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당봉엽(唐封葉)
진(秦)나라의 도성(都城)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함양(咸陽)을 떠올릴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그저 함양만 알고 있을 것이다. 기실 주효왕(周孝王)이 비자(非子)를 책봉하여, 진인들이 부용정권을 건립한 때로부터 진나라가 멸망하기까지 700년간, 함양은 단지 진나라의 마지막 도성이었을 뿐이고, 진나라의 도성이었던 기간은 140여년에 불과하다. 진나라정권의 수명중 1/5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진나라는 "구도팔천"이 있었다. 그렇다면, 진나라사람들의 9개 도성은 도대체 어디일까? 그리고 각각의 도성들은 얼마나 오래 사용되었을까? 그리고 진나라사람들은 왜 이렇게 빈번하게 도성을 옮긴 것일까? 아래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진인(秦人)의 기원과 초기역사
진인은 본래 동이(東夷)의 후예이다. 진인의 시조 이야기인 "여수탄란생대업(女修呑卵生大業, 여수가 알을 먹고 대업을 낳다)"은 상인(商人)의 "천명현조(天命玄鳥), 강이생상(降而生商)(하늘이 현조에게 명하여 인간세상에 내려와 상을 낳았다)는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대업의 아들은 바로 전설상 대우의 치수를 도운 공신 백익(伯益)이다. 백익은 치수의 공으로 영(嬴)이라는 성(姓)을 하사받는다. 그의 최초 거주지는 지금의 하남성 동북쪽에 있는 범현(范縣)일대이다. 4천여년전에 그곳의 토지는 비옥했고, 기후도 온난하고 습기가 있었다. 백익의 일족은 곡물을 획득한 후, 이삭을 돌절구에 넣어서 빻아, 낱알을 꺼냈다. 그래서 "진인"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진(秦)자는 갑골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절구공이 하나를 들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두 개의 벼(禾)가 있다. 범현은 최초의 "진(秦)"의 땅이었다.
백익이 죽은 후, 그의 후손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하나라말기 백익의 둘째아들 약목(若木)의 후손인 비창(費昌)은 성탕(成湯)의 어수(御手, 수레를 모는 사람)의 신분으로 상인이 하를 멸하는 '명조지전(鳴條之戰)'에 참가한다. 그 공로로 진인과 상인은 관계가 가까워진다(둘 다 동이집단에 연원을 두고 있다). 영성의 일족은 상왕조때 크게 중용되어 세력을 떨친다. 상왕조의 제9대군주 태무(太戊)가 재위하고 있을 때, 백익의 큰아들 대렴(大廉)의 후손인 맹희(孟戱), 중연(中衍)이 특별히 인정을 받아, 모두 상왕 어거(御車)의 어수가 된다.
상나라말기, 중연의 후손 중율(中潏)이 상왕(개략 상왕조의 끝에서 두번째 왕인 帝乙일 것이다)에 의해 상왕조의 서부에 분봉받는다. 즉 오늘날 산서성(山西省) 남부의 곽태산(霍太山)일대이다. 그들은 상왕조를 대신하여 융적(戎狄)을 막으면서 상왕조의 서부변경을 지켰다. 중율의 아들은 비렴(飛廉, 蜚廉이라고도 씀)이고, 손자는 악래(惡來)이다. 그때 비창에게도 유명한 후손이 있는데 이름이 비중(費仲)이다. 모두 아는 것처럼, 비중, 비렴, 악래 세 사람은 상나라 주왕(紂王)의 총애를 받은 신하들이다.
나중에 무왕벌주(武王伐紂)때, 악래와 비중은 주왕에 충성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주인(周人)들에 포로로 잡혀 피살당한다. 비렴은 외부에 나가 있어서 화를 면하고, 먼저 봉지의 곽태산으로 숨어들어간다. 몇년후 다시 상왕의 아들 무경(武庚, 祿父)와 함께 주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최종적으로 주공단(周公旦)에 의해 동해변에서 참살당한다. '전조여얼(前朝餘孼)'에 대한 징벌로, 주공단은 비렴의 아들 계승(季勝)을 포함한 비렴의 일족을 천리 멀리 떨어진 서쪽 변경의 주어(邾圉, 지금의 감숙성 감곡현 서남쪽)로 보내버린다. 그들은 주나라를 위해 변방에서 융(戎)을 막는 사람이 된다. 주어는 이로 인하여 주나라때 진인들이 서부에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 된다.
진의 첫번째 도읍: 진읍(秦邑)(지금의 감숙성 청수현 북쪽)
존속기간: 기원전약890년 - 기원전822년(60여년간)
거주군주: 비자(非子), 진후(秦侯), 공백(公伯), 진중(秦仲)의 4명
많은 사람들은 주어가 감숙성에 있으므로, 아마 자연스럽게 그곳을 황토로 덮여 있고,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한 곳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지만, 기실 그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만일 지금 감곡현 서남의 고파향(古坡鄕)일대를 가본다면, 거기는 고원초원으로 삼림이 무성하고, 물과 풀이 풍성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천여년 전의 서주초기에는 황하유역의 기온이 지금보다 보편적으로 2-3도가량 높았고, 자연도 인위적으로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당시 주어의 환경은 지금보다는 한단계 더 좋았을 것이다. 비렴의 일족은 주어의 현지에서 ㅗ지를 개간하며 오곡을 심었고, 소, 양, 말을 방목하여 목축업도 겸해서 생활이 점차 안정되어갔다.
주성왕(周成王)때, 성왕은 계승의 장남 맹증(孟增)을 총애하여 그를 고랑(皋狼, 지금의 산서성 여량시 이석구 서북쪽)에 봉한다. 주목왕(周穆王)때, 목왕은 맹증의 손자 조보(造父)를 중용하여 그를 조성(趙城, 지금의 산서성 홍동현 조성진 동북)에 봉한다. 그리하여 영성(嬴姓)의 사람은 주나라에서 정치적인 지위가 점차 제고된다.
주왕조는 제7대 주의왕(周懿王)때부터 국세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사방의 융적이 차례로 침입한다. 서방의 융족이 주나라를 침범할 때, 여전히 주어일대에 거주하며 변방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영성의 비렴후손이 가장 앞장서서 막아야 했다. 그후 그들은 서융과의 충돌이 날로 빈번해지고 격렬해졌다. 융성은 현지에서 이미 4,5대이상을 살았으므로, 주어일대는 일찌감치 그들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주나라를 위하여 전투를 할 뿐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전투를 했다. 이렇게 하여 계속되는 충돌과 전쟁은 점점 서부전선의 제일선에 나가 있던 영성의 비렴후손들로 하여금 용맹하고 사나우며, 견인집요한 성격을 키우게 된다.
서주의 여덟번째 천자이자 주의왕의 숙부인 주효왕(周孝王)이 즉위한 후,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마정(馬政)의 개선을 특히 중시한다. 당시 비렴의 장남 악래의 후손이자 비렴으 7대손 비자(非子)가 주어남쪽의 서견구(西犬丘, 西垂라고도 함)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감숙성 예현 동부일대이다. 주효왕은 비자가 말을 잘 기른다는 말을 듣고, 또한 그가 주목왕때 수석어수 조보의 본가조카손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비자를 견수(汧水), 위수(渭水)가 만나는 곳에 있는 조정목장(지금의 섬서성 보계시 동쪽)을 주관하도록 명한다. 이 비자는 추천인과 숙조부 조보의 체면을 깍아먹지 않고, 그의 관리하에 조정의 말은 아주 튼튼하게 자랐고, 말들은 신속히 번식하여 컸다. 비자의 양마의 공로에 치하하기 위해, 주효왕은 '진읍(秦邑)'이라는 작은 성읍을 비자에게 봉한다. 이 진읍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서견구의 동북쪽으로 약 백여리 떨어진 곳이며, 오늘날 감숙성 청수현 성북쪽의 이애(李崖)유적지 일대이다. 땅이 넓지 않고(방원 오십리가 되지 않는다), 제후의 표준에 들어가지 못해, 당시의 진(秦)은 그저 '부용(附庸)'이라 할 수 있다. '부용'은 적접 조정과 교섭할 자격이 없고, 그저 모 제후국에 빌붙어 있는 것이다. 이 '진읍'에 위치한 부용소정권이 바로 나중에 그 이름도 유명해지는 '진나라'의 최초모습인 것이다.
비자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진후, 손자, 공백, 증손자 진중이 차례로 승계하여 모두 진읍의 '성주'가 되어, 진나라의 서쪽변경을 지킨다.
진의 두번째 도읍: 서견구(서수라고도 함. 지금의 감숙성 예현 동쪽)
존속기간: 기원전822년-기원전777년(46년)
거주군주: 진장공(秦莊公), 진양공(秦襄公)의 두 사람.
대보자산(大堡子山)
주선왕(周宣王) 초기, 진중은 주천자의 명을 받들어 침범해온 서융과 싸우다가 불행히 전사한다. 진중의 아들 진장공등 다섯 형제는 부친을 위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들은 일족의 군대와 주나라에서 빌린 7천의 군대를 이끌고 서융을 공격하여, 일거에 본조의 옛땅 서견구(지금의 감숙성 예현 동쪽 대보자산 유적지)를 수복한다. 이렇게 하여, 진인의 관할지는 몇배로 확대된다. 얼마 후, 진장공은 도성을 진읍에서 조상대대로 거주해온 서견구로 옮긴다. 서견구는 진인의 초기 '성도(聖都)'가 된다
진의 세번째 도읍: 견읍(汧邑, 지금의 섬서성 농현 동남쪽)
존속기간: 기원전776년 - 기원전 766년(11년)
거주군주: 진양공(秦襄公) 한명.
주유왕(周幽王) 4년, 진장공 44년(기원전778년), 서수대부(西垂大夫) 진장공 진기(秦其)가 사망한다. 그후 그의 둘째아들이 승계하니 그가 바로 진양공이다. 2년후(기원전776년), 아마도 군주지위를 양보한 큰형 세보(世父)를 위해서인지, 진양공은 서견구를 그에게 넘겨주어 거주하게 하고, 자신은 농산 동쪽의 견읍으로 옮긴다. 그리고 견읍은 당시 주나라의 도성 호경(鎬京)과 더욱 가까웠다. 그러나 당시 진인의 종묘(宗廟)는 여전히 서견구에 있었고, 견읍은 배도(陪都)의 성격이 있었다.
얼마 후, 주유왕이 서신국(西申國) 출신의 신강왕후(申姜王后)와 태자의구(太子宜臼)를 폐위시키고, 포사(褒姒)와 백복(伯服)을 총애하자, 주나라와 서신국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한다. "청화간(淸華簡)"의 <계년(係年)>기록을 보면, 먼저 주나라군대가 서신을 포위공격하고, 나중에 서신이 견융을 끌어들여 주나라에 반격을 가하고, 주유왕을 죽여버린다. 그동안 진양공은 병력을 동원해 주나라를 도운다. 그리고 나중에 주평왕에 의해 제후에 봉해진다. 그리고, '백지수표'를 써서 진인에게 '기산 서쪽의 땅'을 하사한다. 진인은 이렇게 정식 입국하게 된다.
이어진 몇년동안, 진양공은 진나라군대를 이끌고 계속하여 위하평원서부의 융족부족과 전투를 벌이면서 약간의 융족이 점령했던 토지를 회복한다. 진양공12년(주평왕5년, 주휴왕5년, 기원전766년), 진양공은 진군을 이끌고 융족을 토벌하여, 주인의 용흥지지 기산(岐山)자락까지 쳐들어간다. 전투과정에서 진양공 본인도 부상을 입는다. 사서에서는 그가 전쟁중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진인들이 주평왕이 허락한 모든 땅(즉, 기산 서쪽의 땅)을 차지하는 것을 보기도 전에.
진의 네번째 도성: 견위지회(汧渭之會,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 진창구 간하진, 고견수 서안)
존속기간: 기원전762년 - 715년(48년)
거주군주: 진문공(秦文公), 진헌공(秦憲公) 두 명
진양공이 죽은 후, 아들 진문공이 즉위한다. 처음에 진인의 '성도'인 서견구의 서수궁(西垂宮)에 거주하였다. 그도 웅심장지의 군주이다. 주평왕이 '하사'한 기산 서쪽으 땅을 차지하여야 하여 진인의 확장대업을 실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진문공3년(주평왕8년, 주휴왕8년, 기원전763년) 연말, 주문공은 사냥을 명목으로 700명의 장병을 이끌고 동쪽으로 떠나 농산을 넘어 위하평원의 서쪽 끝에 도달한다. 진문공 4년초, 그들은 소위 '견위지회' 즉 견수(지금은 千下라고 쓴다)와 위수가 만나는 지점 즉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 일대에 이른다.
두 강이 만나는 삼각주이므로 토지는 당연히 아주 비옥했다. 이곳은 또한 옛날 비자가 주효왕을 위해 말을 기르던 옛땅이다. 그리하여 진문공은 개위지회에 궁전을 짓도록 명하고 그곳에 정착한다. 이때 서견구는 여전히 진인의 종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정치중심은 실제로 이미 동쪽으로 이전했다.
진문공은 재위50년만에 사망한다. 그리하여 아들 진정공(秦靜公)이 먼저 죽고, 손자 진헌공이 승계한다.
진의 다섯째 도성: 평양(平陽,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 진창구 양평진, 고견수 동안)
존속기간: 기원전714년-678년(37년)
거주군주: 진헌공, 진출자(秦出子), 진무공(秦武公) 3명
진헌공2년(714년), 진헌공은 동쪽으로 확장하는 국책에 기하여, 다시 고견수의 동안(지금의 보계시 진창구 동부)에 새로운 궁전 평양궁(平陽宮)을 짓고, 그곳에 거주한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개위지회이건 ㅕㅇ양이건 진군은 모두 먼저 궁전군을 짓고나서 거주했지, 상응하는 외곽성벽은 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당시 진나라의 국력이 그다지 강하지 못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 진인의 계속 확장하려는 정신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진인은 계속하여 동진했고,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지 아무도 알 수 없었기 떄문이다.
이어서, 진헌공은 조부가 개척한 발걸음을 따라, 계속하여 위하평원의 각종 적대세력을 소탕한다. 진헌공이 10여년간 대외확장전쟁을 벌여 진나라의 동쪽국경은 기산일대에서 풍호(豊鎬)일대로 나아간다. 동으로 약 200리를 확장한 것이다. 위하평원의 2/3는 진나라가 차지했다.
아쉽게도 진헌공은 젊은 나이에 죽는다. 22살때 죽었다. 당시 진나라의 대서장(大庶長)을 맡고 있던 3명의 권신인 불기(弗忌), 위루(威壘)와 삼보(三父)는 국정을 오래동안 장악하기 위해, 폐장입유(廢長立幼)하여, 나이가 가장 어린 당시 5살의 진출자를 진나라국군으로 옹립한다. 진출자6년, 비기(費忌)등이 진출자를 시해하고, 다시 진헌공의 장남 무공(武公)을 옹립한다. 진무공3년(주장왕2년, 기원전695년), 그때까지 고분고분하던 진무공이 돌연 비기, 위루와 삼보 세 명의 권신을 체포한다. 친정을 실현한 후, 진무공은 차례로 기현(冀縣, 지금의 감숙성 감곡현 남쪽), 규현(邽縣,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 남쪽), 두현(杜縣,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남쪽)과 정현(鄭縣, 지금의 섬서성 위남시 화주구)등의 현을 설치하고, 국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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