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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전백찬(翦伯贊) 자살의 진상

by 중은우시 2025. 3. 20.

글: 장이화(章詒和)

1952년, 대학교 조정과정에서, 정천정(鄭天挺)이 남개대학(南開大學)으로 옮겨갔고, 청화대학(淸華大學) 역사학과의 최원로교수인 뇌해종(雷海宗) 교수도 남개대학으로 옮겨갔다. 정천정을 대신하여 북경대학(北京大學) 역사학과 주임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전백찬(翦伯贊)이었다.

전백찬의 오랜 친구인 부친(章伯鈞)은 매우 기뻐했다. 다만 동시에 정천정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면서 모친(李健生)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천정은 20년대부터 북경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30년대에는 북경대학 비서장(秘書長)을 지낸다. 항전승리때도 역시 북경대학 비서장이었으며 사학과 주임도 겸직하고 있었다. 사학의 실력은 전백찬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남개대학의 학술환경이 어찌 북경대학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연구한 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역사학이 아니다보니 자리를 자연스럽게 전백찬에게 내주게 되었구나!"

정천정이 떠나자, 전백찬이 북경대학에 부임했다. 부임초기, 자신이 3부분(胡適의 사람들, 蔣廷黻의 사람들, 洪業의 사람들)으로 구성된 북경대학 역사학과의 교수진을 잘 이끌지 못할까봐 우려했었다. 다만 전백찬은 통일전선의 고수였고, 조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했다. 금방 학과내의 업무가 정상궤도에 오른다. 모두가 함께 잘 지냈다. 다시 말해서, 그들중 누가 교수의 밥그릇을 지키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전백찬의 행정관리업무는 순조로운 편이었다. 노(老), 중(中), 청(靑)을 막론하고 그는 잘 지냈다. 다만 수업방면에서는 북대의 원래 교수들과의 사이에 의견차이를 보였다. 1952년 가을, 학과내의 토론은 어떻게 중국고대사교재를 편찬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중국사강(中國史綱)>의 틀 내에서 편찬할 것을 주장했다. 여하한 왕조라 하더라도 먼저 경제기초를 얘기한 후, 다시 상층구조를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층구조분야에서는 먼저 정치를 얘기하고, 다시 군사, 과기, 문화를 얘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교수들은 마음 속으로 그에 반대하고 있었다.

광범위하고 굴곡이 많은 역사의 강을 크고 거친 한줄기의 사회발전선으로 잡아당기다보니, 그 수업효과가 어떠할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친구이자, 50년대에 북경대 역사학과에서 공부한 조여사(曹女士)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교수가 중국고대사를 강의하면, 항상 경제기초, 계급투쟁, 농민의거였다. 문화를 강의하는 것은 아주 적었고, 심지어 아예 강의하지 않기도 했다."

1962년 뇌해종이 사망한다. 그 소식이 들려오자, 뇌선생의 강의를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했다. 학관중서(學貫中西), 박대정심(博大精深)의 "우파"교수는 동시에 '서양근고사', '서양문화사' '중국상주사' '중국진한사' '사학방법'등 4,5개 과목을 개설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한번도 수업준비를 하지 않았고, 수업방법을 연구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얘기하고 싶은 주제를 얘기하는 '우파'교수였다. 자석이 쇠를 끌어당기는 역량으로 무수한 청년학자와 학생들을 끌어당겼다. 학문이 뛰어나고, 경력도 많은 동료교수 유숭횡(劉崇鈜)도 그를 매우 존경하며, 그를 '대학문가(大學問家)'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뇌선생의 수업을 잘 들어라. 그가 강의하는 역사과목은 철학적인 의미가 있다. 나는 그 정도로 할 수 없다."

"우파"로 규정된 뇌해종은 나중에 <역사교학(歷史敎學)>에 일부 강의에 참고할 글을 발표했을 뿐이었다. 사망하던 해에 그의 나이는 겨우 오십이었다.

몇년후 '문혁'이 발발했다. 도화선은 사학가인 오함(吳唅)의 경극 <해서파관(海瑞罷官)>으로 불이 붙여진다.

불꽃이 일자 전백찬은 자세한 배경을 알지도 못한 채 오함을 변호했다. 그는 인터뷰하러 온 <문회보(文匯報)> 기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요문원(姚文元)의 비판글은 견강부회이고, 태도는 극히 폭력적이다. 이는 완전히 오함에 대한 모욕이자 모함이다."

"잎이 하나 떨어지면, 해가 끝나갈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병속의 물이 언 것을 보면, 천하가 추워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사학가인 전백찬은 모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섭원재(聶元梓)의 대자보로 '문화대혁명'의 호각을 울린다. 북경대학 역사학과에서 가장 먼저 끌려나와, 비판투쟁을 받은 사람이 바로 전백찬이었다. 죄명은 "흑방분자(黑幇分子)"와 "반동권위(反動權威)"라는 것이었다.

향달(向達), 소순정(邵循正), 주일량(周一良), 등광명(鄧廣銘), 양인편(楊人楩)등도 모조리 "우귀사신(牛鬼蛇神)"으로 몰려 우붕(牛棚)에 들어간다. 향달은 '우파'로 전과가 있는 셈이니, 받은 죄와 처벌이 가장 많았다. 그는 일찌감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가족들에게 당부했다: 만일 삼장양단(三長兩短, 棺의 모양을 묘사하는 말로 죽음을 의미함)이 있으면 의외라고 여기고 놀라지 말라. 과연, 몇달 후 노동장소에서 사망한다.

전백찬은 여전히 북경대학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 사회의 염량(炎凉)과 잔혹, 인생의 고독과 고립무원은 모두 고요하고, 굳건하며, 나이든 겉모습 아래에 매몰되어 있었다.

한번은 손자인 전대외(翦大畏)가 남방에서 북방으로 그를 만나기 위해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의자 위에 앉아 있었는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단지 한 마디했을 뿐이다: "대외구나!"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불상처럼 생사귀천과 영욕을 버린 듯했다.

1968년 10월, 중공이 거행하는 제8기 12중전회에서 최고지도자는 이런 말을 한다: 자산계급학술권위에게도 출로를 주어야 한다. "출로를 마련해주지 않는 정책은 무산계급의 정책이 아니다." 그는 전백찬, 풍우란(馮友蘭)을 예로 들어 말하기를, 이후에도 그들이 교수를 하도록 해야 한다. 유심주의철학을 모르면 풍우란에게 가서 묻고, 제왕장상의 역사를 모르면 전백찬을 찾아가면 된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이후 생활에서도 적절히 보살펴주어야 한다.

북대 군선단(軍宣團)은 풍우란, 전백찬에게 '최고지시'를 전달한 후, 전백찬부부를 연남원(燕南園)의 작은 집으로 옮겨주어 단독주택에서 거주하게 해준다. 그들은 2층에 거주했으며, 그들을 돕기 위해 파견된 노동자(두사부)는 아래층이 거주했다. 이때는 모두가 전백찬이 최고지도자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다. 전백찬도 자신은 해방되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치명적인 화가 그의 머리에 떨어진다. 치명적인 것은 다른 게 아니고, 바로 전백찬이 오랫동안 종사해온 '통일전선'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통일전선을 위해 헌신했는데, 결국 통일전선이 그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고.

사정은 복잡하고 굴곡이 많다. 핵심은 유소기(劉少奇)의 사건규정문제이다. 1968년, 유소기는 이미 "반도(叛徒), 내간(內奸), 공적(工賊)"으로 내정되었다. 구체적인 죄행의 하나는 일찌기 장개석(蔣介石) 및 송자문(宋子文), 진립부(陳立夫)와 결탁했다는 것이다. 30년대에 장개석과 유소기 간을 주선한 사람은 바로 심소잠(諶小岑), 여진우(呂振羽), 전백찬등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유소기전안조(專案組)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증거를 수집할 대상, 혹은 유일한 증거가 되었다.

1968년 12월 4일 유소기전안조의 부조장인 무중(巫中)이라는 군인이 여러 부하를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연남원으로 쳐들어온다. 무중은 전백찬에게 1935년부터 시작한 국공남경담판에서 유소기가 공산당을 팔아먹은 활동을 진술하라고 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 죄행은 당중앙에서 이미 조사확인한 것이다. 너는 그저 이 사건에 대한 진술서만 써서 증명하고 서명하면 된다. 너와는 관련이 없다." 전백찬은 재삼 그때의 담판에서 유소기가 음모활동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결국 무중이 이렇게 말한다: "너에게 3일의 기회를 주겠다. 3일후에 다시 찾아오겠다."

12월 18일 오후, 무중은 여러 사람을 데리고 다시 왔다. 그리고 근 2시간동안 심문한다. 전백찬은 사실에 위반하는 진술을 거부한다. 무중은 돌연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탁자를 치면서 소리친다: "오늘 네가 사실대로 불지 않으면, 너를 총살해버리겠다!"

전백찬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중은 앞으로 돌진해서 총구를 전백찬의 콧구멍아래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빨리 말해라. 말하지 않으면 즉시 너를 총살해버리겠다!" 평생 혁명에 투신한 전백찬은 한번도 이런 공포스러운 혁명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진술할 것이 없다!"

계속하여 그를 협박하기 위하여, 무중은 노트를 꺼내 몇 자를 적어 같이 온 사람들에게 넘긴다.(쓴 내용은 그들에게 먼저 집으로 돌아가서 식사를 하고, 다시 차를 몰고 와서 자신을 데려가달라는 것이었다). 전백찬에게는 사람을 불러 구금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무중이 혼자 남아 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진술을 거부한다.

비록 무중이 빈손으로 돌아갔지만, 전백찬은 이미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최고지도자가 그에게 출로를 열어주었다고 했는데, 사실상의 살길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원래 모두 거짓이고, 헛것이었구나. 절망에 빠진 그는 목숨을 끊을 생각을 품게 된다.

다음 날, 사람들은 전백찬 부부가 대량의 "세코바르비탈(速可眠)"을 먹고 세상을 떠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 두 사람은 침상에 나란히 누워 새옷을 입고 새 이불을 덮고 있었다.

전백찬이 입고 있던 중산복의 좌우측 주머니에는 각각 1장씩의 메모쪽지가 들어 있었는데, 1장에는 "나는 실제로 진술할 것이 없어서, 이 마지막 길을 간다. 내가 이 마지막 길을 가는 것을 두사부는 전혀 모른다." 또 다른 1장에는 "모주석만세! 모주석만세! 모주석만만세!"라고 적혀 있었다.

의지가 굳은 사람이 이렇게 죽어버린 것이다. 전백찬의 마르크스주의사악성과는 아마도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눈처럼 깨끗하다. 옛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진불상기(進不喪己), 퇴불위신(退不危身). 진불실충(進不失忠), 퇴불실행(退不失行). 이는 아주 높은 행위기준이자 도덕규범이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전백찬은 해냈다. 목숨을 걸고.

현숙한 부인 대숙완(戴淑婉)도 함께 갔다. 수십년동안 부녀자로서 유약했던 그녀는 작은 가정에 머물렀는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아주 빛이 났다. "유연하기로는 계곡물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편평하지 않은 곳을 만나면 큰 소리를 낸다" 그녀는 죽음으로 불공정에 항의한 것이다.

전백찬의 자살과 쪽지는 나의 마음에 묶인 풀리지 않는 매듭과도 같았다. 풀고자 했으나 끝까지 풀지 못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나 답은 각양각색이었다. 전백찬의 죽음은 일련의 정치운동에 대한 소리없는 항의이며, 더더욱 '문혁'에 대한 격렬한 반항이다. 그렇다면 친필로 쓴 만세삼창은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내 생각에 전백찬은 노사(老舍)와 다르다. 등탁(鄧拓)과도 다르다. 그가 친필로 쓴 "만세"는 분명히 더욱 은밀하고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루는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진도수(陳徒手)에게 물어보았다. 당대문학을 연구하는 그는 대량의 '문혁'자료를 살펴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중국 지식분자가 '문혁'때 자살할 때의 표준적인 양식이다.

나는 생각했다: 얼마나 혹독한 역량이 가해져야, 한 사학자의 신체와 영혼을 표준양식으로 눌러버릴 수 있었을까!

전백찬의 유골은 어디에 뿌려졌는가?

듣기로, 북경대학의 당시 책임자는 유골을 보존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집행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은 화장장에서 "유골처리"난에 "유골은 필요없다"고 썼다.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일까. 지금도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1979년 2월 22일, 당국은 그를 위해 융중한 추도회를 열어주었다. 유골함에는 3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전백찬이 항상 사용하던 돋보기안경, 풍옥상장군이 선물한 만년필, 그와 아내 대숙완의 커플사진.

전백찬의 제자도 적지 않다. 그중 한 사람은 공부도 잘했고, 사제관계도 아주 긴밀했다. "문혁"이 발발한 그때 그는 대자보를 붙인다. 제목은 <반공노수전백찬(反共老手翦伯贊)>이었다. 옆에는 만화도 그려져 있었는데, 그림 속에서 전백찬은 <금병매(金甁梅)>를 품에 안고 침을 흘리고 있었다.(당시, 북경대학의 1급교수는 <금병매>를 구매할 수 있었고, 전백찬은 바로 1급교수였다).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전백찬의 명예를 회복한 이후에, 그는 장문의 글을 쓴다. 제목은 <나의 은사 전백찬(我的恩師翦伯贊)>이다.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무중은 "유당관찰양년(留黨觀察兩年)"의 처분을 받는다. 그는 아마도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