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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북부)

평요고성(平遙古城)의 역사유래

by 중은우시 2025. 3. 16.

글: 천유여이보부족(天有餘而補不足)

출토된 문물을 보면, 일찌기 신석기시대부터 평요(平遙)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곳은 일찌기 제요(帝堯)의 봉지(封地)였으며, 그리하여 이곳 고도지(古陶地)로 불린다.

평요고성은 서주선왕(西周宣王)시기(기원전827-기원전782)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평요현지>에 따르면, "주선왕때 윤길보(尹吉甫)가 검유(撿猶)를 북벌하면서 병력을 이곳에 주둔시켰다". 성원(城垣)은 항토(夯土)로 쌓았으며, 지금의 평요성의 서북쪽 6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이미 2,700여년의 역사를 지녔다.

서한(西漢)때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 기원전179-기원전157)이 대왕(代王)으로 있을 때, 일찌기 중도(中都)를 도성으로 삼았다(지금의 평요이다).

남북조시기 북위때, 태무제(太武帝) 태평진군9년(448년)에 위나라 태무제의 이름 척발도(拓拔燾)의 '도(燾)'와 '도(陶)'가 같은 음이어서 피휘하여 평도(平陶)를 평요(平遙)로 고쳐부르게 된다. 그후 평요라는 명칭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명나라 홍무3년(1370년), 평요고성은 옛 성원의 기초 위에 개촉하여 전석(磚石)으로 성벽을 쌓아, 현재의 규모가 된다.

청나라 도광3년(1823년, 전국최초의 표호(票號) 일승창(日昇昌)이 평요의 서대가(西大街)서 영업을 시작한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표호와 부상들이 모두 이곳에 집중되었다. 이런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도시건설의 발전을 크게 이루었고, 도시건축의 품질이 매우 높아서, 평요고성의 사회, 경제, 문화, 예술이 비교적 빠르게 발전하게 된다.

청나라말기에 이르러 산서표호는 다시 33곳으로 증가하는데, 평요현성내에서 최전성기에 표호가 22곳에 이른다. 이는 전국표호중 2/3를 차지하는 것이었따. 국내 85개도시와 세계각국의 도시에 모두 400여곳의 분호를 설치했고, 총부는 모두 평요에 있었다. 중국의 금융, 송금업무는 기본적으로 산서표호 혹은 평요의 표호들이 독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전국에서 보기 드문 경우이다. 이는 평요고성의 특유한 금융성격 및 당시 도시의 번영한 정도를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평요고성의 전체적인 배치는 신령한 거북(靈龜)의 모양을 따서 설계되었다. 전체 성은 동, 서, 남, 북의 4개의 대가(大街)를 주요도로로 하여, 종횡으로 8개의 소가(小街), 72개의 곡정항(蛐蜓巷)으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귀갑(龜甲)의 팔괘도안같은 모양을 갖추고 있다. 주차(主次)가 분명히 나뉘어지고,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 전체 성의 심장은 남대가 북부의 높은 시루(市樓)이다.

평요고성은 귀성(龜城)이라고 불린다. 거북(龜)은 중국전통문화에서 길상(吉祥), 안녕(安寧),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신령한 동물이다. 고성의 설계사는 특별히 평요에 6개의 성문을 설계하였는데, 각각 바깥으로 튀어나온 옹성(瓮城)을 가지고 있다. 출입에 편리할 뿐아니라, 안전을 보장하며 동시에 신령한 거북의 머리와 꼬리, 그리고 사지를 상징한다. 북문옹성은 거북의 꼬리이고, 북문에 대응하는 남문옹성은 거북의 머리이다. 그 양측에는 각각 1개의 우물이 있는데, 이는 거북의 두 눈을 상징한다. 동서 양쪽에는 각각 2개의 옹성이 있는데, 거북의 다리 네 개를 표시한다. 여기서 지적할 점은 이 네 개의 옹성중 3개는 문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오직 아래동문의 옹성만이 동문과 마주하여 동쪽으로 열려 있다. 이는 무슨 이유에서인가? 설계자는 전체 평요성이 지금 남쪽으로 기어가려는 거북으로 보고, 이 길상물이 기어가버리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큰 밧줄로 거북의 왼쪽 뒷다리를 묶어 놓았다. 직선상의 아래 동문과 그 옹성은 바로 이 붙잡아 놓은 다리를 상징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밧줄은 성의 동북 10킬로미터 밖에 있는 자상사(慈相寺) 녹대탑(鹿臺塔)에 묶여 있다고 한다.

고성의 구조는 완전하고, 풍격이 고박하면서 명승고적도 아주 많다. 현존하는 같은 유형의 고성중 유일무이한 것이다. 고성평요는 국가의 중시를 받고 보호받고 있다. 평요고성은 중국역사문화명성중 하나이고,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세계문화유산이다. 유엔헤비타트의 전문가는 평요성을 고찰한 후, 마음 속으로부터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 고성은 중화대지의 보물이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보물이다." 유네스코의 전문가로 일본 교토대학의 저명한 교수인 타나카 탄(田中淡)은 더욱 정확하고 간결하게 정의내렸다: "평요고성갑천하(平遙古城甲天下)"

평요고성의 현존 성벽은 명나라 홍무3년(1370년)에 건축한 것이다. 성벽의 부지를 고를 때는 "귀전희수(龜前戱水)", "산수조양(山水朝陽)", "이험제새(以險制塞)"의 전통법칙을 채택한다. 성벽의 벽돌은 특대형 성벽돌(340밀리미터 X 170밀리미터X65밀리미터)을 쌓아서 만들었고, 성벽은 인공항토이다. 옹성안의 외성동은 모두90도 꺽이도록 설계했고, 성의 사각에 튀어나온 성대(城臺)는 방어때의 각종 폐단을 해결했다. 성벽에 높이 솟아 있는 적루(敵樓)와 호응하는 적대(敵臺)는 시야를 확대할 뿐아니라 공격력을 증강시킨다. 극히 특색있는 것은 성문의 설치이다.남북에 각각 1개, 동서로 각각 2개가 있는데, 이는 거북의 머리, 꼬리, 네 다리를 상징한다. 여기에 성안에 종횡교착하는 거리는 다시 거북의 등에 있는 무늬를 상징한다. 이를 통해 이 고성은 "귀성"으로 유명해진다. 성의 남문은 거북의 머리라고 알려져 있고, 문밖의 두 개의 우물이 바로 거북의 눈이라는 것이다. 북성문은 거북의 꼬리로, 성벽 동서의 4개의 옹성, 상하서문, 상동문의 3개성문은 모두 남쪽으로 열려 있어, 마치 3개의 앞으로 구부리고 펴는 거북다리를 표시한다. 오직 하동문만이 동쪽으로 열려 있다. 이는 거북의 다리를 묶어놓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전체 성은 시루를 중심으로 하여 성벽과 엄격하게 대칭되느 백여개의 거리와 함께 방대한 팔괘도안을 형성한다. 이는 또한 거북등의 무늬와도 같다.

평요고성의 성벽은 높이가 10미터이고 상부의 너비는 3-5미터이며, 하부의 너비는 10미터이다. 성벽은 소토항실(素土夯實)하고 외부는 청전(靑磚)을 쌓았다. 성의 꼭대기의 벽돌은 기울어져 물이 흘러내리게 했고, 바깥쪽은 당마장(擋馬墻)으로 쌓았고, 안쪽은 여아장(女兒墻)으로 쌓았다. 성위에는 72개의 적루, 타첩(垛堞)이 3000여개 만들어져 있다. 이중문 옹성이 6개, 안에는 관제묘, 재신묘, 진무묘가 있고, 문의 꼭대기에는 중첨복구성루(重檐木構城樓)가 있다(지금은 존재하지 않음). 성벽의 사각에는 각루가 1개씩 있다(지금은 존재하지 않음). 동쪽성벽에는 윤길보점장대(尹吉甫點將臺)가 있고, 동남쪽귀퉁이에는 규성루(奎星樓)가 1개 있다. 규성루는 청날 강희48년(1709년)에 건설되었고, 동치13년(1874년)에 성벽의 동남쪽귀퉁이로 옮겨진다. 누각의 평면은 8각형이고, 아래는 벽돌, 위는 목재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24미터로, 단첨(처마는 1개)으로 유리기와를 얹었다. 전체 성벽의 사방은 호성하(護城河)가 둘러싸고 있다. 성문이 있는 곳에는 원래 조교(弔橋)가 놓여 있었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명나라때 성을 수비하기 위해 징집한 병사가 3000명이고, 각각 무기등을 갖추고 5일에 한번씩 훈련을 하며, 성의 위와 아래에 배치했다. 사화포(司火砲), 금창(金槍), 마시(馬矢), 도부(刀斧) 약간이 있고, 수위가 순찰한다. 현아는 자체적으로 무기를 제조하고 화약을 갖추었다. 문에는 금부(金夫)가 방어하고, 각 타구에는 병력을 배치하여 4명의 독사(督師)를 두었다. 당시에 의복, 갑옷, 화기, 화약, 궁노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명나라 가정19년(1540년), 북에서 적군이 태원을 침입한 후, 계속 남하하여 평요, 개휴(介休)까지 밀고 내려왔다. 사방이 훤히 뚫리고 산이나 강이 보이지 않는 남북의 오새 평요는 오직 견고한 성벽에 의존하여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 청나라말기에 이르러, 관방은 여전히 단련(團練)을 두고 병사를 모집하여 성을 지켰다.

남대가(南大街)는 평요성내의 명청건축물이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는 상업가이다. 길거리를 따라 양측의 점포는 대부분 전목(벽돌+목재)구조의 옛날집이다. 이 길거리를 걸으면, 마치 수백년전의 명청시대로 되돌아간 것같다. 그래서 남대가는 명청가(明淸街)라고도 불린다. 남대가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평요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시루(市樓)"이다. 남대가의 북쪽에는 고대시대에 고도(古陶) 도시시민들이 물건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었다. 그래서 이 루를 '시루'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루의 동남쪽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전해지는 바로는 우물안의 물색이 금색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시루를 '금정루(金井樓)'라고도 부른다. 시루는 고대 평요의 십이경(十二景)중 하나이다. 그것이 언제 건축되었는지는 현재로서 고증할 수 없다. 단지 청나라건륭연간에 중수하고, 가경, 동치, 광서, 선통연간에 다시 여러 차례 수리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이 누각은 높이가 18.5미터로 이 성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아래층은 3간이고, 행인과 차마가 시루의 아래로 지나갈 수 있다. 상루에 올라가면 멀리 조망할 수 있으며, 남대가의 점포, 건물, 행인, 관광객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다. 사방의 성벽도 눈안에 들어온다. 성밖의 푸른 산과 아름다운 경치도 멀리 보인다. 고인들이 말한 바와 같다: "남산수어동남(攬山秀於東南), 읍청류어서북(挹淸流於西北); 앙관연운지변환(仰觀煙雲之變幻), 부림성시지번화(俯臨城市之繁華)" 시루의 꼭대기에는 서로 다른 색깔의 유리기와에 남"희(喜), 북"수(壽)"의 정교한 도안이 상감되어 있어, 백성들의 아름다운 희망을 새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