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피휘(避諱)

중은우시 2005. 7. 21. 19:52

피휘는 중국역사상 특유한 금기성의 습속이었다. "휘(諱)"라는 것은 직접 부르거나, 쓸 수 없는 이름을 의미한다. 최초에는 신하나 아들은 임금이나 아버지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다른 글자나 음으로 대체하는데서 시작하였다. 그 후에 피휘의 범위는 확대되어 사회의 여러 방면으로 번져갔다.

 

<<홍루몽(紅樓夢)>>에 나오는 임대옥(林黛玉)은 가정교사인 가우촌(賈雨村)을 따라 글을 읽을 때, "민(敏)"자만 나오면 모두 "밀(密)"로 읽고, 글을 쓸 때도 민(敏)자는 반드시 한두획을 줄여서 쓰곤 하여, 선생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었다. 그러다 가우촌이 골동상인 냉자흥으로부터 임대옥의 모친의 이름이 '가민(賈敏)"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왜 그런지 깨닫게 된다. 원래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피휘"한 것이었다.

 

피휘의 습속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몇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진(秦)나라때 부터라는 것이다. 진원(陳垣)의 <<사휘거례(史諱擧例)>> 권팔 <<역조휘례>>에는 가장 최초의 피휘사례로, 진시황의 이름이 정(政)이므로 달력의 "정월(正月)"을 "단월(端月)"로 바꾸었다는 것과, 진시황의 부친의 이름이 자초(子楚)이므로, 지명중에서 "초(楚)"는 전부 "형(荊)"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는 춘추(春秋)때부터라는 것이다. <<좌전, 환공6년>>의 기재에 따르면, 진희후의 이름이 사도(司徒)이고, 송무공의 이름이 사공(司空)이고, 노헌공의 이름이 구(具)이고, 노무공의 이름이 오(敖)였다. 피휘의 습속이 일어나서 진나라는 사도라는 관직을 없애서 중군으로 부르고, 송나라는 사공이라는 관직을 없애고 사성이라고 하였으며, 노나라에서는 구, 오라는 이름을 가진 두개의 산 이름을 없애고, 그 지방의 이름으로 산명을 바꾸었다. 이상의 4 사람은 서주 말년에 살았으므로, 만일 그들의 생전에 피휘의 습속이 있었더라면 아예 처음부터 그런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후에 피휘의 필요에 따라 관명과 산명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서주(西周)때부터라는 것이다. "周人以諱事神, 名, 終將諱之"(주나라 사람들은 신을 섬기는데는 피휘하였다, 이름은 죽고나면 피휘하였다), <<예기, 단궁하>>에는 "卒哭而諱, 生事畢而鬼事始也"(죽고나서 곡을 하고 나면 피휘하였다. 산 사람의 일이 끝나면 귀신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주나라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은 직접 불렀지만,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최초의 피휘일 것이다.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원래는 죽은 사람에게만 피휘하던 습속이 점점 발전하여 살아있는 사람까지 피휘하는 것으로 변모하였다. 다만, 이를 반박하는 사람들은 주여왕의 이름이 호(胡)인데, 주희왕의 이름이 호제(胡齊)이고, 주목왕의 이름이 만(滿)인데, 주양왕때 종실중에 이름이 "왕손만(王孫滿)"이 있다는 것을 들어, 서주시대에는 실제상 피휘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하여 피휘의 기원이 서주라는 학자들의 설명은, 당시는 피휘가 막 시작된 단계이므로 완벽하게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외에 어떤 사람들은 피휘의 습속이 하나라 상나라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근거는 <<산해경, 대황서경>>에서 "...이름을 하후개(夏后開)라 한다"라는 글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라의 시조인 하우계(夏后啓)의 이름을 피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