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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유비(劉備)가 놓친 4명의 맹장(猛將)

by 중은우시 2022. 1. 4.

작자: 미상

 

동한말기, 유비는 무장으로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 위연등 맹장이 있었고, 문관으로 제갈량, 방통, 법정등 모사가 있었다. 이들은 촉한을 건립하는데 중요한 역량이었다. 그리하여, 조조, 손권등 두 제후와 마찬가지로, 유비의 휘하에도 인재들이 많았다. 그러나, 유비의 일생에서 적지 않은 인재들을 놓쳤다. 필자가 오늘 얘기할 것은 4명의 맹장이다. 이들은 모두 촉한을 위해 일하지 않았으니, 후세인들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1. 전예(田豫)

 

전예(171년-252년), 자는 국양(國讓), 어양(漁陽) 옹노(雍奴)사람(지금의 천진시 무청구). 출생지로 보면 전예와 유비는 모두 유주(幽州) 출신이다. 그러므로, 동한 말기, 전예는 처음에 유비의 곁을 따랐다. 그러나, 모친이 나이가 많아 항상 돌봐줘야 해서 전예는 유비의 곁을 떠난다. 나중에 중원을 축록할 때, 전예는 처음에 공손찬(公孫瓚)의 휘하에서 일한다. 199년에 이르러, 원소가 공손찬을 격패시킨다. 전예는 원소에 투항하기를 원치 않아, 그는 선우보(鮮于輔)등을 설득하여 함께 조조에 의탁한다.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전예는 정식으로 조조에 기용된다. 영음령(潁陰令), 낭릉령(郞陵令), 과양태수(戈陽太守)등의 직을 지낸다. 나중에 전예는 조위의 북방영토를 지켰다. 대군의 오환을 정벌하고, 골진(骨進)을 참하고, 가비능(軻比能)을 격파할 때 모두 공을 세운다. 동오와의 전투에도 참전한다. 성산(成山)에서 주하(周賀)를 참살하고, 신성(新城)에서 손권을 격퇴시킨다. 이를 통해 조위에서의 관직이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오르고 장락정후(長樂亭侯)에 봉해진다.

 

2. 견초(牽招)

 

<삼국지>등 사료에 따르면, 견초(? - 231년)는 자가 자경(子經)이고 안평군(安平郡) 관진현(觀津縣) 사람이다(지금의 하북성 무읍현). 견초는 일찌기 악은(樂隱)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비와는 문경지교(刎頸之交)이다. 다만 견초는 전예와 마찬가지로 유비의 곁을 오래 따르지 못한다. 견초는 기주목(冀州牧) 원소에게 의탁한 후 기주에서 일하면서 오환돌기(烏桓突騎)를 지휘한다. 202년, 원소가 죽은 후, 견초는 기주자사 원상을 따른다. 그러나 조조대군이 업성을 포위할 때, 견초는 병주목(幷州牧) 고간(高干)에게 해를 입는다. 그리하여 그는 어쩔 수 없이 승상 조조에 투신하게 되고, 그후 조조는 그에게 군모연(軍謀掾)을 내린다.

 

그후 견초는 오환을 평정하고 오환교위(烏桓校尉)가 된다. 한중을 평정하고 중호군(中護軍)이 되며 평로교위(平虜校尉)가 된다. 나중에 동래군의 반란을 평정한다. 위문제 조비때 호선비교위(護鮮卑校尉)가 되어 창평에 주둔한다. 나중에 우중랑장(右中郞將), 안문태수(雁門太守)가 되어 선비족 가비능의 세력확장을 막았다. 위명제가 즉위한 후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고, 호오환교위 전예를 구해준다. 태화5년 견초는 사망한다. 전예와 마찬가지로, 견초는 장기간 조위의 북방을 지켰다. 그리하여 전예와 견초는 촉한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지명도가 비교적 낮은 편이다.

 

3. 태사자(太史慈)

 

태사자(166-206), 자는 자의(子義), 동래황현(東萊黃縣) 사람(지금의 산동성 용구동황성집). 동한말기의 명장. 관직은 건창도위(建昌都尉)에 이른다. 태사자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고, 황건군이 공융(孔融)을 포위했을 때, 태사자는 지원을 받기 위해 유비의 휘하로 온다. 유비와 태사자는 서로 힘을 합했을 뿐아니라, 성공적으로 공융을 구해낸다. 다만, 유비가 나중에 서주로 갈 때, 태사자는 양주로 간다. 거기서 양주목(揚州牧) 유요(劉繇)의 휘하에 들어간다.

 

손책과 유요의 전투때 태사자는 손책에 투항한다. 그 이후 태사자는 강동 손씨의 맹장중 하나가 된다. 예를 들어,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태사자는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200년, 손책이 자객의 기습을 받고 얼마 후 사망한다. 손권이 강동의 권력을 장악한 후, 태사자는 유반(劉磐)을 견제할 수 있었기 대문에, 손권은 그에게 양주남부의 업무를 위임한다.

 

건안11년(206년), 태사자는 사망한다.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칠척의 검을 쥐고 천자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오늘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말을 마치고 죽으니 나이 마흔 하나였다.

 

4. 장임(張任)

 

장임은 비교적 격이 낮은 세가(世家)에서 태어난다. 어려서 용맹하며 행동이 바른 사람이었다. 익주목 유장의 밑에서 일한다. 건안17년(212년)말, 유비가 익주를 빼앗기 위해 유장을 공격하여, 부현(涪縣)을 점거한다. 건안18년(213년), 유장은 유괴(劉璝), 냉포(冷苞), 장임, 등현(鄧賢), 오의(吳懿)등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유비를 막게 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격패당하고, 장임등은 면죽(綿竹)으로 물러난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패배했다는 말을 듣고 유장은 이엄(李嚴)을 호군으로 삼아 장임등 면죽으로 물러난 각로군대를 통합하여 지휘하게 한다. 다만 유장이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 이엄은 스스로 유비에 투항한 것이다. 그리하여 면죽이 함락된다. 계속 압박해오는 유비를 맞아 장임등은 계속 물러나고,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과 함께 낙성(雒城)을 지킨다. 유비의 군대가 낙성을 포위했고, 장임은 병사를 이끌고 성을 나서 안교(雁橋)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전하고 포로로 잡힌다. 

 

주의할 점은 유비가 장임의 충용을 높이 샀다는 것이다. 장임에게 투항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장임은 이를 거절한다. 어쩔 수 없이 유비는 장임을 죽이고 탄식한다. 필자가 보기에 장임같은 맹장의 귀순을 받아냈다면 촉한의 무장집단은 호랑이에 날개를 달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유비는 일생동안 최소한 전예, 견초, 태사자, 장임같은 네 명의 맹장을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