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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왔을까?

by 중은우시 2025. 4. 7.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제노바의 감옥에는 베니스의 전쟁포로들이 갇혀 있었고, 감옥안에는 낙담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13세기말,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이 난립했고, 베니스와 제노바는 양대 상업무역중심으로, 무역통제권을 둘러싸고 여러번 전쟁을 벌인다. 이번에는 베니스가 패배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온 3류작가 루스티켈로 다 피사(Rustichello da Pisa)는 이때 제노바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감옥동료들을 살펴보았고, 그중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베니스인이 그의 주목을 끌었다.

그 베니스인은 짙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아펜니노 스타일의 갈색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만리나 멀리 떨어진 동방고국에 대한 것이었다.

베니스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중국"이라는 곳에 가 본 적이 있는데, 거기는 황금을 깔아놓은 궁전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가 있으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부가 있다. 그는 중국에 10여년간 머물렀으며, 황제폐하와도 얘기를 나눈 바 있다.

루스티켈로는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는 흥분하여 붓을 들고, 옥중에서 그의 이야기를 받아적어 책으로 만든다.

이 놀라운 책은 그후 몇백년간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어떤 사람은 그가 세계의 다른 곳의 이야기를 적었다고 하여, <환우기(寰宇記, the Description of the World)> 혹은 <동방견문록>이라고 불렀다.

이 책의 첫부분에 루스티켈로는 정중하게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의 이름을 남겼다: 마르코 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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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르코 폴로가 구술하고, 루스티켈로가 쓴 "세계의 기서"이다. <마르코폴로여행기>라고도 부른다. 이 책은 유럽인이 대륙의 반대편을 향한 대문을 연 것이다.

이 책에 관하여, 지금까지도 논쟁이 되고 있는 점이 있다: 마르코 폴로는 정말 중국에 와 본 것일까?

마르코 폴로여행기의 이야기중에서 마르코 폴로는 베니스상인 폴로집안의 아이이다.

교황청을 대표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성유(聖油)"와 서신을 전달하기 위하여, 마르코 폴로는 부친과 숙부를 따라 베니스에서 출발해서, 중앙아시아의 육로를 통해 동쪽으로 간다. 신강, 돈황을 거쳐 원세조 쿠빌라이가 통치하는 원나라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에 도착한다. 그 후 중국에서 십여년간 머물렀고, 쿠빌라이에 의해 관리로 선발된다.

중국에 있는 동안, 마르코 폴로는 조정에서 관련 예의, 습속, 언어를 배운다. 학습을 마친 후 쿠빌라이는 그를 운남(雲南)으로 보냈고, 나중에 양주(揚州)에서 관리로 3년간 지낸다. 그리고 여러번 항주(杭州), 소주(蘇州), 복주(福州), 천주(泉州)등의 도시를 다녀보고, 몇년간 중국각지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1291년, 마르코 폴로 일가는 원나라의 활활진(闊闊眞)공주가 일칸국에 시집가는 것을 호송하기 위하여, 천주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으며, 그후 유럽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베니스로 돌아온 후, 마르코 폴로는 그의 집을 이웃이 점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의 마르코 폴로 장기간의 여행을 마치고 범선에서 내려, 의복이 남루하고, 어투에도 약간 몽골어투가 섞여 있어서, 고향사람들은 그를 내력이 불분명한 사람으로 의심하고 쫓아낸다.

그리하여, 마르코 폴로는 친척들을 연회에 초청한다. 그리고 연회때 3건의 동방에서 가져온 화려한 의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는 이전에 입었던 남루한 옷에서 칼로 안을 갈랐고, 의복에는 각종 진귀한 보석이 감추어져 있었는데, 일거에 바닥으로 쏟아졌다.

고향사람들은 그런 광경은 본 적이 없으므로,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돈있는 사람이 어르신이다.

베니스인은 그제서야 폴로가족이 돌아왔다는 것을 믿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마르코 폴로를 공경한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는 매번 얘기를 나눌 때마다, 중국의 황금백만은 아주 가볍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여, 사람들은 그에게 "마르코백만"이라는 별명을 붙여준다. 그리고 그의 집은 '백만저택'이라고 부른다.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현지에서 약간 유명한 인사가 된다.

얼마 후, 제노바의 함대가 공격을 해왔고, 마르코 폴로도 참전한다. 그러나 해전에서 불행히도 포로로 잡혔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감옥에서, 마르코 폴로는 계속하여 그가 중국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고, 마침 기사소설을 쓰던 작가 루스티켈로를 만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에 의해 광세기서가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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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베니스와 제노바가 화해를 하고, 마르코 폴로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마르코폴로여행기>는 그가 생각지도 못한 영향력을 지니고 유럽각국에 전파된다.

그에 수반한 것은 여러가지 의심이었다.

이 책이 유럽에서 출판되자, 진실성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근대이후, 동서방의 연락은 더욱 빈번해졌고, 사람들은 <마르코폴로여행기>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마르코 폴로 스스로 자신이 원나라군대가 양양(襄陽)을 공격할 때 큰 공을 세웠다고 한 점이다.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 일가는 중국에 온 후, 원나라군대가 오랫동안 양양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고, 황제에게 '회회포(回回砲, 투석기)'라는 신무기의 사용을 건의했다. 원군은 이 공성무기를 가지고 남송의 군사요지 양양을 차지할 수 있었다.

'대포를 바친' 일은 사료에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원사(元史)>등 중국사적에는 원나라때 이 공성무기를 바친 사람이 서역에서 온 회회인 역사마인(亦思馬因)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마인은 직접 "회회포수총관(回回砲手總管)"의 직을 맡아, 포병을 지휘하여 양양을 맹공했고, 다른 원군과 함께 총공격을 감행한다. 결국 양양의 수비장수 여문환(呂文煥)의 투항을 받아낸다.

시간도 맞지 않는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온 시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1275년 여름에 원나라의 상도 개평부(開平府,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시린궈러맹)에 도착했다. 그러나 원군이 양양을 함락시킨 시기는 지원10년(1273년) 이월이다. 그때 마르코 폴로는 아직 북경으로 오는 도중이었다.

설사 마르코폴로가 중국으로 왔다는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많은 경우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새로운 대포를 바치지 않았다고 본다. 대포를 바친 이야기는 아마도 마르코 폴로가 누군가에게 들은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양양전투로부터 아직 몇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 전투는 국제적인 큰 뉴스였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는 다른 사람의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외에,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 십여년을 생활했다고 하는데, <마르코폴로여행기>에는 중국에 관한 핵심내용들이 많이 빠져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한자(漢字)를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에 여러 해동안 거주한 사람으로서 마르코 폴로는 마치 중국인의 언어문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차(茶)도 언급하지 않았다. 차는 송,원시기 가장 중요한 중국의 대외무역상품중 하나이다. 그리고 당시 항주등 대도시에는 모두 차관이 있었고, 마르코 폴로도 가서 맛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장성(長城)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표적 건축물중 하나이다. 거의 모든 서방인들의 중국에 대한 첫인상은 만리장성이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는 책에서 장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의 "전족" 습관에 대하여도 기록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보다 늦게 중국에 온 유럽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중국여자가 "전족"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기이한 풍속을 언급한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책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일부 사람들의 눈에 마르코 폴로는 사기꾼이었다. <마르코폴로여행기>는 순전히 허구에 속한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마르코 폴로가 근본적으로 중국에 와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아마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국가에까지 간 적이 있고, 거기에서 중국에서 돌아온 페르시아 혹은 터키상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중국에 관한 약간의 지식을 얻었을 것이라고 본다. 아마도 그가 가장 멀리 간 것은 기껏해야 흑해 혹은 콘스탄티노플일 것이고, 할일이 없을 때는 상인들과 만나서 허풍을 떨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와 보았다고 말한다. 다만 그는 북방의 몽골고원과 화북평원에 오래 거주하였고, 사방을 돌아다니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리하여 중국의 남방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양주에서 몇년간 지방관료를 지냈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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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판본의 <마르코폴로여행기>를 살펴보면, 일부 마음을 움직이는 글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동방의 산수화같은 장면이다.

마르코 폴로는 항주에서 배를 타고 서호(西湖)를 유람한 이야기를 남겼는데, 눈앞에 이런 화면을 펼쳐보인다:

"배를 타고 유람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혹은 가족을 데리고 혹은 친구들과 함께 화방(畵舫)을 한 척 빌린 다음 거울같은 호수위를 떠다닌다. 화방에는 탁자와 의자, 스툴, 연회를 열 수 있는 설비가 갖추어져 있는데, 모두 정결하고 편안하며 멋졌다....

배에는 양쪽에 모두 창문이 있어 여행객들이 탁자옆에 앉아서 창문으로 내다보기 편하게 해놓아서, 도중에 호수와 산수의 풍경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다....

만일 호안에서 일정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 배위에 서 있게 되면,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 도시의 궁전, 사원, 집, 화원, 그리고 길위의 큰 나무들을 모조리 볼 수 있을 뿐아니라, 동시에 다른 화방을 타고 노는 남녀들이 호수위를 오가는 것도 볼 수가 있다."

만일 직접 겪지 않았다면, 서양인이 송,원시기의 항주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도 그렇게 상세하게.

"행재(行在)" 항주는 마르코 폴로가 가장 좋아하는 중국도시중 하나였고, 그는 항주를 "천성(天城)"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다른 강남의 유명도시 소주는 "지성(地城)"이라고 불렀다. 원나라역사전문가 양지구(楊志玖)는 이런 이상한 번역은 아마도 마르코 폴로가 한어(漢語)를 몰랐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그는 아마도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杭)"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역사상 많은 인물들의 회고록과 마찬가지로, 마르코 폴로의 중국행에 대한 구체적인 일자, 인문풍정등의 기억은 부정확하거나 전후모순되는 부분이 있다. 다만 여러 방면의 기록은 중국의 사서기록과 기이하게 부합한다.

<마르코폴로여행기>에는 중국에 있을 때의 중대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원나라 지정9년(1282년)에 발행한 아합마(阿合馬, Ahmad Fanakati)피살사건이다.

아합마는 쿠빌라이에게 중용된 재상이다. 그는 지위도 높고 권력도 컸다. 그러나 명성은 별로 좋지 못했다. 그가 추진한 여러가지 정책은 조정신하들의 불만을 산다.

그 해에, 쿠빌라이가 북경을 떠나 상도에 머문다. 왕저(王著)라는 익도천호(益都千戶)와 승려 고화상(高和尙)이 공동으로 계획을 꾸며 태자의 명을 거짓으로 꾸며서 아합마로 하여금 궁궐을 나오게 만든다. 그리고 아합마가 궁을 나온 틈을 타서 그의 수레와 말을 가로막고, 소매 속에 숨겨두었던 동추(銅錘)로 아합마의 머리를 내리쳐 즉사하게 만든다.

마르코 폴로는 이번 피살사건을 상세히 기록했고, 그는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도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또한 지정24년(1287년)에 발생한 나얀(乃顔)의 반란에 대하여도 얘기했다.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말했다. 쿠빌라이는 동북에서 반란을 일으킨 몽골종왕 나얀을 평정하기 위하여, 상교(象轎)를 타고 어가친정(御駕親政)했고, 먼곳의 친척을 무찔렀다.

더욱 중요한 점은 마르코 폴로가 나얀을 기독교도이며(정확히 말하면 기독교 네스토리우스파이다), 반군은 십자가를 전기(戰旗)에 그려놓았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런 자료는 현존하는 한문사료(漢文史料)를 보충해준다. 중국의 역사문헌에서는 단지 나얀이 "요언에 혹하여(惑於妖言)" 불교와 다른 종교(離佛正法)를 믿었다고만 언급했지, 나얀이 무슨 종교를 신봉했는지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반란의 결과에 관하여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말한다: 나얀은 몽골귀족으로 '피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처형당한다. 그리고 한문문헌에서는 나얀이 패배한 후, 강에 던져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마르코 폴로가 이들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정도는 한 상인이 그저 여기저기서 흘려들은 것같지 않고, 제국관료가 동료들에게서 들은 소식같이 보인다.

그 외에, 마르코 폴로는 또한 쿠빌라이의 생일이 양력 9월이라고 정확히 기억했다. 즉 중국의 음력으로 팔월 이십팔일이다. 고대에 황제의 생일은 온 나라가 경축하는 날이었고,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에 따르면, 황제는 그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았는가.

또 다른 중국의 중요한 명절은 춘절(구정)이다.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의 새해는 양력2월이라고. 이것도 기본적으로 정확하다.

그는 또한 이런 말도 한다. 그날, 황제와 신하, 백성들은 모두 흰색의 옷을 입는다. 왜냐하면 흰색은 길상(吉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건 언뜻 듣기에 말이 되지 않는 것같다. 마땅히 붉은색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새해에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당시 몽골귀족의 풍습과는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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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온 것에 대하여 의심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지적하는 또 다른 큰 헛점은 한문사적에서 마르코폴로의 존재를 증명할 사료가 없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스스로 "일찌기 직접 대칸의 명령을 받아, 양주를 3년동안 다스렸다"라고 했다. 그러나 양주의 지방지에 수록된 원나라의 대소관료를 모두 살펴보아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가 맡았다는 관직이 무슨 관직인지도 알 수가 없다.

20세기초, 어떤 학자는 희의론자들에게 반박하기 위하여, 한때 마르코 폴로를 원나라때의 대신 보로(孛羅)에 억지로 갖다 붙여서,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마르코 폴로가 양주에서 맡은 관직은 회동도선위사(淮東道宣慰使, 1276년에 설립되고, 양주를 다스렸으며, 강회행성에 속했다)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설은 잘못으로 결론이 난다.

보로는 순수한 몽골인이다. 그의 조상은 징기스칸의 퍼인 보르테(孛兒帖)의 관가(管家, 집사)이고, 그는 동시대의 아릭부케(阿里不哥), 바얀(伯顔), 문천상(文天祥)등과도 접촉이 있었고, 나중에 관직이 재상에 오른다.

만일 보로가 마르코 폴로라면, 그가 동시에 원나라의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탈리아의 감옥에서 자신의 여행기를 얘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서에 마르코 폴로라는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여, 그게 무슨 신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원나라때, 마르코 폴로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중국에 온 서방인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국에 관한 <여행기> 혹은 기타 저작을 남겼고,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사람은 소아르메니아국의 왕해둔(王海屯), 프랑스 선교사 루블록(魯布魯克, Rubrouc), 모로코여행가 이븐 바투타(伊本.白圖泰)등이 있다.

그들은 모두 동서방교류에 걸출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중국의 사적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또 하나의 예가 있다. <원사> 및 원나라사람의 문집에는 지정2년(1342년) 로마교황의 사신이 중국에 온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로마교황청의 자료에는 명확히 중국을 방문한 사신이 Giovanni de' Marignolli라고 적어놓았다.

이 일은 <원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달, 불랑국(拂朗國)에서 이마(異馬)를 공물로 바쳤다. 길이는 1장1척3촌이고 높이는 6척4촌이며, 몸은 순흑색인데, 뒷발굽은 모두 백색이다."

사관은 글자를 아꼈고, 사신이 가져와서 바친 명마는 기록했지만, 사신이 누구인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저 식사 몇끼 대접하고 보내버렸다. 이름이 뭔지 누가 신경쓰겠는가.

만일 외국인이 중국에 온 후에 사서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여, 그가 중국에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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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중국사서에 마르코 폴로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을까?

역사학자 양지구는 평생동안 마르코 폴로를 연구했다. 1941년 그는 <영락대전>에 수록된 원나라사료에서 학술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문자를 발견한다.

그건 원나라 <경세대전. 참적문(站赤門)>에 나오는 공문이다. 지원27년(1290년) 천주(泉州)의 관리가 곧 바다로 출항할 원나라사신들에게 식량을 분배한 내용이다:

"십칠일, 상서(尙書) 아난답(阿難答), 도사(都事) 별부화(別不花)등이 글을 올리고, 평장(平章) 사불정(沙不丁)이 상소하려 말하기를; '금년 삼월 명을 받아 올로대(兀魯歹, 울루다이), 아필실아(阿必失阿, 어비스어), 화자(火者, 훠저)를 보내어 마팔아(馬八兒)를 거쳐 아로혼(阿魯渾)대왕께 가게 했다. 동행하는 사람은 160명이고, 그 안에 90명은 이미 몫을 지급했다. 나머지 70명은 듣기로 여러 관리들이 보내주고 구매한 것이어서 식량을 따로 분배하지 않는다."

여기에 몇몇 사람이름이 등장한다:

사불정은 당시 강회행성평장정사이다. 이 사람은 해운을 관장하던 사람으로 당시 천주로가 그의 관할범위내이다. 그러므로 천주의 시박사무(市舶事務)도 그의 관할업무이다.

아로한은 일칸국의 군주이다. 13세기, 몽골인은 유라시아대륙을 종횡하였으며, 원나라이외에 4개의 상대적으로 독립된 칸국이 있었다. 즉, 킵차크칸국, 차가타이칸국, 오고타이칸국과 일칸국이다.

일칸국의 왕실은 원나라황제의 친척이다. 이 칸국은 쿠빌라이의 동생인 훌라쿠가 창건했고, 그 영토는 동으로 아무다리아강과 인더스강에 이르고, 서로는 소아시아대부분지엯에 이르며, 남으로는 페르시아만, 북으로는 코카서스산에 이르렀다.

올로대, 아필실아, 화자 이 세사람이 바로 곧 바다로 나가 일칸국으로 가서 아로혼을 만날 사신이다. 계절풍으로 그들은 1291년 천주를 출발하여, 해로를 거쳐 '마팔아(지금의 인도 동남안일대)'를 지나 페르시아로 간다.

이 사료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이 사신단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르코 폴로는 원래 중국에서 잘 지냈다. 그가 유럽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게 만든 것은 바로 1291년, 원나라공주 활활진이 일칸국에 시집가는 사건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에서, 일칸국의 군주 아로혼의 처가 사망하고, 국왕은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죽은 처와 동족인 몽골여자를 후처로 맞이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쿠빌라이는 이에 동의하여 17세의 활활진공주를 아로혼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3명의 사신을 따라 마르로 폴로 일가족이 출항하여 고향을 그리는 마음에서 서아시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마르코폴로여행기에서 마르코 폴로는 그들과 동행한 3명의 사신의 이름을 남겼다. 원문에서는 Oulatai, Apousca Coja라고 했다.

우리는 원나라사서에 나오는 3명의 사신과 대조해보자. 그러면 두 사료에서 얘기한 것은 같은 항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Oulatai - 兀魯歹(울로다이)

Apusca - 阿必失阿(어비스어)

Coja - 火者(훠저)

유감스럽게도, 원나라사적에는 3명의 사신과 마르코 폴로, 활활진공주간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양지구는 이렇게 본다. 이 참적공문에서는 활활진과 마르코 폴로를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첫째는 공주의 지위가 고귀하여 원래 식량분배와는 무관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지방관리인 사불정이 중앙에 사신단의 식량분배문제를 보고할 때 단지 사신단의 우두머리 즉 3명의 사신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마르코 폴로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책임자도 아니니, 이름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중서방자료에서 놀라운 일치율을 보이니, 이것이 아마도 마르코 폴로가 중국역사에 남겨놓은 흔적일 것이다.

회의론자들이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다는 것을 의심하는 견해에 대하여 '긍정론'을 취하는 학자들도 여러가지 추측을 내놓는다.

마르로 폴로는 한자를 쓸 줄 몰랐다. 그리고 책에서 언급된 지명은 모두 몽골, 돌궐 혹은 페르시아어 칭호이다. 예를 들어, Cathay(契丹, 거란, 즉 북중국), Cambaluc(汗八里, 즉 원나라 大都), Caramoran(哈剌木連, 즉 黃河).....

어떤 학자는 이것이 아마도 마르코 폴로가 페르시아어, 투르크어와 몽골어에 정통하고, 한어를 몰랐기 때문으로 본다.

설사 정말 마르코 폴로가 말한 것처럼 그가 양주에서 3년간 관리로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중국사서는 원나라초기 강회의 몽골관리에 대하여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는 기록이 있고, 원나라통치자들이 한때 과거시험을 폐지하고, 몽골인, 색목인을 중용하며 북인(금나라통치하의 한인)과 남인(남송 통치하의 신민)을 억누르기도 했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하루종일 몽골귀족들과 어울렸다면, 한문화와 관련된 사물 예를 들어, 장성, 인쇄술, 젓가락, 차, 전족등은 무시했을 수 있다.

마르코 폴로가 "장성"을 빠트린 것은 한편으로 원나라는 강역이 넓어 장성을 만들어 북방을 방어할 필요가 없었고, 이전 왕조에서 쌓은 장성은 방어작용을 하지도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현재 보는 장성은 대부분 벽돌로 쌓아 만든 명나라때 장성이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을 때 볼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원나라이전에 진흙으로 쌓은 성벽이나 보루이고 오랫동안 황폐되어 있었다. 이 상인출신의 외국인에게 무슨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진 않았을 것이다.

전족은 송나라때 상류사회의 부녀자들 사이에서 이미 성행했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온 후, 매일 접촉한 몽골부녀들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족부녀들은 예교에 얽매어 오랫동안 폐쇄상태로 살았다. 마르코 폴로가 평소에 그녀들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 17년간 생활했지만, 한어를 몰랐고, 한문화를 깊이 이해하지도 못했다. 아마도 당시 정치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편면적인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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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유럽인은 동방에 대하여 뿌리깊은 그리움이 있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상상 속의 "동방"은 거의 유럽인들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럽인들은 머나먼 동방에는 "Seres('絲綢, 즉 비단이라는 뜻)"라는 나라가 있다. 그 곳의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아가면서, 병기를 소지하지 않고, 영원히 전쟁이 없다. 그들의 성격은 조용하고 말이 없으며, 이웃나라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곳의 기후는 온화하고, 공기는 깨끗하며, 편안하고 위생적이다. 하늘에 안개도 보이지 않고, 사나운 바람도 불지 않는다. 삼림이 우거지고, 사람들이 그 솟에 사는데 , 고개를 들어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동방은 유럽인들에 있어서, 진(晋)나라 도연명이 쓴 세외도원과 같은 곳이었다.

일찌기 기원전4세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이 정벌을 하면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제국을 건설한다. 그중 하나의 원인은 바로 그가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를 읽었기 때문에 그 책에 묘사된 동방세계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이 젊은 정복군주는 동방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대륙의 건너편은 여전히 광활하고 신비했다.

14세기이후, <마르코폴로여행기>가 널리 전파되면서, 이런 상상은 다시 한번 붐이 불게 된다.

상인으로서, 마르코 폴로는 극히 과장된 수법으로 중국각지의 물산, 무역, 시장, 교통, 세수등 상업과 관련된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동방을 무궁무진한 재물을 지닌 보배로운 땅으로 묘사했다. 궁전에는 "모든 방의 벽은 금과 은으로 장식되었다"

책에서 마르코 폴로는 아시아의 동쪽은 봉쇄된 수역이 아니라, 해안가라고 말했다. 아시아 동해안에 대한 묘사는동방문명에 침흘리던 유럽인들에게 항해를 통해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온 컬럼부스는 자주 라틴어버전의 <마르코폴로여행기>를 읽었고, 거기의 260곳에 주석을 붙였다. 마르코폴로이야기에 감동받아, 그는 동방으로 항해하기로 결심하고, 황금의 나라를 찾기로 결심한다.

1492년, 컬럼부스는 스페인국왕이 중국황제에게 써준 국서를 가지고 첫 항해에 나선다.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대륙의 바하마군도와 쿠바, 아이티등지에 도착한다. 이는 신대륙발견의 시작이다.

컬럼부스는 완전히 우상 마르코 폴로를 숭배했다. 그는 자신이 아시아에 도착했다고 보고 쿠바를 일본(지팡구)으로 여겼다. 해안에 상륙해서 황금을 찾았다. 그리고, 멕시코를 마르코 폴로가 말한 "행재(항주)"라고 여겼다. 그리고 미주토착인들을 인도인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인디안이라고 명명한다.

말년에 이르러서도 컬럼부스는 여전히 자신이 아시아에 도착했다고 믿었다.

마르코폴로여행기가 책으로 나온지 2세기후에 컬럼부스외에 미주대륙을 아메리카로 명명하고, 희망봉을 돌아 항해한 바스코다가마, 처음 세계여행을 완성한 마젤란등 대항해시대를 연 항해가들은 모두 <마르코폴로여행기>의 애독자들이었다.

유라시아대륙의 균형은 이렇게 무너지게 되고, 유럽인들은 그들의 "교환을 통해, 혹은 정복을 통해, 황금, 진주와 향료를 취득"하려는 야심을 실현하게 된다.

지금,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온 적이 없다는 논거를 전부 합치더라도 마르코 폴로가 생전에 얘기한 내용을 뒤집을 수 없을 것같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마르코 폴로가 임종할 때, 신부는 그에게 참회하여 여행기에서 얘기한 것이 거짓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말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는 확실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얘기한 것은 제가 본 것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건 오지 않았건, 그와 그가 쓴 <마르코폴로여행기>는 이미 세계를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