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당봉엽(唐封葉)
진의 여섯째 도성: 옹성(雍城, 지금의 섬서 봉상 남쪽)
존속기간: 기원전677년 - 기원전384년(280여년, 중간에 진령공이 잠시 경양으로 천도하였음)
거주군주: 진덕공, 진선공, 진성공, 진목공, 진강공, 진공공, 진환공, 진경공, 진애공, 진혜공, 진도공, 진려공공, 진조공, 진회공, 진령공, 진간공, 진후혜공, 진출공, 진헌공의 19명
진무공이 사망한 후, 그의 둘째동생 진덕공이 즉위한다. 이는 진무공이 다시 한번 권신이 권력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취한 정치적 조치인지는 모르겠다. 당연히 진덕공이 승계한 후 조카이자 진무공의 아들인 공자백(公子白)을 잘 보살펴 주었다. 그는 진헌공, 진출자, 진무공 3명의 국군이 거주한 평양궁 및 주변토지를 공자백의 봉읍으로 넘겨준다. 그리고 진덕공은 스스로 옹지(雍地, 지금의 섬서성 봉상 남쪽)로 가서 대정궁(大鄭宮)을 짓고 그곳을 국군의 거주지로 삼는다.
진덕공은 왜 옹지를 선택했을까? 평양은 비록 견수의 동쪽 위하하곡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지만, 진나라가 동진하는데는 땅이 좁고, 방어하기 불편한 폐단이 있었다. 옹지는 지세가 널찍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서쪽과 북쪽에 영산, 군파산이 있고, 동쪽과 남쪽에는 횡수와 견수, 위수가 흐르고 있어, 안전성이 비교적 높았다. 그래서 후세 십여명의 진나라국군은 모두 대정궁 주변에 궁전, 종묘, 제사장소들을 건축했다. 그렇게 하여 유명한 옹성이 이렇게 출현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할 점은, 처음에 옹성은 외곽성벽이 없었다. 그저 궁전들이 보통주민지역과 수공업지역에 붙어 있었다. 옹성을 도성으로 정한 첫 100여년간, 진나라의 궁력은 강대해서 주변을 위협하고 있으므로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었다. 옹성의 외곽성벽은 춘추말기 진도공(秦悼公)이 재위하던 시기(기원전490-기원전477년)에 비로소 만들어진다.
고고학발굴에 따라 진나라의 옹성은 동서로 근 3,500미터, 남북으로 근 3,100미터에 이르고 총면적이 1000여만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그중 궁전, 종묘, 묘장의 규모도 아주 거대했고, 화려했다. 알아야 할 점은 당시 주천자가 거주하는 왕성도 2,890미터(동서너비) X 3,700미터(남북길이)의 규모에 불과했다. 진목공때 서융(西戎)의 사자(使者)이자 진(晋)나라출신의 현신 유여(由余)는 옹성의 호화웅장함에 탄성을 질렀다: "귀신을 시켜서 만들었으면 신을 힘들게 했을 것이고, 사람을 시켜서 만들었으면 백성을 괴롭혔겠다." 그리하여, 옹성은 진인들이 흥성하는 기점이 되고, 진나라에서 보유한 대국기상을 가진 최초의 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진인의 각종 제사장소도 옹성의 주변에 밀집되어 있었다. 고인들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국가의 대사는 제사(祀)와 전쟁(戎)이다." 이를 보더라도 옹성의 중요성이 충분히 드러난다. 나중에 진나라가 비록 함양으로 천도하기는 했지만, 중대한 제사와 전례활동은 여전히 옹성에서 거행했다. 예를 들어 진왕(秦王) 영정(嬴政)이 관례(冠禮)를 진행한 것도 바로 옹성의 기년궁(蘄年宮)이다. 만일 서견구가 '입국지도(立國之都)'로서 진인들에게 최초의 '성도(聖都)'라고 한다면, 옹성은 바로 진인의 두번째 '성도'이다.
진덕공은 재위기간이 짧았다. 그의 사후 장남 진선공(秦宣公), 차남 진성공(秦成公), 삼남 진목공(秦穆公)이 차례로 국군의 지위를 승계한다. 진목공은 춘추시기 유명한 명군이다. 그는 5장의 양피(羊皮)로 현신 백리해(百里奚)를 데려왔고, 동으로 '삼치진군(三置晋君, 진나라내정에 간섭하여 진혜공, 진회공, 진문공의 국군 3명을 세 것을 가리킴)하고, 양국(梁國), 예국(芮國)을 멸망시키고, 진(晋)나라와는 대체로 황하를 경계로 했다. 그는 계책을 써서 현신 유여를 데려왔고, 대담하게 '효지전(殽之戰)'의 패장 맹명시(孟明視)를 대담하게 신용했다. 서쪽으로는 "12개 융국을 취하여, 영토를 천리 넓히고, 서쪽의 패자가 된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의 강역과 국력은 춘추시기의 최전성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진목공의 사후, 진(晋)나라의 패업이 날로 공고해지면서, 진(秦)은 상대적으로 쇠락한다. 진인(秦人)의 하서(河西)토지는 점차 진인(晋人)에게 잠식당한다. 진환공, 진경공때, 진(晋)나라는 두 차례에 걸쳐 진(秦)의 복지(腹地)로 쳐들어 온다(즉 마수지전(麻隧之戰)과 천연지역(遷延之役)). 앞의 전쟁에서는 후려(侯麗, 지금의 섬서성 예천 동쪽)까지 쳐들어오고, 뒤의 전쟁에서는 진나라의 도성 옹성까지 다가온다. 이렇게 하여 진(秦)나라의 위세는 땅바닥에 떨어진다. 춘추말기 옹성이 외곽성벽을 쌓은 것은 기실 진인(秦人)들이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진의 일곱째 도성: 경양(涇陽, 지금의 섬서성 경양 서북쪽)
존속기간: 약기원전422 - 기원전415(근10년)
거주군주: 진령공(秦靈公) 1명
전국초기 조(趙), 위(魏), 한(韓)이 지씨(智氏)를 소멸시키고, 진(晋)의 영토를 3분하여 나누어가진다. 삼가(三家)는 제후의 칭호가 없는 제후가 된다. 위씨의 위문후(魏文侯)는 이회(李悝)의 변법을 쓰고, 오기(吳起)를 기용하여 '위무졸(魏武卒)'을 키워내며, 국력과 군사력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전국시대 제일강국으로 성장한다. 이와 동시에 위씨는 적극적으로 서쪽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진(秦)나라와 하서의 땅(황하 서쪽, 고대북낙수동쪽의 구역을 가리킴)을 두고 쟁탈전을 벌인다.
진(秦)과 위(魏)가 하서의 땅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을 때, 진나라의 도성 옹성은 전체 위하평원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하서의 땅과 거리가 멀다는 폐단이 드러난다. 이 시기에, 진조공(秦躁公)은 자식을 두지 못하고 병사하자, 진(晋)나라에서 귀국하여 국군의 지위를 승계한 진회공(秦懷公)은 개혁을 추진하여, 진나라의 위세를 다시 떨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구귀족세력의 이익을 건드리다보니 구귀족세력에 피살당한다. 그후 여러 신하들이 진회공의 손자 진령공(秦靈公)을 옹립하여 국군의 지위를 승계하도록 한다. 동부의 전쟁을 지휘하기 편리하고, 동시에 구귀족세력에게서 벗어나기 위하여, 진령공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도성을 옹성에서 동쪽으로 300여리 떨어지고 전체 위하평원의 중앙에 위치한 경양으로 옮긴다. 진령공이 경양으로 천도한 구체적인 시기는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진령공3년이후일 것이다. 경양은 군사요지이고, 마수지전과 천연지역때, 진(晋)나라군대는 모두 경양에서 경하(涇河)를 건너 서쪽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고고학발굴에서 경양일대에서 대형궁전유적지가 발굴되지 않았다. 이를 보면 경양은 단지 군사 배도(陪都)의 성격을 지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령공사후 그의 아들 공자련(公子連, 나중의 진헌공)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은 진(晋)나라에서 모셔온 진령공의 막내숙부이자 진회공의 막내아들인 도자(悼子)를 새로운 국군으로 세운다. 그가 진간공(秦簡公)이다. 공자련은 어쩔 수 없이 삼진(三晋)으로 도망친다. 비록 사서에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후 진나라의 도성은 분명 옹성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진간공의 즉위는 찬탈에 해당한다. 그는 반드시 진령공의 조치를 부정하고 진령공의 세력이 비교적 큰 경양을 피해야 했을 것이다. 둘째, 사서기록에 따르면, 진령공, 진간공 및 그후이 진후혜공(秦後惠公)은 모두 옹성에 묻혀 있다. <여씨춘추>는 진출공(秦出公)이 옹성에서 피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경양은 진나라도성으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진간공, 진후혜공이 위나라와 하서를 쟁탈하는 기간동안 경양에서 전쟁을 지휘했을 가능성도 있다.
진의 여덟째 도성: 역양(櫟陽,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염량구 무둔진)
존속기간: 약기원전383년 - 기원전350년(34년)
거주군주: 진헌공, 진효공 2명
진간공6년, 위문후16년(기원전409년), 위나라는 명장 오기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정예부대 '위무졸'을 출동시켜 대거 진나라를 공격한다. 다음 해, 거의 모든 하서지역이 위나라에 점령당한다. 위나라사람은 빼앗은 땅에 서하군(西河郡)을 건립하고, 오기를 초대 서하수(西河守)로 임명한다.
진간공은 깊이 반성한 후, '초대검(初帶劍)', '초조화(初租禾)'등 개혁을 실행한다. 진후혜공은 재위기간 초(楚)나라와 연맹을 회복시키고, 위나라와 계속하여 하서의 땅을 놓고 쟁탈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기는 경우보다 지는 경우가 많았다. 진후혜공이 사망한 후, 나이 겨우 1살이 넘은 진출공이 즉위하고, 그의 모친 소주부인(小主夫人)이 섭정한다. 해외에서 30년간 망명생활을 했던 진령공의 아들 공자련이 위나라에서 돌아와, 국내의 서장균개(庶長菌改)의 도움으로 옹성으로 들어가 국군의 자리를 빼앗는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사습(師隰)으로 고친다. 역사에서 진헌공(秦獻公)이라 불린다.
진헌공은 삼진의 변법내용을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등극초기 혁신정책을 대거 실시하고, '지종사(止從死)'의 명령을 내린다. 즉 진나라에서 근 400년간 시행해 오던 야만적인 순장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진헌공2년(383년), 진헌공은 동방전략요지 '역양'에 성벽을 쌓고, 도성을 옹성에서 역양으로 옮긴다. 고고학발굴에 따르면, 역양성유적지는 동서로 길이가 1.8킬로미터, 남북으로 길이 2.4킬로미터이다. 역양은 위나라에서 설치한 서하군과 아주 가깝다. 겨우 백여리의 거리이다. 진헌공은 도성을 '전선'으로 옮긴 것이다. 이는 위나라에 하서실지를 수복하겠다는 결심과 뜻을 확고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천도를 통하여 진헌공은 구귀족세력이 모여있는 구도 옹성을 피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었다.
역양으로 천도한 후, 진헌공은 연이어 현제(縣制), 초행위시(初行爲市)(도성내에 무역상점을 설립하다), 호적상오(戶籍相伍)(전국인구를 오가(五家)를 오(伍)로 편제한다)등 개혁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국가의 하층백성에 대한 통제를 크게 강화하고, 국가의 세금징수와 군인징발에 편의를 도모한다 .이런 개혁으로 진나라는 더욱 견실한 기초를 닦게 된다.
진헌공23년(기원전362년), 진헌공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진효공(秦孝公)이 즉위한다. 그는 상앙(商鞅)을 기용하여 변법을 시행한다. 상앙은 역양에서 "사목위언(徙木爲言)'하며 군공작제(軍功爵制)로 세경세록제(世卿世祿制)를 대체하고, 중농억상(重農抑商), 십오연좌제(什伍連坐制), 분호령(分戶令), 유가전적소각등 제1차변법법령을 반포하고, 진나라의 국력은 현저히 상승한다.
진의 아홉째 도성: 함양(咸陽, 지금이 섬서성 함양)
존속기간: 기원전349년 - 기원전206년(144년)
거주군주: 진효공, 진혜문왕, 진무왕, 진소양왕, 진효문왕, 진장양왕, 진시황, 진이세, 자영등 모두 9명
상앙의 제1차변법때, 진나라는 위나라가 계릉지전(桂陵之戰, 즉 圍魏救趙의 그 전쟁)에서 참패한 후 한때 소량(少梁), 원리(元里)등 하서의 실지를 수복하고, 하동의 위나라 옛도성 안읍(安邑)까지 점령한다. 다만 중원혼전이 끝난 후, 위나라는 진나라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여, 진나라로부터 위의 지역을 모두 되찾는다. 이를 보면 진(秦)의 국력은 아직 위(魏)를 압도할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후 상앙은 제2단계변법을 개시하는데, 첫번째 조치가 바로 천도이다.
당시, 역양은 비록 하서전선에 가까워서 하서쟁탈전을 지휘하는데 편리하였지만, 진나라가 발전함에 따라 일국의 도성으로서의 폐단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위치가 지나치게 동북방향에 편중되어 있어서, 땅이 좁아 추가로 발전하는데 불리했다. 그외에 역양은 도성으로 30여년이 되다보니, 이곳에 다시 수구세력이 대거 집결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속박을 벗어나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그리고 진나라를 위하여 더욱 전망이 좋은 도성을 찾기 시작한다. 진효공12년, 상앙은 진효공의 명을 받아 경양의 정남방, 위수북안의 함양에 궁궐을 건축한다. 그리고 다음해 정식으로 천도한다. (<사기.상군열전>에 따르면, 진은 옹성에서 함양으로 천도했다고 말한다. 이는 진헌공이 비록 역양으로 천도했지만, 그건 임시적인 성격이고, 법리상의 진나라도성은 여전히 옹성이었다는 것이다)
동북에 치우친 역양과 비교하면, 함양은 거의 전체 진나라의 중심위치이다. 그리고 위하에 접하고 있어 교통이 더욱 편리하다. 특히 진나라가 동으로 효함고도(崤函古道)를 지나 중원을 쟁탈하는데 유리했다. 이는 진나라국군이 이미 더욱 큰 포부와 시야를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함양일대의 토지가 더욱 비옥하여 농업경제가 발달하고, 인구도 많았다. 역사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함양은 서주의 풍호이경(豊鎬二京)과 아주 가까워, 문화적인 분위기가 농후하고, 왕기가 충분하다. 그래서 진효공이 함양도성으로 천도한 후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140여년간 진인들은 더 이상 도성을 바꾸지 않는다.
함양천도후, 상앙은 다시 전국에 현제(縣制), '폐정전,개천맥(廢井田, 開阡陌)', 도량형통일등 법령을 추진한다. 진나라변법은 육국 가운데 비교적 늦었찌만, '후래거상(後來居上)'했다. 미치는 범위가 아주 넓었고, 사회에 대한 영향도 가장 컸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탈태환골의 변화를 이룰 수 있었고, 진나라를 '이출일공(利出一孔)'(耕戰)의, 관청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개인과 사회가 극도로 위축된 군국주의국가로 만든다. 진나라사람들은 원래 무를 숭상했는데, 상앙의 제도설계하에서 진나라는 최대한 국내인력, 재력, 물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다른 육국은 주관적, 객관적 요소로 인해 이를 해낼 수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진나라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그후 상앙은 비록 효공의 아들 진혜문왕에게 살해당하지만, '진법은 고치지 않았다'. 진혜문왕의 재위기간 장의(張儀)의 연횡(連橫)정책을 써서, 하서, 상군을 수복하고, 파촉을 멸명시키고, 초나라를 격패하며 진왕(秦王)으로 자처한다. 그리하여 진나라 최초의 왕이 된다. 중원제후(초,월등 멀리 떨어진 변방국가는 제외)중에서 세번째로 왕을 칭한 인물이 된다(첫째, 둘째는 위혜왕과 제위왕이다). 진소양왕은 범저(范雎)를 재상으로 삼고, 백기(白起)를 장수로 삼아. 원교근공의 책략을 써서, 위, 초, 조등을 대파한다. 그리고 주를 멸망시키고 구정을 옮기며, 통일의 기초를 닦는다. 마지막으로 진시황이 '분육세여열(奮六世餘烈)'로 마침내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제업을 이룬다.
상앙이 만든 함양성은 원래 위하의 북안에 있었따. 진나라의 발전과 더불어, 진소양왕 이후 도시가 점차 위하 남안으로 확장된다. 중간은 다리로 연결시킨다. 그리하여 위하 양안을 가로지르는 대형 번화도시가 형성된다. 진시황은 천하통일후, 다시 육국궁실, 아방궁(阿房宮), 극묘(極廟)등을 건축한다.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함양은 계속 확장된다. 이궁, 별관은 수백리 범위내에 분포되어 있었고, 함양은 진나라도성에서 기세가 굉위한 '천하의 도성'이 되었다. 특히 언급해야할 점은 고고학자들이 지금까지도 함양지구의 고고학발굴에서 진나라때 함양성의 외곽성벽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옹성, 경양, 역양등 이전 도성이나 동방각국의 도성과 달리, 외곽이 없는 개방형도시였다. 마치 현대도시와 같았다. 앞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진나라사람들은 동으로 농산을 넘은 이후, 견위지회와 평양궁에 모두 외곽성벽을 만들지 않았다. 옹성으로 천도한 이후 19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옹성의 외곽성벽을 쌓는다. 진나라사람들이 이렇게 한 것은 한편으로 국력이 유한했기 때문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진나라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진취적인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국한되거나 속박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특히 진효공이후, 진나라의 국력은 계속 성장하여, 동방으로 영토를 개척하려던 민족에게 자신의 도성에 방어적인 성벽까지 쌓을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유방이 군대를 이끌고 관중으로 쳐들어왔을 때, 자영은 지킬 성이 없었고, 이건 진나라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당연히 진나라가 멸망한 것이 함양을 수도로 삼았기때문은 아니다. 상앙이 건립한 '극대국가, 극소사회'의 전제국가모델은 백성에 대한 통제가 엄밀하다. 진시황, 진이세에 이르러 그들은 큰 공사를 벌이는 것을 좋아했고, 호화사치가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에 대한 압박과 수탈이 도저히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결국 진왕조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결론
주효왕이 비자를 책봉한 때부터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진나라사람드은 전후로 진읍, 서견구(서수), 견읍, 견위지회, 평양, 옹성, 경양, 역양, 함양등 9개의 도성을 가졌고, 전체적인 추세는 서에서 동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진나라사람들이 한번 도성을 이전할 때마다 진나라사람들의 능동성과 진취성을 엿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진나라의 영토를 확장하고, 진나라사람들의 역량을 강화시켰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중 진읍은 비록 최초의 도성이지만, 당시 진인의 지위는 아주 낮았고, 세력도 약소했다. 그리하여 그럴 듯한 궁성이나 제사장소도 마련하지 못했다. 견읍, 견위지회, 평양은 모두 진나라국군이 동진하는 과정에 탐색적으로 임시주둔지로 삼은 곳이다. 경양과 역양은 진인이 위나라와 하서쟁탈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군사적인 도성이었다. 아홉개의 도성중에서 진인의 마음 속에 가장 중요한 곳은 서견구, 옹성과 함양의 세 곳이다. 서견구는 진양공이 '서치(西畤)'를 설립한 제천입국지도(祭天立國之度)였다. 옹성은 진나라사람들이 가장 오랫동안 도성으로 삼았고, 제사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예제지도(禮制之都)이다. 함양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천하지도(天下之都)이다. 진나라사람들의 아홉개 도성과 그 천도과정을 이해하면, 진나라사람들이 처음 흥기하고, 굴기하고 강대해지고 통일한 700년의 발전맥락을 모조리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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