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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김용 : [위소보 이녀석] (1)

by 중은우시 2005. 7. 18.

무협작가 김용이 쓴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위소보를 주제로 한 글이지만, 대가의 생각을 편린으로나마 접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1

 

사람의 성격은 매우 복잡하다.

보통 얘기하는 인성, 민족성, 계급성,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등등은 모두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한 가정에서의 형제자매는 비록 동일한 유전을 물려받았고, 같은 환경하에서 자라지만, 아주 어릴 때에도 성격에는 이미 큰 차이를 나타낸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같이 느끼는 바다.

 

내 개인의 생각으로는, 소설이란 주로 사람을 묘사하고,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야기와 환경은 단지 인물과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감정이란 비교적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게 된다. 기쁨, 슬픔, 분노, 처량, 사랑, 미움등등...비록 강도, 깊이, 단계, 전환은 천변만화하지만, 중외고금을 막론하고 대체로 큰 차이는 없다.

 

사람의 성격은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르며, 이것이 바로 개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양산박과 축영태, 가보옥과 임대옥, 그들의 깊고도 뜨거운 사랑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로미오와 양산박과 가보옥 세 사람의 사이에, 줄리엣과 축영태와 임대옥의 사이에 존재하는 성격상의 차이라는 것은 말로서는 다 표현하기가 힘들다.

 

서양희극 연구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희극과 소설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36가지이다. 바꿔 말하자면 인생의 희극은 이 36가지 유형을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이미 수천 수만종의 희극이나 소설이 쓰여졌고, 이후에도 수천 수만개의 희극이 공연될 것이고, 수천 수만개의 소설이 발표될 것이다. 사람들은 구성이 비슷하다고 하여 지겹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희극과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개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작가의 표현방식이나 수법도 다르다. 작가의 품격도 작가의 개성의 일부분이다.

 

2.

 

소설은 작가의 개성과 상상을 반영한다. 어떤 작가는 자기의 경험을 위주로 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찰을 쓰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자기의 상상을 위주로 하지만, 약간의 직접, 간접의 경험을 쓰기도 한다. 무협소설은 주로 상상에 의존하지만, 거기에 나오는 사람, 내력, 성격, 감정등은 경험이나 관찰과 관련이 된다.

 

시인과 음악가중에는 신동이 많고, 그들은 주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며, 경험이나 관찰은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설가와 화가는 통상적으로는 나이가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다. 당연히 굴원, 두보와 같이 감정이 깊고, 내용이 풍부한 시편들은 신동이라고 하더라도 절대 써낼 수 없는 것이다.

 

소설가의 첫번째 작품은 통상적으로 그 본인과 관련이 되거나, 혹은 쓰는 것이 본인이 가장 잘 아는 사물인 경우가 많다. 후반기에 이르면, 생활의 경력도 복잡해지고, 소설의 내용도 복잡해 지는 것이다.

 

나의 첫번째 소설<<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에서 쓴 것은 내가 어렸을 때 고향에서 많이 들었던 전설...건륭황제는 한족의 후손이라는 것이었다. 진가락(陳家洛)과 같은 성격은 지식인중에서 많이 있다. 항주와 해녕은 나의 고향이다. <<녹정기(鹿鼎記)>>는 현재까지는 나의 최후의 소설이고, 쓴 대상은 내가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기원, 황궁, 조정, 무인도...인물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위소보와 같은 어린 깡패는 내 일생중에 반명도 만나본 적이 없다. 양주는 내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다. 내가 관찰하고 체험하였던 여러 사람들의 성격을 융합시켜서 위소보라는 인물로 그려낸 것이다.

 

그의 성격의 주요한 특징은 환경에 잘 적응하고, 의리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3.

 

중국의 자연조건은 그다지 좋지 않다. 경작지는 부족하고 인구는 많다. 이집트, 인도, 그리스, 로마등등 고대의 위대하였던 민족은 지금 소멸하였다. 중국인은 아주 어려운 생존환경하에서 살아남았고, 지금까지도 충분한 활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민족이 되었는데, 당연히 이유가 있다. 생물학과 인류학의 이론에서 보면 대체로 중국인은 가장 환경에 잘 적응하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가장 환경에 잘 적응하는 사람은 반드시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람은 아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고상한 사람은 생존이나 경쟁에서 종종 실패자가 된다는 것이다.

 

중국역사상 고상한 사람이 비열한 사람에게 살해당하는 기록은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기분이 좋지 않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비록 역사를 쓰는 사람이 승리자는 가급적 비열하지 않도록 그리려고 하기는 하지만.... 역사는 사람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이 최후에 승리하지는 않았다. 송고종과 진회는 악비를 죽였고, 악비가 진회를 죽이지 못하였다. 여러 큰 인물들이 큰 일을 해냈지만, 그들이 승리를 얻는 방법은 그다지 고상하지는 못하였다. 예를 들어 당태종은 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물론 그 형과 동생이 그보다 더 고상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른 나라의 역사도 비슷하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등등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미국에서도 인디안인들의 도덕이 미국백인의 그것보다는 얼마는 높았을 것이다.

 

국가민족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본국민족에 유리한 것은 도덕적으로 고상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정의와 옳고그름도 분명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위안할 수 있는 것은, 인류는 진보한다는 것이다. 정치투쟁의 수단도 갈수록 문명화되고, 비열한 정도는 그래도 날이 갈수록 감소한다는 것이다. 대중매체는 집단의 도덕적 제재로서 작용하고 있다.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인류는 예전보다는 많이 고상해졌다. 그렇게 잔인하지도 않고, 그렇게 수단방법을 가리지도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