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랑간(靑琅玕)
주작인은 한간(漢奸, 매국노)으로 총살형을 받았으나, 호적(胡適)등의 도움으로 징역형으로 바뀌어 감옥에 들어간다. 1949년 출옥한 후에는 대만으로 가기로 결정한 바 있었으나, 나중에 모주석에게 보낸 서신에 모주석의 회신 한마디로 인해 주작인의 후반생은 바뀌게 된다.
1949년의 어느 날, 주작인은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의 펜은 종이 위에서 바쁘게 오갔고, 마치 마음 속에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쏟아내는 듯했다. 이 서신의 수신인은 주은래 총리였다. 주작인은 이를 통해 자신의 반성과 신중국을 위해 힘을 보태겠다는 바램을 표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주작인은 시종 회신을 받지 못한다. 1950년 2월, 찬바람이 여전히 불고 있었다. 그는 다시 붓을 든다. 이번에는 그가 직접 모택동 주석과 문예계의 지도자인 주양(周揚)에게 편지를 썼다. 주작인은 모든 희망을 이 편지에 걸었고, 신중국의 양해와 포용을 기대했다.
이 서신은 최종적으로 모택동의 비서인 호교목(胡喬木)의 손에 들어간다. 호교목은 주양과 상의한 후, 처리의견을 초안하여 모택동에게 보고한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주작인의 내심은 불안과 기대로 가득했다.
주작인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기복이 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초기에 신문화운동의 주요참여자였다. 노신과 나란히 "쌍둥이별(雙子星)"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운명의 전환점은 그렇게 교묘하게 나타난다.
1939년, 일본군이 대거 화북을 침입하고, 북경대학은 학교를 남쪽으로 이전하여, 중화문맥을 보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런 관건적인 순간에, 주작인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결정을 내린다.
처인 하부토 노부코(羽太信子)가 극력 만류하여, 주작인은 북평(북경)에 남기로 결정한다. 북평이 함락된 후, 주작인은 금방 진퇴양난의 지경에 처한다.
친일정권의 유세객이 연이어 그를 찾아와서, 주작인에게 화북정무위원 교육독판의 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이 직위는 겉으로는 교육사업을 주재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침략자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주작인은 처음에 확실하게 거절한다. 그는 이 직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끼 때문이다. 그는 '한간'의 죄명을 뒤집어 쓸 것이고, 동족들에게 버림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설사 일본특무의 우두머리인 도이하라(土肥原)이 직접 나서서 설득했지만, 주작인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항상 장난처럼 바뀐다. 어느 평범한 날에 주작인은 그의 제자인 심계무(沈啓無)와 집안에서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돌연 문밖에서 총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빠른 발걸음소리가 나면서, 두 명의 낯선 인물이 집안으로 침입했고, 주작인과 심계무를 향해 총을 쏜다.
이번 암살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주작인에게는 깊은 마음 속의 그림자를 남긴다. 그날 저녁 협화의원의 검사에 따르면, 총탄이 외투의 쇠로 된 단추에 막혀, 그의 복부에 자그마한 멍만을 남겼다고 한다. 이때의 놀라운 경력은 주작인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지푸라기가 된다.
이번 사건이후, 하부토 노부코는 다시 한번 주작인에게 일본측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 하부토 노부코는 심지어 이렇게 암시했다. 만일 일본인이 정말 중국을 장기간 통치하게 되면, 주작인은 아마도 화가 복이 되어 더욱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처가 매일 권유하자, 주작인의 생각도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는 동요하기 시작했고, 일본측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결국 총격사건이 발생하고 12일후에, 주작인은 일본의 화북파견군사령부에서 보내온 임명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전후로 친일정권하에서 북경도서관장과 화북군정위원회 교육독판의 직위를 맡는다.
이 결정은 주작인이 철저히 레드라인을 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존경받던 학자에서 동포들에게 욕을 먹는 '문화한간'이 된 것이다. 주작인의 인생궤적은 이때부터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항전승리후, 주작인은 한간죄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1946년 그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 소식은 청천벽력이었고, 문화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주작인의 친구인 호적은 그 소식을 들은 후, 즉시 주작인의 구명활동을 벌인다. 호적의 노력으로 주작인의 사형은 최종적으로 15년형으로 감형된다.
1948년 겨울, 또 다른 전기가 발생한다. 일찌기 주작인과 잘 알고 지내던 실업가 이석증(李石曾)이 귀국했고, 옛친구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각종 관계를 동원하여 석방활동을 벌인다.
이석증의 알선으로, 주작인은 형기를 다시 10년으로 감형받는다. 1949년 1월 26일, 주작인은 마침내 병보석으로 풀려나서 감옥의 문을 나올 수 있었다.
다시 자유를 회복한 주작인은 한때 대만으로 갈 것을 고려했었다. 그러나, 심사숙고후, 그는 대륙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모주석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의 참회하는 뜻과 신중국을 위해 공헌하고 싶은 바램을 표시했다. 이 서신은 주작인의 운명을 바꾸는 관건이 된다.
1950년 봄, 주작인은 마침내 회신을 받는다. 모택동은 그의 서신을 읽은 후, 의외의 결정을 내린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문화한간이지. 살인방화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지금 고대그리스문자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남겨서 그에게 번역업무를 하도록 하고 나중에 출판하자." 이 말은 특사령과 같았다. 주작인이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주작인은 다시 펜을 들어, 그의 번역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정력을 고대그리스문학의 번역업무에 쏟았다. 마치 이런 방식으로 그의 과거 잘못을 속죄하려는 것처럼. 글자 하나, 문구 하나까지 모두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생명에 대한 사고가 응집되어 있었다.
비록 그의 일생은 논쟁이 충만하지만, 그가 중국현대문학과 번역사업에 공헌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주작인의 이야기는 영원히 중국현대문학사상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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