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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진(秦)나라의 통일은 "역사의 도퇴"인가?

by 중은우시 2025. 3. 11.

글: 오일주(吳一舟)

현재 우리는 역사교과서에서 많은 "변법(變法)"을 배우는데, 대부분은 긍정적인 이미지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상앙변법(商鞅變法), 왕안석변법(王安石變法), 무술변법(戊戌變法)등등이 있다. 그러나 사실이 과연 그러할까?

중국고대 최초의 변법중 하나인 상앙변법은 진나라 굴기의 근본이었다. 그것이 성공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종합하면 8자이다: "강군약민(强君弱民), 거국경전(擧國耕戰)". 그 중의 군공제(軍功制), 보갑제(保甲制), 연좌제(連坐制), 군현제(郡縣制)가 모두 이를 증명한다. 핵심목적은 단지 두 개이다:

  1. 군주집권강화. 귀족분붕제의 군권에 대한 제한을 폐지한다.
  2. 사상을 통제하고, 행위를 제한한다. 최대한도로 일민(壹民), 약민(弱民), 피민(疲民), 욕민(辱民), 빈민(貧民)(어민오술(馭民五術)). 백성을 사상부터 행동까지 반항하지 못하게 만들어, 전체 국가를 고속으로 운행하는 전쟁기기로 바꾼다.

이렇게 계속하여 확장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주요동력이었다. 제왕의 야심도 충분히 만족을 얻는다.

상앙의 사상을 집대성한 <상군서(商君書)>중 거강(去强), 약민(弱民)의 편장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그리하여 2천여년간 민간의 금서가 된다.

변법을 추진하기 위하여, 백성을 협박한다. 상앙이 하루는 위수(渭水)의 가에서 700여명의 반대자를 죽여버린다(위수대형(渭水大刑)).

공포분위기가 당시의 진나라에 신속히 만연한다. 백성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잘못 말하게 되면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고 겁을 냈기 때문에. 강권의 고압하에서는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실상, 이런 치국이념은 현대 파시스트주의와 다를 바 없다. 무솔리니치하의 이탈리아, 히틀러치하의 독일, 천황치하의 일본이 다 그러했다:

그들은 민중을 세뇌시키고, 극단적인 애국사상을 주입했으며, 선군주의를 철저히 봉행했고, 대외침략성이 극히 강했다. 그러나 일단 국가의 자원이 전쟁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게 되면, 내우외환이 물밀듯이 밀려와 정권도 돌연 붕괴해버리게 된다.

진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기형적인 치국이념은 진나라가 단명왕조가 될 운명을 결정했고, 2세만에 멸망하고 만다.

그외에 변증법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진나라의 통일은 아마도 중국역사의 대퇴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아주 간단한 문제를 제기해보자: 당시의 제후국들이 왜 진나라를 본받지 않았을까? "사진장기이제진(師秦長技以制秦)"

왜냐하면 육국은 야만과 문명의 사이에서 문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화하문명의 기반인 '귀족분봉제'와 '예악문화' 자체는 군국주의와 들어맞지 않는다.

분봉제가 주왕조 800년의 국운을 유지시킨 핵심은 두 가지이다:

  1. 문인치국(文人治國) 사고방식. 문명은 확장과정에서 도창검봉(刀槍劍鋒)에 의존하는 외에 선진적인 농경문명과 예약문화로 오랑캐를 정복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당근과 몽둥이를 함께 쓰는 것이 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단순한 폭력으로는 백성들이 조만간 반기를 들게 된다.
  2. 지방자치와 권력분할. 귀족분봉제는 국가권력을 층층이 나눈다. 군권에 대해 극도로 제한을 형성한다. 여러개의 상호견제하는 권력중심이 형성된다. 이는 제후간의 경쟁, 인재의 유동, 새로운 사상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근본이다.

그래서 그 시기의 제(齊), 초(楚), 조(趙), 연(燕), 한(韓), 위(魏)는 근본적으로 진나라를 무시했다. 진나라를 "호랑지국(虎狼之國)"이라고 멸시한다.

<전국책(戰國策).조책삼(趙策三)>에서, 이런 제나라의 모사 노중련(魯仲連)의 말이 실려 있다: 진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침략하여 전공을 세우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는 국가이다. 그들은 선비들은 권모술수로 다루고, 백성들은 노예로 삼는다. 만일 진나라황제가 이 제도를 천하에 퍼트린다면, 나 노중련은 동해에 몸을 던져 자살할지언정 그 백성이 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이 바로 "중련도해(仲連蹈海)"와 "의불제진(義不制秦)"이라는 두 성어의 출처이다. 후세에 백성들이 강력한 권력에 반항하고 절대 구차하게 목숨만 연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인민의 눈은 날카롭다.

전국시대, 사상자유로 민중들은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 살기로 결정하느냐는 실질적인 호오를 반영한다.

<상군서>의 래민(徠民)중에 이런 묘사가 있다: "진왕은 자신의 국토가 광범위하나, 사람은 많이 살지 않는다고 탄식한다. 그러나, 한, 위, 조의 삼국은 국토가 비록 협소하지만, 백성은 아주 많다. 그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 대신에게 물어본다.

대신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사람들이 서쪽으로 오지 않는 것(진나라로 오지 않는 것)은 진나라의 선비도 살기 힘들고, 백성들도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앙변법이 만들어낸 대진제국은 일찌감치 전국시대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받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나온 한 마디, "천하고진구의(天下苦秦久矣, 천하가 진나라때문에 고생한지 오래되었다)"는 것은 진왕조를 무너뜨리는 첫번째 도미노패가 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진나라를 얘기할 때 항상 추켜세우면서 다음의 몇 가지를 든다:

  1. 중국역사상 최초의 대통일왕조를 건립한다.
  2. 문자, 화폐, 도량형을 통일했다.
  3. 영토를 개척하고, 장성을 쌓아서 국방력을 강화했다.

이는 사상 깊은 곳에 심어져 있는 '대통일사상'이다. 그저 '조조(祖朝)'를 되돌아보면서 얻은 순환논증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실제생활체험, 인격조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래서 진나라의 최대 '공적'은 기실 만민을 '교화'한 것이고, 오늘날까지도 이 토지의 인민들에게 깊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실제로, 중화문화의 진정한 보물, 지혜의 결정은 백가쟁명(百家爭鳴)에서 탄생한 공맹지도, 그리고 무수한 문인들이 계속하여 창도한 "인의예지신, 온량공겸양, 충효염치용"이다. 이는 모두 '대일통'이전의 춘추전국시대에 발원한 것이다.

특히 선진시대의 묵자는 겸애(兼愛), 비공(非攻), 상현(尙賢), 상동(尙同)은 선진제가들 가운데, 세상을 구하는데 가장 절실한 인물이었다. 다만 진나라이후 대대로 이어지는 가천하(家天下)에서 인멸되었다. 국부 손중산은 <민보(民報)> 창간호에서 묵자를 '평등', '박애'의 중국종사로 추앙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전승해야 한다.

슬프게도, 군맹(群氓)이 상태(常態)가 된 당금사회에서 그것들은 중국인들에게 거의 모조리 잊혀버렸다.

진나라의 통일은 확실히 역사의 도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