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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임소(林昭): 문혁때 총살당한 북대재녀(北大才女)

by 중은우시 2025. 3. 25.

글: 천맥문사(阡陌文史)

1968년, 북대재녀가 옥중에서 20만자의 글을 남기고, 비밀리에 총살당하기 전에 그녀는 무릎꿇기를 거절하면서 소리쳤다: "역사는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공을 넘어 역사의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시간을 1957년의 무더운 여름 밤으로 되돌려 보자. 북경대학의 동문밖의 큰 길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거기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북경대학 학생 장원훈(張元勛)은 대자보(大字報)를 붙여 공격의 촛점이 되었고, 사람들은 목이 쉬도록 소리쳤고, 감정은 격앙되고 있었다. 그때 한 여학생이 돌연 탁자 위로 뛰어올라가서 큰 소리로 물었다: "그에게 도대체 비판투쟁받을 만한 부분이 어디있느냐?"

"넌 뭐냐? 이름이 뭐냐?"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어두운 무리들 속에서 분노의 고함이 들려왔다.

"너는 공법검(公檢法, 공안, 검찰, 법원)이냐?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묻는 것이냐?" 여학생은 잠시 멈춘 후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임소(林昭)이다. 쌍목(雙木)의 임(林)이고, 칼이 입구자 위에 있는 날일자(刀在口上之日)이다."

"오늘 칼이 입 위에 있어도 좋고, 머리 위에 있어도 좋다. 이미 시작했으니 더 고려해주지 않겠다!"

이때부터, 이 임소라는 이름의 여자는 운명이 급전직하한다.

그녀의 본명은 팽령소(彭令昭)이다. 1932년 강소성 소주(蘇州)의 서향세가(書香世家)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찌기 영국유학을 했으며, 모친도 진보여성이며, 외삼촌은 열사(烈士)이다.

가정환경의 훈도를 받아, 임소는 어려서부터 각종 선진적인 사상과 문화를 접했고, 역사, 문화등 서적을 널리 읽으면서, 그녀로 하여금 견인불발의 성격과 진리추구의 신념을 갖게 했다.

1949년, 17살의 임소는 소남신문전과학교(蘇南新聞專科學校)에 입학한다. 졸업후, 상주명보(常州明報)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다.

1954년, 임소는 강소성 "문과장원(文科狀元)"의 성적으로 북경대학에 입학하여 신문을 전공한다. 재능이 뛰어난 그녀는 북대시사(北大詩社)에 가입했을 뿐아니라, <홍루(紅樓)>의 편집위원회 위원이 된다.

그녀의 시작(詩作)은 속속 <광명일보>와 <중국청년보>에 발표된다. 신체가 비교적 허약해서, 그녀는 동학(同學)들은 "임고냥(林姑娘, 홍루몽의 임대옥을 가리킴, 병약한 미녀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놀렸다. 그리하여 그녀는 필명을 아예 "임소"로 고치게 된 것이다.

"대옥지유천상유(黛玉只有天上有), 인간처처개보채(人間處處皆寶釵)"(임대옥은 하늘 위에나 있고, 인간세상에는 곳곳에 설보채가 있구나). 이 재녀는 그 특수한 시기에 이류(異類)로 취급되었다.

그녀는 시류를 따르지 않았고, 무리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녀는 시종 맑고 깨어있는 정신을 유지했고, 독립적이었던 그녀는 당시의 기세등등하던 운동시대에는 여러 면에서 들어맞지 않았다.

1957년의 그 여름날 밤, 그녀는 동학을 위해 용기있게 나섰다가 하룻밤새에 '우파'로 낙인찍힌다.

이 변고로, 그녀는 순조롭게 졸업장을 받을 수도 없었고, 자료실로 보내어져 노동고찰을 받아야 했다. 거기에서 그녀는 동병상련의 인민대학 학생 감수(甘粹)를 만난다.

두 사람은 취향이 맞았고, 항상 인생의 이상을 얘기하면서, 서로 암암리에 기운을 북돋워주다가 서로 사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당시 용기를 내서 결혼신청을 하자, 상급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는다. 그건 개조되기를 거절한다는 의사로 읽힌 것이다.

1959년 감수는 멀리 신강(新疆)으로 쫓겨간다. 헤어질 때 두 사람은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임소는 오열하면서 말했다: "내가 너를 해쳤구나!" 감수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나는 돌아올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함께하게 될 것이다..."

임소는 가녀린 몸으로 열차를 쫓아서 뛰어갔고, 감수는 모든 것에 불구하고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열차는 갈수록 빨라졌고, 금방 역을 벗어나버렸다...

임소는 사랑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은 그대로 유지했다. 매일 펜을 들어 계속 새로운 견해의 돌파구를 찾았다. 오랫동안의 피로가 겹쳐 그녀는 각혈을 심하게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잠시 자유를 얻게 된다.

상해로 돌아가 휴양하는 기간동안, 그녀는 뜻이 맞는 학생들을 알게 되고, 함께 시정의 폐해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성화(星火)> 잡지를 창간한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대담한 언론으로 인하여 잡지는 폐간당한다. 1960년, 임소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매일 계속되는 심문을 받아야 했다.

신체는 가두어 둘 수 있지만, 사상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임소는 진실을 말하는 것은 죄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위해" 살겠다고 했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흰색 이불을 달라고 하여, 손가락을 깨물어 쉬다가 쓰다가 하면서 20여만자의 일기를 남긴다.

왜 나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담겨 있는가? 왜냐하면 나는 이 토지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방울 또 한방울의 피를 조국의 혈맥에 주입했고, 진정한 사랑을 자유를 위해 바쳤다.

1962년, 몸이 극히 허약해진 그녀는 "칠군자(七君子)"중 한명인 사량(史良)의 도움으로 병보석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회를 틈타 무국적교민 아약(阿若)과 연락하여, 자신의 일부 작품을 해외에서 발표하도록 부탁한다. 이 거동은 그녀로 하여금 다시 감옥에 갇히게 만든다.

감옥동료였던 정운(丁芸)은 이렇게 권한 바 있다: "너는 왜 이렇게 적나라하게 반항하느냐? 그건 스스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짓이 아니냐?"

임소의 대답은 확고하면서 과감했다: "피가 몸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이, 가슴 속에 뭉쳐있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다!"

1968년, 겨우 숨만 붙어 있는 그녀는 마지막으로 병원에 보내어진다. 그때 의사는 그녀를 동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왜 하필 이런 고생을 하려 하느냐"

기운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서 한자 한자 말한다; "차라리 옥쇄하겠다(寧爲玉碎)"

1968년 4월 29일, 이 '완고불화(頑固不化)"의 36살짜리 재녀는 비밀리에 총살형이 집행된다. 형을 받기 전에 그녀는 소리높이 외쳤다: "역사는 내가 무죄임을 증명할 것이다!"

며칠 후, 나이든 모친은 딸의 죽음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놀라운 요구를 받는다. 집을 찾아온 사람은 5푼의 총알비용을 내라고 한 것이다.

임소가 체포된 후, 부친은 자결했고, 그녀가 총살당한 후, 모친은 정신이 붕괴되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다. 일찌기 행복했던 4식구중에서 이제는 여동생 팽령범(彭令範) 혼자만 남았다. 그녀는 결국 멀리 외국으로 떠난다.

임소가 소리높여 외쳤던 그말: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증명할 것이다!"는 12년후에 결국 확인된다.

1980년 8월 22일, 상하이시고급인민법원은 정신병을 이유로 임소에게 무죄를 선포한다. 그리고 그 사건은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형을 받은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후 두 차례의 재심을 통하여 이전의 판결이 뒤집히고, "정신병"이라는 몇 글자가 삭제되어, 임소는 결국 완전히 오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한다.

그녀는 자유를 위해 살았고, 그녀는 진리를 위해 죽었다.

그녀는 그 시대에 보기 드문 깨어있는 인물이었고, 민감한 통찰력과 깊이있는 인지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시대의 흐름을 쫓아가지 않았고, 무리에 휩쓸리지도 않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미친 시대에 그녀는 문자로 증명했다: "자유의 사상, 독립의 영혼"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다시 일깨워주었다.

그녀의 묘비에는 몇 글자가 쓰여 있다:

자유무가(自由無價)

생명유애(生命有涯)

녕위옥쇄(寧爲玉碎)

이순중화(以殉中華)

역사는 이 자유롭고 용감한 영혼을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