 당시 옹정을 얼굴의 일곱구멍으로 피를 흘렸다(七流血)고 한다. 그리하여 그가 놀라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옹정의 급사에 대하여 공식자료에는 원인을 밝히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의문을 품게 되었다. 여기에 당시 그의 사람됨에 관한 전설과 평론이 많았으므로, 더욱 사람들의 의심을 불러오기 쉬웠다. 그리하여 각종 그의 비명횡사에 관한 주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첫째 주장: 여유량사건에서 도망친 여사랑이 입궁하여 암살하였다

 

한가지 주장은 여사랑이 암살하였다는 것이다. 이 설은 오늘날에도 아주 유행하고 있다. 1981년, 고고학자들이 옹정의 지궁을 발굴했을 때, 관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관을 이미 열어보았더니 옹정이 시신만 있고 머리가 없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렇다면, 여사랑의 내력은 어떠한가? 전설에 따르면 여사랑은 여유량(呂留良)의 딸이다. 여유량사건때 그녀는 모친과 노복 1명을 데리고 도망쳤고, 부친을 대신하여 복수를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무공을 배우고, 나중에 궁중에 잠입하여, 옹정을 죽여버린다. 또 한가지 주장은 그녀의 사부는 중인데, 원래 옹정의 수하인 검객이었다. 나중에 그의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서 옹정을 떠났으며, 이 여제자를 길렀다는 것이다.

 

김항원에 따르면, 이런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옹정이 여씨집안을 처리할 때, 육시, 참수를 하였을 뿐아니라, 여유량의 손자대까지 모조리 변방으로 보내어 노비로 삼았다. 건륭때, 여씨의 후대중에는 이미 국수점을 열거나, 약포를 열거나, 의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기부를 하고 감생이 되었는데, 청나라정부가 발견한 후에 흑룡강으로 보내어 노비로 삼은 일도 있다. 여씨의 후예들이 살아있었지만, 그다지 규제받지 않고 자유롭게 할동했다. 그런데 굳이 부친을 위하여 복수하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사랑이 모친과 노복을 데리고 세명이서 탈출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당시 이 일을 처리한 절강총독 이위는 도적을 붙잡는 것으로 유명한 자였다. 만일 여유량의 후손이 도망쳤다면, 그는 자연히 끝까지 쫓아가서 붙잡았을 것이다. 원래 이위는 여유량의 집안에 편액을 써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옹정제는 이를 이유로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이 사건의 처리에 온 정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므로, 주범의 자손이 도망치는 일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주장: 궁녀, 태감이 그가 깊은 잠에 들었을 때 목졸라 죽였다

 

또 하나의 전설은 옹정9년, 궁녀와 태감 오수의, 곽성이 옹정제가 깊은 잠에 들었을 때, 목을 졸라서 숨을 끊어지려고 하는데, 태의 장모가 치료하여 살려냈다는 것이다.

 

김항원선생은 이것은 아무런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명나라때 유사한 일이 발생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명세종이 가정21년(1542년)에 궁비 양금영등에 의하여 목이 졸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태의 허신이 약을 써서 회복시킨 건이다. 옹정과 가정은 모두 시호가 "세종"인데, 민간전설에서는 아마도 명세종의 일을 청세종에게 붙여서 얘기한 것이다.

 

옹정이 모살당했다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옹정의 손자인 가경은 다른 사람에게 암살당할뻔한 적이 있었다. 가경8년(1803년) 윤이월 이십일 가경제는 원명원에서 대내로 되돌아와서 신무문을 들어가는데, 순정문에 이르러 돌연 진덕이라는 기인(旗人)이 그를 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붙잡혔다. 이 것이 궁궐내에서 발견된 모살사건이다. 아마도 후인들이 이 사건을 옹정에게 끼워붙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셋째 주장: 옹정은 도가의 장생성선(長生成仙)에 관심이 많았다. 단약의 독때문에 죽었다

 

청말민초에 어떤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다: "세종이 죽은 것은, 전해지리고 단약수련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대학자인 양내제 선생은 중국제일역사당안관에 소장된 청나라내무부 조판처의 <<각작성활계청당>>등 제1차자료를 뒤져본 후에 <<<옹정제가 단약중독으로 죽은 것에 대한 방증>>이라는 글을 썼다. 김항원 선생은 양내제 선생의 논술은 객관적이고 믿을만 하다고 본다.

 

옹정이 젊었을 때 불교를 좋아하고 도교를 숭상했다. 황제가 된 후에, 신선의 도를 구했고, 장생불로를 바랐다. 이를 위하여 바빴다. 그는 도사를 궁내로 불러들였을 뿐아니라, 상빈으로 모시고 단약을 만들게 해서 복용했다. 그리고 자기가 사는 황궁이 유명한 사찰이나 도관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주위의 환경까지 모형으로 만들었으니, 그가 도가의 장생성선설에 대하여 얼마나 빠져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사료에는 옹정이 죽었을 때 "일곱구멍에 피가 흘렀다"는 말이 있다. 일곱구멍에 피를 흘린다는 것은 심각한 중독을 나타낸다. 옹정은 오랫동안 도사들이 만든 소위 "장생불로의 약"을 먹었다. 이들 단약에는 수은, 납, 주사등 광석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모두 고온으로 다려서 만든다. 그리하여 열성이 강하다. 열세째 윤상이 죽은 후, 장생불사를 위하여, 옹정은 단약의 복용량을 늘여서 중독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은 이치에도 맞는다.

 

건륭이 정식 등극하기 전에, 바로 궁중의 도사를 쫓아냈는데, 이것을 보더라도 옹정의 죽음이 도사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건륭은 단약의 해로움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궁중도사를 쫓아내는 것을 다른 어떤 국사보다 먼저 시행한 것이다.

 

넷째 주장: 여색을 탐하고, 춘약을 남용하여 급사하였다.

 

김항원 선생은 옹정이 황제가 되어 집정한 13년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친척들도 멀어져서 거의 고립된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생명이 위급할 때 형제에게 나서서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한다. 그의 몸과 마음이 모두 괴로웠을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외에 옹정의 신체상황은 옹정7년후 정적들을 죽일 사람은 죽이고, 연금할 사람은 연금하고, 기본적으로 모두 처리완료한다. 이전과 비교하자면, 옹정은 어느 정도 시간이 남았다. 제왕에게 일단 시간이 남으며 문제가 생긴다. 여색을 탐하고 몸은 곧 망가지는 것이다.

 

조선의 사료를 보면 이런 말이있다: "옹정은 만년에 여색을 탐하여 병이 뼛속까지 들었다. 허리 아래를 쓰지 못한지가 오래 되었다." 조선의 사신이 본국의 국왕에게 올린 보고서에 나오는 말인데, 고의로 날조하거나 옹정을 일부러 공격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 사료를 보면 옹정이 말년에 몸이 좋지 않았다는 방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괄해보면, 옹정의 죽음은 그가 근정(勤政)의 피로로 인하여 체력이 바닥난 것과 큰 관계가 있다; 그의 몸과 마음이 오랫동안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밤에는 잠이 들지 못하며,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보응을 두려워하는 것과 큰 관계가 있다; 그가 오랫동안 단약을 계속 복용하여, 체내에 독이 축적되어 있었던 것과도 큰 관계까 있다; 그가 만년에 장생불사를 위하여 단약복용을 증가시키고, 춘약을 남용한 것이 아마도 그가 급사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 옹정의 죽음을 단순히 그의 '과로사'로 표현하는 것은 전면적이지 못하다. 민간에서 전하는 여사랑의 복수나 옹정의 머리가 없다는 등등은 순전히 민간의 상상일 뿐이다. 믿을만한 증거가 없고,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