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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문학일반

《사대명저(四大名著)》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은....?

by 중은우시 2025. 2. 21.

글: 연연(姸姸)

사대명저(四大名著)를 읽어본 사람이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홍루몽(紅樓夢)>은 가부흥쇠(賈府興衰)를 얘기하고, <수호전(水滸傳)>은 양산영웅(梁山英雄)을 얘기하고, <서유기(西遊記)>는 취경역험(取經歷險)을 얘기하고, <삼국연의(三國演義)>는 군웅축록(群雄逐鹿)을 얘기한다는 것을.

4개의 작품은 주제가 서로 다르고, 스타일도 전혀 다르다. 네 권의 책을 펼쳐보면 모든 페이지에 서로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고, 모든 장면은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들 이야기는 서로간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만 네 권의 책에는 모두 한 사람이 언급되어 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는 왜 시대적 배경, 저작연대, 스타일이 전혀 다른 네 권의 책에 언급되어 있을까?

<삼국연의>: 관우의 전설적인 일생

삼국연의는 관우(關羽)의 일생을 가장 완전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촉한의 오호상장(五虎上將)의 으뜸으로 "충의(忠義)"의 화신이다.

도원결의로, 관우와 유비, 장비는 결의형제가 된다. 그후, 유비가 어떤 곤경에 처하든지 간에 관우는 시종 그와 함께 한다. 설사 유비와 한때 서로 떨어진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관우는 여전히 그를 따랐다.

관우의 일생은 부침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일찌기 그는 "만인적(萬人敵)"이라 칭해졌고, 일당백의 용맹한 장수였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된 것은 그의 유비에 대한 충성과 의리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관우는 두 차례에 걸쳐 조조(曹操)에게 붙잡혔다. 조조는 그에 대하여 예우를 다했고, 높은 관직과 두터운 봉록을 약속하며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관우는 시종 유비를 생각하고,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비록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을지라도, 여전히 유비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킨다. 바로 이처럼 죽음도 불사하는 충의정신으로 관우는 후세인들이 좋아하는 영웅의 모범이 된다.

조조는 관우를 아주 아껴서 여러번 그를 회유하려 하지만, 관우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마음 속에 유비만 품는다.

화용도에서 조조를 풀어부면서 조조의 은혜를 갚는다. 여기에서 그는 "의(義)"를 달성한다. 이런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퍼졌고, 관우는 "충의"의 대명사가 된다.

관우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일대 중국인의 마음 속에 충의의 화신이 되었다. 그의 사적은 널리 칭송되면서 심지어 신성의 경지로 끌어올려진다.

민간에서, 관우는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떠받들어지며, 그에게 제사지내는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충성과 의리를 동경한다.

오늘날까지도, 관우의 정신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그의 불요불굴의 철골은 일찌감치 중화민족의 혈액 속에 용해되어 들어가 있다.

<수호전>: 관우후손 관승의 영웅적인 장거

<수호전>의 양산호한(梁山好漢)중에서 관승(關勝)은 특별한 존재이다. 그는 관우의 후손일 뿐아니라, 관우의 무예와 품격을 계승했다.

그의 무기는 관우와 마찬가지로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이다. 솜씨는 비범하고, 모략도 뛰어나다. 양산호한의 서열을 정할 때, 관승은 서열5위에 오른다. 마군오호장(馬軍五虎將)의 으뜸이다.

관승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는 원래 조정의 관리였고, 명을 받아 양산을 토벌하러 나선다.

그러나, 양산호한들과 싸우면서, 관승은 그들의 의협정신에 감동받아, 결국 의연히 양산에 가입한다.

관승은 처음에 조정의 장수였고, 명을 받아 양산을 토벌했다. 패전하여 포로가 된 후, 그는 양산호한의 기개에 감동받아 양산에 남기로 결정한다.

이 경력은 수호전의 "충의"주제에 부합한다. 무예가 고강한 노지심조차 백근무게의 선장을 만들 때,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비교한다.

관승은 양산에서 많은 일을 한다. 그는 지용을 모두 갖추고, 여러번 큰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양산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류지주(中流砥柱)가 된다.

매번 생사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관승이 들고 일어나 국면을 되돌렸다. 그는 관우의 용맹과 무술을 이어받았을 뿐아니라, 더더욱 관우의 충의정신까지 이어받았다.

양산박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죽기로 지키겠다고 맹세한다; 조정의 초안(招安)을 받을 때는 그가 앞장선다. 그는 양산을 자신의 집으로 여기고 호한들을 형제로 여겼다. 이런 관우의 정신은 관승에게서 완벽하게 체현되었다.

<서유기>: 관우의 신격화그림자.

<서유기>는 신마(神魔)이야기인데, 관우의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

손오공이 당승을 호송하여 서천으로 불경을 취하러 갈 때, 통천하(通天河)를 건너게 되고, 한 농가에 투숙한다. 그 집의 아이는 이름이 진관보(陳關保)이다. 그렇게 이름을 지은 이유는 항상 관우를 존경하고 모셨기 때문에, 관우가 보호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다.

이런 묘사는 관우가 민간에서 얼마나 숭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충의의 모범으로 관우는 백성을 보우하는 신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농가에서 아이의 이름을 "관보"로 짓는 것은 관우의 보우를 바란 것이고, 화를 피하고 복을 가져오기를 바란 것이다.

이는 관우의 이름이 후세에 널리 전해져서, 설사 신괴(神怪)가 운집한 <서유기>의 세계에서바저, 그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중에 손오공이 천정(天庭)으로 가서 태상노군(太上老君)을 만나 청우괴(靑牛怪)를 내놓으라고 할 때, 남천문(南天門)에서 4명의 천정원수(天庭元帥)를 만나는데, 그 중의 한명이 바로 관우이다.

이는 관우가 인간세상에서 존경을 받고 있을 뿐아니라, 천정에서도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진가미후왕(眞假美猴王)과 싸울 때, 이 네명의 원수는 함께 나서서 조정한다.

관우의 출현은 다시 한번 그의 신성불가침한 지위를 보여준다. 그는 여전히 초범탈속하고 신선의 반열에 들어간 것이다.

설사 하늘세계에서 이처럼 존경을 받는 손오공 앞에서도 관우는 전혀 손색이 없다. 인간정의의 화신으로서 그는 하늘의 사자로 받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점은 모두 관우가 중국문화에서 그 누구도 비견할 수 없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는 일찌감치 일개무장의 범주를 벗어나 신앙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홍루몽>: 관우의 숭고한 지위

<홍루몽>은 가부라는 대가족의 흥망성쇠를 그린 이야기이다. 관우가 나오는 장면은 아주 짧다. 그러나 무게는 남다르다.

제51회에 이환(李紈)이 "관부자(關夫子)"의 분묘를 언급하는데, 공손한 말을 쓴다. 이를 보면 관우가 민간에서 숭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별 것아닌 것같은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아주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관우가 중국문화에서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홍루몽>의 배경이 되는 청나라사회에서 관우는 이미 단순한 역사인물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부호이다. 사람들의 그에 대한 숭배는 이미 정신을 의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청나라때, 통치자는 고의로 관우를 선전했고, 그의 지위는 또 다시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려진다.

백성들은 그를 '충의'의 상징으로 볼 뿐아니라, 더더욱 그를 신으로 모셨다. 사대명저가 쓰여진 명청시기는 바로 관우의 지위가 가장 혁혁했던 시기이다.

이런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관우정신이 중국문화에 끼친 깊은 영향을 반영한다.

충의, 정직, 용무(勇武), 이런 관우의 몸에서 빛나는 특징은 바로 중화민족이 가장 고귀하게 여기는 정신적 산이다.

관우는 이미 이런 미덕의 화신이고, 영원히 퇴색되지 않을 정신적 기치가 되었다. 그리고 <홍루몽>은 관우에 대하여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은 바로 이런 문화현상의 예술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결론

사대명저의 이야기배경은 몇 개의 왕조를 넘나든다. 삼국시기부터 송나라까지, 다시 당나라에서 청나라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작가들이 창작시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관우를 자신의 작품에 언급하였다.

이는 관우의 영향력이 이미 시대의 한계를 초월하여, 중국문화의 영원한 부호가 되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