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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유소기(劉少奇)는 어떻게 연안(延安)에서 2인자로 성장했는가?

by 중은우시 2025. 6. 26.

글: 팽후문(彭厚文)

1943년 3월 20일, 중공중앙은 연안에서 정치국회의를 개최하여, 중앙지도기구에 대한 중대한 개조를 진행한다. 회의에서 유소기가 중앙서기처 서기 및 중앙조직위원회 서기,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겸임하기로 결정한다. 이때부터, 유소기는 중앙핵심지도층에 들어갔고, 당내2인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이것은 유소기의 연안에서의 굴기라 할 수 있다.

당사(黨史)를 잘 모르는 사람은 유소기가 연안에서 굴기한 것에 대해 돌연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 이는 중공지도자의 역사진전과정에서 계속 대랑도사(大浪淘沙), 우승열태(優勝劣汰)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유소기의 뛰어난 사상수준, 탁월한 지도능력, 두드러진 역사공적은 그가 굴기한 근본원인이다. 1930년대후반과 1940년대초반의 파란만장한 항일운동과 항일전쟁은 그로 하여금 정치적 재능을 발휘하게 할 수 있었던 역사무대였고 또한 그가 굴기한 중요한 계기였다. 모택동과 당내 고위간부들의 유소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그가 굴기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이다.

시세가 영웅을 만들다.

홍군이 장정(長征)으로 섬북(陝北, 섬서북부)에 도착한 초기에, 유소기는 비록 이미 정치국 후보위원이었지만, 그의 지위와 작용은 당의 지도층에서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출현한 것은 첫째로 당연히 지도자의 성장에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외에 두 가지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첫째, 1920년대후반과 1930년대전반에 당내에서는 기본적으로 "좌"경착오노선이 지배적이었다. 유소기의 정확한 주장과 영도재능은 억압받고 탄압받았다. 유소기는 일찌기 노동운동을 이끌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안원로(安源路)광산노동자대파업, 성항(省港)대파업, 상해5.30운동 및 1927년 상반기 무한(武漢)노동운동에서 모두 중요한 지도역할을 했다. 대혁명이 실패하기 전에, 유소기는 이미 당내에서 주목을 받던 노동운동지도자였다. 일지기 동시에 중화총공회(工會는 노동조합을 가리킴)와 호북전성총공회 비서장의 직위를 맡았었다. 이를 보년 그는 아주 강력한 지도능력 특히 조직공작분야의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당의 5대때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된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유소기는 중앙의 파견으로 전후로 중공 순직성위(順直省委)와 만주성위(滿州省委)에서 지도공작을 한다. 그리고 한때 소련의 적색직공국제(赤色職工國際, Profintern)에서 집행국위원을 맡았다. 소련에서 귀국한 후, 상해의 중공임시중앙에서 직공부 부장과 중화전국총공회 조직부 부장을 맡아 계속하여 백구(白區, 국민당통치지역을 가리킴)에서 노동운동을 이끈다.

순직성위, 만주성위에서 일하던 기간이든 아니면 나중에 상해임시중앙에서 노동운동을 이끌던 기간이건, 유소기는 계속하여 그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중 특히 만주성위서기로 있는 동안 두드러졌다. 짧은 8개월만에, 그는 만주의 당조직을 회복시키고 정돈했다. 그리하여 강력한 성위조직과 30여개의 하층지부를 건립하여 신속히 국면을 타개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중앙의 지도기관은 먼저 구추백(瞿秋白)의 "좌"경맹동노선이 지배했고, 이어서 이입삼(李立三)"의 좌경모험노선이 지배하며, 이어서 왕명(王明)의 좌경교조주의가 지배한다. 유소기는 오랫동안 노동운동에 몸을 담아왔고, "좌"경착오노선의 폐단을 불은 보듯이 훤하게 꿰뚫어 본다. 그리하여 자주 중앙과 공산국제(코민테른)에 "좌"경사상과 정책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하여 계속하여 중앙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특히 1931년 1월 중공 6기 4중전회이후, 왕명을 대표로 하는 "좌"경교조주의가 중앙을 지배하면서, 유소기의 처지는 더욱 곤란해진다. 1932년 3월 14일, 임시중앙에서 정치국회의를 개최하고, 유소기가 이끄는 중앙직공부와 전총당단(全總黨團)이 이미 "우경기회주의의 진흙탕 속에 빠졌다"고 비판받으며, 전체 당은 이런 "유해한 기회주의노선"을 "견결하고 무자비하게 타격"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유소기의 직공부 부장 직위를 면직시킨다. 회의후, 임시중앙은 <직공운동을 위하여 동지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유소기의 소위 "착오"를 전체 당에 공표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유소기가 노동운동을 이끄는 재능과 특기는 전혀 발휘될 수 없었다. 백구의 노동운동은 발전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계속하여 좌절을 겪게 된다.

둘째, 소비에트구시기와 장정을 전후하여, 유소기는 여전히 노동조합업무를 위주로 하고 있었다. 이는 당과 홍군에 대한 영향력을 제한되게 만들었다. 직공부 부장의 직위가 면직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소기는 중앙소비에트구로 보내어진다. 1932년 겨울, 중앙소비에트구에 도착한 후, 그는 중화전국총공회 소비에트구중앙집행국 위원장을 맡는다. 소비에트구는 농촌에 위치하고 있어, 노동자의 수가 비교적 적었고, 노동조합의 업무는 중요성이 비교적 낮았다. 장정과정에, 유소기는 비록 홍팔(紅八), 홍오(紅五), 홍삼군단(紅三軍團)의 지휘업무에 참가했지만, 모두 임시적이었고, 재직기간도 길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935년 연말 이전에, 전쟁환경과 농촌환경의 제약으로, 유소기는 시종 재능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고, 지도능력 특히 조직업무능력을 발휘할 무대가 펼쳐지지 못했다.

1935년 12월, 중공중앙 정치국이 섬북 와교보(瓦窖堡)에서 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하는 신정책과 신책략을 제정한다. 당시, 국내정치국면은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다. 일본제국주의는 중국 화북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했고, 민족갈등이 날로 두드러진다. 이는 중공이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깃발을 높이 들도록 요구했고, 단결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단결시켜 항일구국투쟁을 전개해야할 때였다.

국내의 이런 정치국면과 와교보회의에서 제정한 신정책, 신책략은 당이 다시 모든 것이 무너진 백구업무를 회복시켜야할 필요를 생기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백구의 항일군중운동을 지도하는 것을 강화해야 했다. 그리고 각종 정치세력 및 각계층의 민중이 항일민족통일전선에 가담하도록 해야 했다. 이는 유소기가 자신의 지도능력을 발휘할 광활한 무대를 마련해준다. 유소기가 연안에서 굴기한 것은 바로 와교보회의를 기점으로 한다.

다시 백구(白區)공작의 국면을 열다.

와교보회의가 끝난 후, 중공중앙은 백구공작의 국면을 다시 열 방법을 고민한다.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의 영향으로, 1930년대전기에 당의 백구공작은 심각한 손실을 입었고, 당의 백구에서의 조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와교보회의가 개최될 때, 당의 백구 성급 및 그 이상의 조직중 남아 있는 것은 북방국과 하북성위 정도였다. 나머지는 약간의 도시와 농촌에 일부 하층조직과 하층간부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북방국과 하북성위는 두개의 명칭, 하나의 조직이었다. 겨우 3명의 지도간부가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역량도 약하고, 영향력도 크지 않았다. 중앙은 북방국의 영도를 강화하는데서 시작하여 당의 백구조직을 발전시키고, 화북의 항일군중운동에 대한 영도를 강화하여 다시 백구의 공작국면을 개척하기로 결정한다.

1935년 12월 29일, 중앙정치국은 상위회의를 개최하여, 북방국의 업무를 어떻게 전개하고 강화할지를 토론한다. 중공중앙책임자 장문천(張聞天)은 유소기를 중앙의 대표신분으로 화북에 보내어, 북방국의 업무를 영도할 것을 제안한다. 그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1936년 1월, 유소기는 호복(胡服)이라는 가명으로 화북국의 소재지 천진으로 간다. 천진에 도착한 후, 그는 북방국의 몇몇 주요책임간부와 연락하고, 약간의 조사연구를 진행한다. 그리고 준의회의(遵義會議)후 비록 전당에 있어서 "좌"경착오노선이 이미 시정되었지만, 당의 백구조직과 백구공작에서는 그 영향이 깊이 존재하고 있었다. 주요한 것은 관문주의(關門主義)와 모험주의였다. 모든 것을 타도하고, 일체 협력하지 않는ㄷ나. 일정한 조건하의 방어, 퇴각, 양보의 필요성은 전혀 부정한다.등등. 이런 상황을 바꾸지 않으면,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신정책은 관철될 수가 없고, 당은 백구의 항일군중운동에 대해 정확하고 강력한 영도를 할 수가 없으며, 당의 백구공작도 회복되거나 전개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소기는 먼저 지도사상방면에서 북방국의 업무를 시정하여 바로잡는다.

1936년 4월초, 유소기는 <입삼노선의 잔여인 관문주의와 모험주의를 숙청하자>라는 글을 하북성위의 내부간행물 <화선(火線)>에 발표한다. 그는 이렇게 지적했다: "관문주의와 모험주의는 현재 당내의 주요한 위험이다." 그들은 "당을 군중과 분리시켜, 당을 고립시키고, 동맹자들이 우리를 떠나게 만든다." "많은 공작과 조직이 와해되고, 많은 동지와 간부다 불필요한 체포와 도살을 당했다." 그러므로, "현재 반드시 철저히 이런 잘못을 까발리고, 반드시 이런 잘못을 치명적인 타격으로 철저히 당내에서 청산해야 한다." 이 글이 발표되자, 당내 백구공작에서 존재하던 모험주의와 관문주의의 잘못이 숙청되는데 극히 중요한 지도작용을 한다. 그리고 당의 백구공작이 회복되고 발전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동시에, 유소기는 화북당의 조직을 적극적으로 회복시키고 정돈하는 조치를 취한다. 그는 먼저 북평(북경), 천진 두 시위를 건립하여, 하북성위 기동대표인 이보화(李葆華)를 북평시위서기로 보내고, 이철부(李鐵夫)를 천진시위서기로 보낸다. 전 천진시위서기 임풍(林楓)은 유소기의 비서가 된다. 동시에, 전 하북성위 대표 겸 기노예변구특위서기 여옥(黎玉)을 제남으로 보내 산동성위를 재건하게 하고 그를 성위서기에 앉힌다. 그후, 다시 산동성 공위(工委)와 하남성 공위를 건립한다. 이렇게 하여, 화북의 일부 주요 성시는 당의 성급조직이 회복되거나 건립된다. 그리하여 화북의 항일구국운동의 전개에 강력하게 조직으로 뒷받침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나중에 화북항일유격전을 전개하는 기초를 닦는다.

그외에 유소기는 중앙이 맡긴 임무에 근거하여, 소수의 간부를 홍콩, 광주, 상해, 무한등 중심도시로 파견하여, 당의 조직을 회복시키고, 건립한다. 이런 일은 백색공포하에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의 영향하에 모조리 무너진 백구의 당조직을 점차 건립하고 발전시키며, 다시 생기와 활력을 회복시키는 것이었고, 당을 "소비에트구의 당"에서 전국적인 당으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다.

유소기가 중앙의 주북방국대표를 지내던 동안, 북평, 천진, 상해등지의 공개적인 간행물 및 당이 출판한 일부 반공개간행물에 글을 발표하여, 당의 항일구국주장 및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선전하여, 일정한 정도로 국민당통치지구 각계인사들의 여러가지 오해를 불식시키고, 당의 전국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하는 방면에서 그는 일부 구체적인 일들을 진행했다. 특히, 일부 중요간부를 산서(山西)와 염석산(閻錫山)에게 보내 접촉하고 협력했으며, 그와 특수한 형식의 통일전선을 형성한다. 이는 중공이 국민당의 지방당국과 항일민족통일전선방면에서 취득한 중대한 돌파구가 된다.

이상의 일을 추진하면서, 백구공작의 국면을 열 수 있게 되고, 중앙으로부터 높이 평가받는다. 1936년 8월 5일, 중앙서기처는 유소기와 하북성위에 서신을 보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북방당의 업무가 호복 동지가 도착한 후, 기본적으로 변화가 있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들 주요한 변화는 이미 승리의 기초를 닦았고, 광명찬란한 위대한 앞날을 전개하고 있다." 유소기도 백구공작방면에서 두드러진 성취를 거두게 됨에 따라 전체 당의 주목을 받는다. 1945년 4월 제6기 7중전회에서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유소기를 "정확한 노선으로 백구에서 업무중인 대표"라고 표현하며, "유소기 동지의 백구업무에서의 책략과 사상은 마찬가지로 하나의 모범이다."라고 높이 칭찬하는데, 이는 그의 이런 뛰어난 성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면적으로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을 심도있게 비판한 최초의 인물

연안시기, 당이 사상건설방면에서 취득한 하나의 중요한 성취는 바로 정풍운동을 통하여,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을 비판하고 청산하고, 나아가 모택동으로 대표되는 저확한 노선이 전체 당을 영도하도록 확립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유소기가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을 심도있게 비판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소위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은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을 비판하는데 대하여 그는 전체 당에서 최전선에 섰다는 것이고, 그는 일찌감치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을 인식했고, 가장 먼저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하여 해악과 근원에 대해 심도있게 비판을 진행하였다.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이 전체 당을 통치한 것은 1931년 1월 개최된 6기 4중전회때부터이고, 1935년 1월 개최된 준의회의에서 끝이 난다. 유소기는 가장 먼저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을 진행했고, 1936년 4월초에 발표한 <입삼(立三)노선 - 관문주의와 모험주의 - 의 잔여를 숙청하자>라는 글에서였다. 이 글은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글이다. 그 비판대상은 실제로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이었다. 이 글은 관문주의와 모험주의의 역사적 근원을 분석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관문주의와 모험주의는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한 후, 당내에서 자라났다. 입삼노선시대에 이르러 아주 높은 정도로 발전하고, 4중전회이후 비록 시정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잘못의 나쁜 영향은 현재 당내에 아직도 남아 있다." 여기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이 말에서 비판하는 중점은 입삼노선이 아니라, 6기 4중전회 및 이번 회의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한 "좌"경착오노선이라는 것을. 이는 당의 역사상 사상유례없는 일이다.

1937년 2,3월에 유소기는 계속하여 장문천에게 편지를 써서, 국공양당이 다시 합작하는 신형세하에서, 어떻게 역사의 교훈을 얻어, 다시 "좌"경착오를 범하지 않도록 할 것인지를 말했다. 3월 4일의 서신에서, 유소기는 과거 백구공작에서 얻은 견해를 가지고,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을 심도있고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이 서신은 87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전면적으로 10년내전시기 당내 "좌"경착오의 역사발전과정을 회고하고 분석했다. 그러나 중점은 6기 4중전회의 결점 및 6기 4중전회이후 "중앙이 백구에서의 일"에 집중되었다. 이런 비판의 창끝은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을 겨냥했다. 그는 또한 당의 업무 특히 백구업무를 정확한 궤도로 돌리기 위해, "과거의 잘못은 당내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외에, 유소기는 당의 회의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1937년 5월 16일 거행된 중앙정치국회의에서, 그는 당의 백구공작회의에서 토론할 <백구공작에 관한 보고>를 제출할 준비를 하면서, 설명할 때 명확히 지적한다: 당내에 "좌"경관문주의, 맹동주의, 모험주의의 잘못된 전통이 존재한다. 다음 날, 그는 당의 백구공작회의에서 <백구의 당과 군중공작에 관하여>를 보고할 때 다시 명확히 지적한다: 우리 당내에, 각종 군중공작에서 엄중한 관문주의, 종파주의와 모험주의의 역사전통이 있다.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 전체 당의 동지들에 의해 철저히 까발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땅히 받아야할 치명적인 타격과 숙청을 받지 않았다. 이는 현재 특히 민족통일전선의 건립과 군중의 다수를 쟁취하는 것을 방해한다."

유소기는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한 비판에서 3가지 선명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이 백구공작의 각 분야에서의 표현과 해악을 폭로하고 비판했다. 이런 폭로와 비판은 전면적이고, 심도있으며, 날카로웠으며, 사상유례없는 것이었다. 둘째,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의 사상근원과 역사근원을 심도있게 분석했다. 1937년 3월 4일 장문천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이런 잘못된 사상의 근원은 "한편으로 형세에 대한 잘못된 평가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종의 사상방법, 철학방법상의 잘못이다. 역시 우리의 행동에는 원칙이 있다. 실사구시에 부합해야 하지 않는가. 형세를 평가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어떻게 형세를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는 실제로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의 사상근원이 주관주의와 형식주의에 있다고 본 것이다. 셋째, 가장 먼저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해 "철저히 까발리고, 마땅히 받아야할 치명적인 타격과 숙청을 받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실제로 당내에서 사상정풍의 임무를 제출한 것이다.

유소기는 당시 당내의 지위와 영향력이 비교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의 영향력은 매우 뿌리깊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비판이 지나치게 직접적이고 날카로웠기 때문에, 그의 일련의 이론관점은 당내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대로 일부 간부로부터 불만과 비판을 받는다. 다만 그의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한 비판이 당내에서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한 주목과 사고를 불러일으켰으며, 어느 정도 연안정풍의 이론적 준비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한 비판에서, 유소기는 뛰어난 사상수준과 이론깊이를 보여주었고, 그리하여 전체 당의 주목을 받게 된다.

화북항일근거지와 화중항일근거지를 창건하는데 탁월한 공헌을 하다.

화북항일근거지와 화중항일근거지는 8년항전시기 당이 창건한 2개의 가장 중요한 항일근거지이다. 이 두 개의 항일근거지의 창건에 대하여 유소기는 탁월한 공헌을 한다.

1937년 4월말, 유소기는 화북에서 연안으로 돌아와서, 전후로 당의 전국대표회의와 백구공작회의에 참가한다.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발발한 후, 유소기는 다시 연안을 떠나 화북으로 돌아간다. 7월말에는 산서 태원에 도착한다. 전 북방국서기 고문화(高文華)가 남방으로 전보되었기 때문에, 북방국의 영도기관은 노구교사변(盧溝橋事變)후 적시에 북평에서 철수하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유소기가 북방국의 영도기구를 다시 건설하게 된다. 다시 만든 북방국은 유소기가 서기를 맡고, 양상곤(楊尙昆)이 부서기를 맡는다. 이렇게 하여, 유소기는 화북지구 당의 최고책임자 신분으로 화북의 항일투쟁을 영도하는 중임을 떠맡게 된다.

유소기가 북방국서기를 맡은 쵝, 화북지구의 대일작전은 국민당군의 정규전이 위주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유격전이 화북지구의 항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당의 항전에서의 주요 표현은 유격전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처음부터 유격전을 준비하고 일으키는 것을 화북 각급당조직의 두드러진 임무로 제안했다. 1937년 8월 21일, 그는 중앙에 보내는 보고서에 이렇게 말한다: "간부 및 업무중심을 농촌조직의 유격전쟁에 집중해야 한다." 이 방침에 근거하여, 그는 각각 평진(平津, 북평 즉, 북경과 천진), 하북, 산동, 수원(綏遠)지로 보내 각지방당조직의 업무를 지도했다. 평진등 이미 점령당한 지역에서 그는 명확하게 당조직의 업무중심을 시골에 두고, 도시업무는 농촌업무에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절대다수의 간부와 당원을 농촌으로 보내 유격전을 조직지도하게 했다. 재학생과 노동자들도 농촌으로 내려가 유격대에 참가하도록 했다. 산서등 당시 아직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통일전선공작을 서둘러 진행하도록 요구했고, 군중을 조직하고 동원하여 참전하도록 했으며, 지원병, 자위군등을 조직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서 유격전을 준비했다. 이런 업무는 팔로군의 각 주력부대를 항일전선으로 나가도록 하였고, 신속히 화북 각지에서 전략을 전개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화북항일근거지를 창건하는데 견실한 기초를 닦는다.

유소기는 이론적으로 항일유격전쟁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다. 항전발발후 2달만에, 그는 1937년 10월 16일 <항일유격전쟁중 각종 기본정책문제>라는 소책자를 발표한다. 이는 당내에서 항일유격전쟁에 관한 최초의 계통적인 논저이다. 이 소책자에서, 그는 항일유격전쟁의 중요전략지위를 얘기하며 이렇게 지적한다: "유격전쟁은 화북인민의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주요투쟁방식이 될 것이다." "화북인민의 중심임무는 항일유격전쟁을 널리 조직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유격전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반드시 항일근거지를 건립하고, 항일정부를 조직하여, 항일근거지에서 정확한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소책자는 항일유격전쟁의 전개와 항일근거지 및 항일정권을 연결시켜, 항일근거지의 중요성을 설명했을 뿐아니라, 어떻게 항일근거지와 항일정권을 건립할 것인지에 대한 정책적 지도문건이 된다. 그것은 당시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고, 화북항일근거지의 창건에 이론적으로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된다.

화북항일근거지의 창건은 유소기가 중앙과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재삼 화북지구 공산당은 독립자주적으로 항일유격전쟁을 영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견지하는 것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팔로군이 막 항일전선으로 나가, 산서에서 작전할 때, 유소기는 이런 제안을 한다. 광범위하게 유격전을 준비해야 한다. 팔로군을 수십만명의 강대한 집단군으로 확대해야 하고, 많은 근거지를 건립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독립적으로 화북항전하는 중대한 임무를 부담할 수 있다. 1937년 10월 27일, 그는 당시 중앙대표의 신분으로 산서에서 통일전선업무를 하고 있던 주은래와 상의한 후, 연명으로 팔로군 총정치부, 각사단 정치부와 각 지방당부에 전보를 보내, 그들이 자신이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며, "독립자주적으로 군중을 동원하고 영도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을 통일전선의 지도자로 만들고, 팔고군은 자기를 확대하는데 주력해야 하며, 지방당은 군중을 동원하여 팔로군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여구한다. 11월 15일, 그는 북방국에서 초안한 <현재형세와 화북당의 임무에 관한 결정>에서 태원을 점령당한 후 화북항일전쟁의 신형세에 근거하여 더욱 명확하게 얘기한다: "현재 우리 당은 화북에서 추가적으로 독립, 자주적으로 유격전쟁을 영도해야 한다" "유걱전쟁에서 우리 당은 화북최대정당의 자격으로 통일전선의 민주적 항일정권과 항일무장부대를 건립해야 한다. 각 근거지에 변구정부(邊區政府), 군구사령부를 성립하고, 각 현, 구, 향정부를 개조하고 건립해야 한다." 그리고 팔로군을 수십만명의 총을 가진 집단군으로 확대해야 하고, 적후에서 독립자주적으로 중앙이 영도하는 항일민족통일전선정권을 건립해야 한다. 유소기는 이를 비교적 일찌감치 제시했다. 유소기는 나중에 이 시기의 업무를 회고할 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당시에 발전이 아주 빨랐다. 많은 근거지가 빠르게 건립되었다. 진찰기변구정부(晋察冀邊區政府)는 태원을 점령당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립된다. 객관적인 형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업무도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조그만치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다."

1938년 9월말부터 11월초까지, 확대된 6기 6중전회에서 화북을 공고히 하고, 화중을 발전시키는 방침을 정하게 된다. 회의가 끝난 후, 유소기는 새로 성립된 중원국(中原局)의 서기가 되어, 화중을 발전시키고, 화중항일근거지를 건립하는 중임을 맡게 된다. 이때, 무한은 이미 점령당했고, 일본군은 국민당과의 정면전쟁에서 대규모진격이 일단락된다. 화중의 적후항일유격전쟁을 발전시키고, 항일근거지를 건립하는 가장 좋은 시기는 실제로 이미 지나갔다. 유소기는 화중에 도착한 후, 다시 중원국이 정한 방침인 하남을 중심으로 화중을 발전시킨다는 계획은 팔로군 정규부대가 국민당의 저지로 중원에 진입할 수 없고, 또한 하남은 모두 적의 점령지역이 아니어서, 실현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불가능했다. 그외에, 당시 동남국(東南局)과 신사군(新四軍)의 지도자들은 화중을 발전시키는 방침에 소극적이었다. 그리하여, 화중항일근거지를 개척하고 건립하는 일은 곤란이 겹쳐있었다.

화중발전의 방침을 관철시키기 위해, 유소기는 두 차례에 걸쳐 화중으로 깊이 들어간다. 제1차는 1938년 11월 하순 연안을 떠나, 1939년 1월말 하남(河南) 확산(確山) 죽구진(竹溝鎭)에 도착하여, 중원국 영도기관을 건립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3월하순의 회의로 인하여 연안으로 돌아간다. 제2차는 1939년 9월 다시 연안을 떠나 화중으로 간다. 12월초에는 환동(皖東, 안휘동부) 우당지구(藕塘地區) 신사군 강북지휘부(江北指揮部)에 도착하낟. 그후, 계속하여 중원국(이후에 화중국으로 개칭한다) 서기의 신분으로 화중에 머문다. 1942년 3월에 이르러 연안으로 돌아가 당의 7대에 참석한다. 이 2년여동안, 특히 1940년은 화중항일근거지의 창건과 발전의 관건시기였다. 이 기간동안 유소기는 화중근거지를 건립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다.

첫째, 그는 화중발전의 중점에 대해 정확한 건의를 한다. 화중발전에 대하여, 중앙의 최초 계획은 하남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 다시 신사군 강북지휘부가 있는 환동지구를 중심으로 바꾼다. 유소기는 1939년말에 환동지구에 도착하여 조사연구를 거쳐, 환동지구의 정치, 군사, 경제등 각 방면의조건이 중공의 역량을 크게 발전시키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12월 19일, 그는 중앙서기처와 항영(項英), 팽설풍(彭雪楓)등에게 전보를 보내 이렇게 제안한다: "무한을 점령당하기를 전후하여, 우리는 이미 환동 항일근거지를 건립할 시기를 놓쳤다. 만일 적의 상황과 전국의 국면에 큰 변화가 없다면, 현재 우리는 환동에서 그저 한계있는 발전만을 추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소북(蘇北, 강소 북부)이 발전시킬 희망이 가장 큰 지역이라고 보았다. 화중은 소북을 돌파구로 삼아 역량을 집중하여 소북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건의는 중앙에서 중시하고 채택된다. 사실상 나중의 화중항일근거지는 바로 소북을 중심으로 창건된 것이다.

둘째, 그는 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견지하는 전제하에서, 화중지구의 팔로군과 신사군이 자위(自衛)의 입장에 서도록 영도하고, 국민당 완고파가 일으킨 군사마찰에 대해 확고하게 반격하여, 점차 화중항일근거지의 신국면을 개척한다. 화중항일근거지의 창건은 화북항일근거지와 달랐다. 화북은 국민당부대가 이미 철수하고, 일본군은 병력이 많지 않아, 잠시 신경쓸 수 없는 '진공'지대에 건립하고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화중항일근거지는 일본군, 친일군, 국민당완고파의 3면에서 협공을 받는 와중에 성립시킨 것이다. 그중 ,국민당군의 방해와 공격은 화중항일근거지를 건립하는데 가장 큰 장애였다. 다만 동시에, 유소기는 이것이 중국공산당의 화중항일근거지를 개척하는데 기회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국민당완고파는 이미 반동적인 멍청한 정책을 확정했다; 팔로군, 신사군을 공격한다. 현재의 중심은 신사군을 공격하는 것이다. 완고파가 공격하겠다면, 우리는 들고 일어나 스스로를 지켜야 하고, 그들을 소멸시켜야 한다. " 그의 영도와 배치하에 화중지구의 신사군과 팔로군부대는 전후로 반탑집보위전(半塔集保衛戰), 곽촌보위전(郭村保衛戰), 황교보위전(黃橋保衛戰)등 중요전투를 진행한다. 그렇게 화중항일근거지는 계속 확대되었다. 특히 1940년 9, 10월의 황교보위전은 소북국민당군 한덕근(韓德勤)의 주력부대 1만여명을 섬멸했고, 팔로군남하부대와 신ㄴ사군강북부대의 회합에 성공을 거둔다. 그리하여, 소북항일근거지를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었고, 화북항일근거지공작은 결정적인 성공을 거둔다.

셋째, 환남사변(皖南事變)이 발생한 후, 중앙과 모택동에 정치적으로 공세를 취하고, 군사적으로 수세를 취할 것을 정확하게 건의한다. 이를 통해 불리한 요소를 유리한 요소로 바꾸었고, 화중항일근거지와 신사군은 더욱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1941년 1월, 국민당군대는 안휘 경현(涇縣) 무림지구(茂林地區)에서 북상하여 이동하는 중인 신사군지휘부와 직속부대 9천여명에 대해 기습을 감행하여, 신사군의 군장(軍長) 섭정(葉挺)이 체포되고, 정치위원 항영(項英)이 전사한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희생당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흩어져버린다. 신사군은 이로 인해 중대한 손실을 입고, 극히 심각한 반공사건을 조성하게 된다. 환남사변이 발생한 후, 중앙은 극도로 분개하여, 처음에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국민당에 전면적인 대반격을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유소기는 이해관계를 따져본 후에, 중앙과 모택동에 이렇게 건의한다: "전국에서 주로 정치적 전면대반격을 실행하지만, 군사적으로는 개별지구외에 잠시 반격을 진행하지 않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중앙과 모택동에게 받아들여진다. 이 건의는 신사군을 피동적인 입장에서 주도적인 입장으로 바꾸게 해주었고, 환남사변으로 일부 손실을 입은 후, 더욱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환남사변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은 다시 유소기의 건의를 받아, 1월 20일 신사군 군사지휘부를 재건하고, 진의(陳毅)를 대리군장에 임명하고, 유소기를 정치위원에 임명한다. 얼마 후에 다시 명령을 내려, 신사군을 7개사단으로 편성한다. 이렇게 하여, 신사군의 역량은 증강되었고, 화중항일근거지는 더욱 견실한 기초를 닦게 된다.

유소기는 화중항일근거지를 창건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했고, 당내와 팔로군, 신사군내에서의 명망을 끌어올린다. 1941년 1월 25일, 진의는 신사군 군사지휘부재건대회에서 유소기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유소기 동지는 우리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중 한 분이다." "항전후, 그는 화북으로 가서 화북항일운동이 크게 발전시켰다. 환동북에 와서 그는 마찬가지로 크게 국면을 개척했다. 소북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우리를 지도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신사군은 직접 중앙과 유소기 동지의 영도하에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이 말은 실제로 당시 당내 고위간부와 고위군사장군들의 유소기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고 인정이었다. 이런 보편적인 인정은 유소기가 중앙핵심층으로 진입하는데 견실한 기초가 된다.

모택동의 선택이었을 뿐아니라, 전체 당의 공동 선택이었다.

1936년초, 명을 받아 중앙대표의 신분으로 북방국의 공작을 영도하면서부터 유소기의 사상수준, 영도능력, 공작성적은 당내에서 계속하여 인정받고 찬양받는다.

항전발발후, 유소기는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을 비판하여 모택동으로부터 주목을 받는다. 1937년 5,6월에 개최된 당의 백구공작회의에서 유소기는 왕명의 "좌"경착오노선에 대한 비판을 하였고, 이는 일부 간부의 불만과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모택동으로부터 인정받고 지지받는다. 6월 3일의 중앙정치국회의에서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소기는 이 문제(백구공작을 가리킴)에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일생동안 실제업무에서 군중투쟁을 영도하고 당내문제를 처리했으며, 모두 기본적으로 정확했다. 그는 실제공작의 변증법을 알고 있다. 그는 계통적으로 당의 과거 이 문제에서 피해를 입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정곡을 찌르는 의사이다." 이 말은 무게가 있고, 유소기를 높이 평가한 말이다. 그것은 모택동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당은 유소기를 괄목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전발발후, 유소기는 화북당의 공작을 영도하면서, 독립자주적으로 항일유격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장했고, 왕명등으로부터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장을 견지했다. 왕명이 제기한 "일체경과(一切經過)항일민족통일전선"(일체를 항일림녹통일전선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을 제출한데 대하여 유소기는 이렇게 반박했다: 일체경과라는 구호는 반드시 구체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일체경과를 장개석과 염석산의 말대로 하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모택동은 유소기의 그런 견해에 동의하고 지지했다. 그는 6기 6중전회에서 왕명의 "일체경과통일전선" 주장을 비판할 때, 유소기의 이 말을 인용한다. 그는 말했다: "유소기 동지가 한 말이 맞다. 만일 소위 '일체경과는 장개석과 염석산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일방적인 복종이지, 소위 '통일전선'은 아닌 것이다."

항전발발후, 당의 일부 중요고위간부와 고위군사장군들도 각 방면에서 유소기의 사상수준과 영도능력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화북항일근거지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팔로군부총사령관 팽덕회(彭德懷)는 "유소기 동지는 백구도시공작의 경험이 있을 뿐아니라, 그는 농촌의 적후전장도 잘 알고 있다"고 발견한다. 화중항일근거지의 창건을 통하여, 진의도 유소기를 아주 높이 평가하게 된다. 당내 고위간부 특히 고위장군들은 유소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가 중공중앙핵심영도층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었다.

환남사변후, 유소기의 당내지위는 명확하게 변화한다. 당시 중앙은 1941년 5월 1일 7대를 개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소기는 회의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강연을 하도록 안배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그런 안배가 없었다. 1939년 8월, 중앙은 7대 일정을 토론할 때, 단지 모택동이 정치보고를 하고, 주은래가 부보고(副報告) 즉 통일전선을 보고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 7대는 1941년 5월 1일 개최되지 못했지만, 7대에 유소기의 강연을 일정에 넣었다는 것은 그의 당내에서의 역할과 영향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당내에서는 유소기의 사상수준과 영도능력에 대하여 비교적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1941년 9월에 개최된 중앙정치국정풍회의이다. 이번 회의는 당내에서 왕명의 "좌"경기회주의영향을 숙청하는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동시에 유소기의 당내영도지위변화도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회의에서, 중공지도층은 10년내전후기 왕명의 "좌"경교조주의와 우경착오노선의 성격, 근원과 위해에 대해 기본적으로 일치된 인식을 가졌다. 유소기는 이 문제에서의 정확성도 두드러졌다. 진운(陳雲), 임필시(任弼時), 강생(康生)을 포함한 적지 않은 회의참석자들은 모두 유소기의 사상수준과 영도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중,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조직부장 진운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 10년 백구공작에서의 주관주의는 유소기, 유효(劉曉)동지가 백구로 가서 공작한 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유소기 동지는 과거의 백구공작노선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고, 지금 되돌아보니, 유소기 동지는 과거 10년동안 백구공작의 정확한 노선을 대표해왔다." 그리하여, 그는 일부 간부의 위치가 부적절하니 바로 잡아야 겠다고 말하고, 예를 들어 유소기 동지의 지위를 높여야 한다고 했다. 이번 회의상황을 보면, 유소기의 연안시기의 지위변화를 알 수 있고, 그것은 당내의 공통된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소기가 중앙핵심지도층에 들어간 것은 모택동의 선택만이 아니라, 전체 당의 공동선택인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모택동이 유소기에 대해 직접적으로 평가하지 않았지만, 진운의 발언은 확실히 그의 견해를 반영하고 대표한다. 회의 후, 모택동은 5만여자의 왕명의 "좌"경착오노선 9개문건을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썼고, 여러번 진운과 유사한 견해를 표시했다. 예를 들어, "우리 당의 국민당구역공작에서, 유소기 동지와 같이 정확한 지도인물이 있을 뿐아니라, 그와 유사한 적지 않은 동지들이 있다. 아쉽게도 이들은 모두 중앙에서 '기회주의자'로 배척되었다." "유소기 동지의 견해가 진리인 것은 당시의 직접사실로 증명될 뿐아니라, 전체 '좌경기회주의노선집행시기의 모든 결과도 이를 증명한다'"등등.

중앙정치국 9월회의이후, 유소기의 당내지위가 제고된 것은 이미 확정적이었다. 회의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모택동은 여러번 유소기에게 전보를 보내, 그로 하여금 7대에 참가하고, 7대후에는 연안에서 휴양하며 화중을 지휘하기를 희망했다. 그중 10월 11일 전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연안으로 와서 화중을 지휘하면, 화중공작에는 큰 손실이 없겠지만, 당신의 신체는 휴식할 수 있어서 크게 이익이 될 것이다." 유소기가 연안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모택동은 자주 유소기의 안보문제를 물었고, 그에 대한 관심을 많이 표명했다. 1942년말 유소기가 연안으로 돌아온 후, 3개월도 되지 않은 시간에, 중앙지도기구는 개조에 들어간다. 유소기는 중앙서기처에 들어갔고, 당내지위는 모택동의 바로 다음가는 2인자에 오른다.

刘少奇何以崛起于延安(彭厚文) - 今日头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