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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왕치산(王岐山): 국민당장교의 아들인 그는 어떻게 태자당이 되었나?

by 중은우시 2024. 10. 20.

글: 두정(杜政)

10월 12일, 대륙의 대외선(大外宣)기능을 지닌 홍콩화통사(和通社)는 전 국가부주석 왕치산이 체포되었고, 그의 애인인 판빙빙은 미국에 7천여억달러의 예금을 가지고 있다고 폭로했다. 또한 왕치산의 처남으로 전 중공부총리, 정치국상이 야오이린(姚依林)의 아들 야오칭(姚慶)이 2년전에 체포되었고, 왕치산의 몰수된 자산이 수조위안에 달한다는 등등의 내용도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화통사는 유엔경제사회국(UNDESA) 글로벌포럼 대변인사무실의 대외관방매체로 나온다. 그리고 그 산하의 <아주신문주간>은 "홍콩화통사가 주관하는 아시아에서 영향력이 아주 큰 저명한 매체로 전국양회를 취재하는 정기간행물"이라고 되어 있다.

이 웹사이트의 내용은 친중국으로 '시진핑경제사상'를 치켜세추고, 중공의 전국'양회'를 보도하는 등등으로 중공의 대외선전기능을 갖고 있다. 핵심인물은 고문 류하오펑(劉浩峰)이다. 바이두의 자료를 보면, 류하오펑은 후난(湖南)사람으로 시인, 작가, 사상가, 예술가라고 한다. 그리고 중국문련 <중국문예가>잡지에서 소위 중화문화부흥이론의 기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웹사이트는 보기에 조잡하고, 정규적이지 못하다. 다만 일찌기 이 웹사이트에서는 시진핑의 군대내 대비(大秘, 비서실장) 종샤오쥔(鍾紹軍)이 중앙군사위판공청주임에서 국방대학정위로 전보되었다는 소식을 독점으로 보도했다. 당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내용이었고, 다만 중앙군사위판공청주임의 교체동향은 있었다. 이 웹사이트는 일찌기 10월 1일 후난 샤오양공안국장이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도 처음 보도했고, 이 사건은 대륙에서 보도금지된 내용이다. 이를 보면 이 웹사이트의 핵심인물은 베이징 중남해에 배후인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왕치산에 관한 폭로사항을 보면 너무나 과장되어 있어 필자도 그다지 믿기지 않는다. 다만 이런 류의 소식이 중공의 대외선 사이트에 올라왔고, 지금까지 삭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심상치 않다.

과거 홍콩 혹은 해외 기타 지구의 중공 대외선전매체는 당내 서로 다른 파벌세력이 통제하고 있어서, 수시로 내부투쟁소식을 흘리곤 했다. 지금 중국관료사회의 상층부는 모조리 시자쥔(習家軍)이고, 화통사의 배후는 아마도 시자쥔의 어느 계파일 것이다. 예를 들어 선전을 주관하는 차이치(蔡奇)와 공안부를 관장하는 왕샤오홍(王小洪)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푸젠방(福建幇)에 속한다. 혹은 국안부 부장 천이신(陳一新)이 소재한 저장방(浙江幇)일 수도 있고, 혹은 당금 반부패업무를 주관하는 리시(李希)일 수도 있다.

누가 이런 자료를 제공했던지간에 모두 현재 왕치산의 처지가 좋지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진핑의 첫번째 임기때 타호대장(打虎大將)이었던 왕치산은 2917년 19대때 중앙위원회를 물러나고, 다음 해에 국가부주석의 한직을 맡았으며, 2023년 3월에 물러났다.

왕치산의 옛부하들 여럿은 전후로 시진핑에 의해 낙마된다. 거기에는 왕치산이 중국건설은행에 있을 때 재무총감으로, 중국인민은행부행장으로 있던 판이페이(范一飛)도 포함된다. 금년 9월 10일, 사형집행유예판결을 받았고, 4억위안에 가까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한다. 왕치산의 전 대비(비서실장)이자, 중국초상은행 전행장 텐후이위(田惠宇)는 5억위안의 부정부패로 역시 사형집행유예판결을 받았다. 왕치산의 또 다른 전비서이자 중앙순시조 부조장이었던 동홍(董宏)은 4.6억위안의 부정부패혐의로 역시 사형집행유예판결을 받는다. 그외에 왕치산의 가까운 친구이며, 같은 홍얼다이인 부동산기업가 런즈창(任志强)은 시진핑을 비판하였다가 부정부패혐의로 유기징역18년형을 받는다.

이런 말이 있다. 개를 때리려면 주인의 얼굴을 봐야 한다고. 이런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시진핑과 왕치산의 관계가 이미 결렬되었다는 것이다.

금년의 국경절 리셉션에서, 왕치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내내 전혀 웃는 얼궁을 보이지 않았고, 입장할 때도 다른 원로들은 시진핑을 따라 박수를 쳤으나, 오직 왕치산만이 박수를 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이 친중국의 홍콩화통사는 웹사이트에서 공개적으로 왕치산에게 불리한 자료를 폭로했다. 아마도 왕치산이 유례없는 타격을 받고 있으며, 연금되었다는 말등이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닌 것같다. 폭로의 진위는 또 다른 문제이다. 중국 관료사회에 누가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겠는가. 그저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시진핑과 왕치산이 밀접하게 교류한 것은 50년이 되었고, 은원이 얽혀 있다. 출신을 따지는 중국에서 두 사람의 가정배경은 정반대이다.

왕치산은 중공에서 가장 꺼려하는 가정배경을 가지고 있다. 중공건정후 숙청된 국민당반동파 군관의 아들인 것이다.

왕치산의 조적은 산서(山西) 대동시(大同市) 천진현(天鎭縣)이고, 1948년 7월 19일 산동성 청도에서 태어난다. 부친 왕덕정(王德政)은 1907년(청나라 광서33년)에 태어났고, 민국18년(1929년), 청화대학 토목과에 입학한다. 민국22년(1933년), 왕덕정은 청화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민국24년(1935년), 청도공무국으로 가서 기좌(技佐) 겸 하수도공구 주임이 된다.

몇년후 항일전쟁이 발발하고, 왕덕정은 산동 평도(平度)로 가서 교사가 된다. 당시 산동은 항일운동이 활발했고, 왕덕정은 국민당의 상위(上尉)계급의 군관이 되고 녹봉을 받는다.

1946녀년 6월, 청도가 공산당의 손에 들어가고, 왕덕정은 중공에 의해 그 자리에 유임된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중공은 대거 "토지개혁" "진반", "삼반", "오반"의 정치운동을 벌인다. 왕덕정은 국민당군관을 지낸 경력으로 가산을 몰수당하고, 많은 물건을 빼앗긴다. 이때부터 일가족은 바닥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문혁이 발발한 후, 왕덕정은 국민당군관을 지낸 경력으로 인하여 다시 조반파에 의해 '비판'받는다. 왕덕정은 비투를 받는 외에, 직장에서 청소도 도맡아서 하게 된다. 이 경력은 왕치산의 성장과정에 낙인으로 찍혀있게 된다.

왕치산은 1969년 섬서(陝西) 연안(延安)의 풍장(馮莊)에서 2년간 삽대노동(揷隊勞動, 삽대는 농촌생산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함)하게 된다. 왕치산은 중공원로 야오이린의 아들 야오밍웨이(姚明偉)와 중고등학교 동창이기때문에, 왕치산은 야오밍웨이의 여동생 야오밍산(姚明珊)을 알게 되고, 야오밍산은 왕치산을 따라 2년간 삽대노동하게 되고, 나중에 부부로 맺어진다.

1982년, 야오이린은 중공중앙 정치국후보위원이 되고, 중공중앙서기처에 들어간다. 왕치산도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에 들어가 일하게 된다. 그는 1980년대 개혁을 주장하여 유명해진다. 소위 경성의 "개혁사군자"중 한명이 된다. "사군자"는 웡용시(翁永曦), 왕치산, 황장난(黃江南), 주자밍(朱嘉明)을 가리킨다.

국민당가정출신의 왕치산은 중공원로이자 관직이 국무원부총리에 이른 야오이린의 딸과 결혼하면서 장인의 배경과 보살핌으로 관직이 계속 올라간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원래 국민당군과의 아들이었던 그는 중공태자당에 속하게 된다.

여러해가 지난 후, 왕치산은 이미 중공가 원한이 있는 국민당군관의 아들에서 중공의 권력귀족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섬서에서 지식청년으로 있던 시기, 왕치산은 같이 연안에 삽대노동왔떤 시진핑과도 막역한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은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잤다고 말한다.

시진핑이 취임한 후, 선택적인 반부패운동을 벌이게 되고, 왕치산은 시진핑의 타호대장이 된다. 시진핑의 첫임기떄 리커창(李克强)과 합하여 시리신정(習李新政)이라고 부르던 말은 바로 사라지고, 관료사회에서는 "시왕체제(習王體制)이라는 말이 대체하게 된다.

왕치산은 정적을 청산하기 위해, 장쩌민파의 고위관료를 대거 붙잡는다. 심지어 가장 부패한 것으로 항간에 소문이 나 있던 장쩌민과 쩡칭홍까지 압박한다. 장쩌민은 부패의 총감독으로 불렸다. 왕치산은 여러번 거의 직도황룡하여 장쩌민, 쩡칭홍을 체포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모두 퇴각한 바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시진핑은 보당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장쩌민, 쩡칭홍과 거래를 했다고 한다.

2017년 중공19대에서, 유임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았던 왕치산은 정치국상위와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의 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2018년 3월 왕치산은 1998년이래 최초로 아무런 당내직위가 없는 국가부주석에 오른다.

2017년 6월 20일, 미국으로 망명한 부호 궈원꾸이(郭文貴)는 이렇게 폭로한다. 왕치산의 처와 여동생 그리고 양녀는 미국이 14채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동서해안에 모두 걸쳐 있고, 총가치는 2,318만달러에 달한다. 그중 5채는 야오밍산 자매가 소유하고 있다. 궈원꾸이의 폭로에서, 일부 여자연예인도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화통사의 최근 폭로와도 서로 연결된다.

최근 들어, 왕치산의 옛부하들이 연이어 낙마하면서, 왕치산과 시진핑의 관계는 이미 크게 변했다.

왕치산이 국가부주석으로 있던 기간동은 여러번 공개적으로 원망의 말을 내뱉은 적이 있다. 2019년 1월 23일의 세계경제포럼 연도회의에서 왕치산은 중공의 관례에 따라 당국이 준비한 강연원고를 읽었다. 그리고 보기 드물게 이렇게 자조했다: "원고를 읽는 사람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다 읽기만 하면 된다."

2019년 7월 1일 왕치산은 중남해에서 멕시코 외무장관 에브라드를 접견할 때, 그는 다시 자신의 업무성격은 '약간의 의례적인 외교를 하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2021년 4월 20일, 왕치산은 보아오아시아포럼 개막식에서, 자신은 "임시주최자"이고, 그저 시진핑의 치사를 읽기위해서라고 말했다.

당연히 나중에 왕치산은 부득이 시진핑에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겉으로는 시진핑의 공덕을 칭송했다. 2021년 전국양회에서, 왕치산은 후난대표단회의에 참가하여 최소한 8번 시진핑을 언급한다. 그리고 시진핑과의 고도일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2년 양회에서, 왕치산은 다시 후난대표단 회의에서 시진핑의 핵심지위을 확립하는 것이 중공의 최대한의 자신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편(黨鞭)의 자리에서 내려와 시진핑에게 얻어맞고 있는 왕치산이 마음 속으로는 불복하고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일이라면, 왕치산이 1973년 일찌기 공농병학생의 신분으로 서북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하여 3년간 재직학습한 바 있다. 1979년 중국사회과학원에서는 근대사연구소 민국사실에서 실습연구원으로 3년간 지냈다.

중공의 체제내에서 다시 쓰여진 민국사는 대폭 수정되었다. 다만 왕치산은 중공개혁개방초기 민국사를 3년간 연구했고, 당시에는 아마 관련연구가 약간 개방되어, 그는 어느 정도 수확을 얻었을 것이다. 왕치산은 중화민국사에 대하여 부친의 국민당군관으로서의 역사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 사람들은 그것을 얘기한 적은 없다. 아마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는 민주공화에 대한 생각을 그저 마음 속에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극좌의 말을 하면서.

현재로 되돌아오면, 시진핑은 통일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고, 양안의 위기는 점차 높아지고 있으며, 대만해협은 전쟁의 기운이 퍼져 있다. 중화민국은 이로 인하여 다시 한번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점은 북경당국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그들은 당의 고착화되고 이기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하여 역사진상에 부합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대만의 중화민국총통 라이칭더(賴淸德)는 최근 조국론을 내놓았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75주년과 중화민국의 성립113주년을 비교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절대로 중화민국인민의 조국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중화민국은 아마도 중화인민공화국의 75세 이상의 민중들의 조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뜻은 1949년 10월 1일 중공건정이전의 중국인민은 모두 중화민국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민주운동의 지도자 쉬원리(徐文立)은 최근 라이칭더와 대만입법원장 한궈위(韓國瑜)에게 공개서신을 발표하여, 1949년 10월 1일 이전에 출생하고 '중화민국'을 인정하는 중국대륙민중들에게 '중화민국특정여권'을 신청할 권리를 부여하여 양안간의 충돌을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비록 이 제안이 발표된 후 그 실행가능성에 대한 의문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필자는 이 제안이 최소한 중화민국유민들이 근본을 잃지 않도록 일깨우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당시 중화민국의 성립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었고, 또한 중국 5천년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중 하나였다.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제2차국공내전말기, 중국국민당 및 그 영도하의 중화민국정부는 중국대륙에서 대만으로 물러났다. 마치 중국역사사의 의관남도(衣冠南渡), 송실남도(宋室南渡), 명조남도(明朝南渡)처럼. 오늘날까지 중화민국은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고, 법통은 바뀌지 않았다.

당시 대만으로 옮겨오면서, 대만군의 주력부대외에 많은 평민들도 대만군을 따라 떠났다. 다만 어쨌든 더 많은 살마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대륙에 남았다.

1949년이후 중국대륙에 남은 중화민국유민은 중공이 선전하는 "국민당반동파"가 되어, 문서상으로 '반동대속(反動臺屬)"이 되었다. 문혁이 끝나기전까지 근 30년동안, 그들의 출신성분으로 정치천민으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중공건정후, 모택동은 소위 반혁명진압운동을 벌인다. 약칭하여 진반운동이라고 한다. 진압대상은 바로 대만정부와 국민당이 대륙에 남겨둔 인사들이다. 1954년의 통계에 따르면, 진반운동때 중공은 모두 260여만명을 체포하고, 130여만명을 감금했으며, 71.3만명을 처형했다. 외부에서는 100-200만명이 처형되었을 것으로 본다.

설사 요행으로 진반운동때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왕치산의 부친 왕덕정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은 문혁때 서로 정도는 다르지만 타격을 받게 된다.

다행히 생존한 중화민국유민이라면 왕치산처럼 중공건정전에 출생한 국민당2세대이다.

왕치산은 1948년 7월 19일 산동 청도에서 출생했다. 라이칭더 총통의 나이론으로 따지면 왕치산도 중화민국 국민이다. 특히 왕치산의 부친은 국민당군관신분이다. 쉬원리의 제안대로라면 왕치산은 "중화민국특정여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기실 최근 사망한 중공 전정치국상위 우방궈(1941년생)의 부친도 국만당계이다. 우방궈의 부친 오충성(吳忠性)은 일찌기 국민당 군사기관학교의 과실주임 겸 주임교관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하여 오충서은 문혁기간 3개월간 두들겨 맞았고, 모친은 비투과정에서 사망했다. 자신의 늑골도 하나 부러진다.

우방궈, 왕치산처럼 극소수의 중화민국유민은 자신의 관계를 가지고 스스로의 색깔을 붉게 칠해서, 중공권력귀족의 일원이 되었고, 최종적으로 중공독재기구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우방궈는 생전에 권력투쟁과정에서 평온하게 살아남고, 사후에도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왕치산은 현재 사상유례없는 타격을 받고 있다. 왕치산이 만일 대만으로 도망친다면, 분명 국제적 대사건이 될 것이다. 다만, '중화민국특정여권'은 그저 말 뿐이다. 왕치산 본인도 무슨 반공의식은 없다. 그저 진성감옥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설사 인신자유가 제한되더라도, 원로급의 생활수준은 유지할 수 있ㅇ르 것이고, 그는 아마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가 받은 타격은 국민당군관의 아들이라는 출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중공의 잔혹한 내부투쟁의 일부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