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귤(紫橘)
문천상(文天祥)은 중화민족의 영웅이다. 그의 <과령정양(過零丁洋)>, <정기가(正氣歌)>는 대대로 중화자녀들의 자강분투정신을 자극했다. 다만 원나라때 편찬한 <송사(宋史)>에는 이 살신성인의 영웅의 '오점'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인 이미지 속에서 문천상은 인격상 하자가 전혀 없으며, 포로로 잡힌 후에도 불굴의 정신을 견지하다가 결국 의롭게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송사>에는 그가 살고 싶어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나라에 투항한 후, 도사(道士)의 신분으로 황색도관을 쓰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만일 원나라황제가 계책을 묻는다면, 자신은 기꺼이 계책을 바치겠다고까지 했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이를 "황관고향(黃冠故鄕)"이라고 부른다. 이런 내용은 사람들의 인식에 큰 충격을 가한다. 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게 되었을까? 이 이야기는 사실일까 아닐까? 그렇다면 문천상은 겉과 속이 다른 소인이었을까? 만일 거짓이라면, 원나라사람들은 왜 이런 내용을 날조했을까? 이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명청이래 사학계에서 계속 논쟁이 있어왔다. 이 일을 분명히 해야만, 우리는 문천상의 진실한 면모를 더욱 잘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 "황관고향"의 시작
명나라말기의 민족영웅 장황언(張煌言)은 절명시(絶命詩)에서 한 가지 전고(典故)를 인용하는데, 소위 "황관고향혜(黃冠故鄕兮), 비여심지소형(非予心之所馨)"이다. 그 뜻은 자신은 죽기를 원하지, 도사의 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평안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황관고향'의 출처는 바로 <송사>이다.
원나라때 편찬한 <송사.문천상전>에는 이런 기이한 기록이 있다. 대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문천상이 포로로 잡힌 후, 연경의 역관(驛館)에 도착한다. 그후 병마사(兵馬司)로 이송된다. 옥졸은 문천상에게 원나라황제는 현명한 인재를 갈구하고 있고, 남방의 한인이라고 하더라도 예로서 대하며, "다구재남관(多求才南官)"한다고 말한다. 일찌기 원나라에 투항했던 구 송나라관료인 왕적옹(王積翁)은 쿠빌라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방의 인사들은 재능으로 보아 문천상에 비견할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쿠빌라이는 왕적옹으로 하여금 문천상을 회유하도록 시킨다. 왕적옹은 감옥으로 들어가, 매국노가 항일전사를 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우호'적인 제스추어를 보인 후, 원나라의 업적을 칭송한다. 마지막으로 문천상에게 살아 남을 것을 권한다. 그 말을 들은 후, 문천상은 왕적옹에게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멸망했으니, 그저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다행히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도사의 관복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고, 하루종일 원나라조정에서 일하기를 원치는 않는다. 만일 언젠가 황제(쿠빌라이를 가리킴)가 필요로 한다면, 고향에서 나는 건의와 헌책을 하길 원한다. 그후 왕적옹등 구 송나라관료들은 집단으로 쿠빌라이에 청하여 문천상을 석방해서 그가 도사가 될 수 있도로 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함께 송나라에서 투항한 관료출신의 유몽염(留夢炎)은 쿠빌라이에게 '방호귀산(放虎歸山, 호랑이를 풀어서 산으로 돌려보내다)'하지 말 것을 주청한다. 그가 만일 남방으로 돌아가면, 다시 한번 힘을 모아 강남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한다. 그후 조정은 문천상을 계속 감금해둔다.
지원19년, 복건에서 온 승려가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에서 이런 소문을 퍼트린다. 토성(土星)이 제성(帝星)을 침범했다고. 얼마후 다시 산에서 내려온 미치광이가 대도에서 "송주(宋主)"가 병력 천명을 보내 대도에서 문승상을 구할 것이라고 소리친다. 이어서, 대도에는 익명의 글이 돌게 되는데, 곧 누군가 대도에 불을 지르고 성을 기습할테니, 승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결국 쿠빌라이는 문천상을 불러 그에게 투항할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보게 된다. 문천상은 "천상수송은(天祥受宋恩), 위재상(爲宰相), 안사이성(安事二姓), 원사지일사족의(願賜之一死足矣)(나 문천상은 송나라의 은혜를 입어 재상이 되었는데, 어찌 두 성(왕조)를 섬길 수 있겠는가. 죽음을 내려주면 만족한다)" 쿠빌라이는 결국 그를 처형하도록 명을 내린다.
<송사>의 기록을 보면, 문천상의 충성심은 동요한 적이 있다. 그는 죽겠다고 마음을 굳히지는 않았었고, 삶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심지어 원나라의 고문이 되려는 생각까지 했었따. 다만 최종적으로 여러가지 우연한 일들이 겹치면서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단두대로 간 것이다.
2. 명나라사람의 반박
문천상은 민족영웅이다. 당연히 위인으로서 아름다움 품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송사>에 나오는 "황관고향"은 확실히 영웅의 품격에 맞지 않는다. 문천상은 정말 삶을 탐한 적이 있을까?
명나라때, 문천상은 절대적인 우상이었다. 예를 들어, 명나라의 대영웅 우겸(于謙)은 문천상을 모범으로 삼고, 문천상의 화상을 거실내에 걸어두었으며, 아침 저녁으로 절했다. 그리고 살신성인을 평생의 신조로 삼는다. 그러므로, 문천상이 구차하게 삶을 구걸했다는 기록에 명나라사람들은 결단코 반대했다. 이는 원나라사람들이 문천상을 모욕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명나라사람들은 문천상을 모욕한 글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무망지사(誣罔之詞)"로 치부하며 믿을 수 없다고 보았다.
명나라초기 해진(解縉)은 <문의집(文毅集)>에서 명확하게 언급한다. 원나라사람들은 마음이 악독하니 모두 경계해야 한다고. "무릇 <송사>는 원나라가 흥성할 때 쓴 것이다. 그리하여 승상(문천상을 가리킴)의 일에 대해 특히 누추하게 모욕했다. 승상이 '황관을 추구했다'는 등의 말은 기망이 심하다. 그런 말이 승상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이어져 잘못된 내용이 전해질까 우려하여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적인 의미는 <송사>는 원나라가 강성할 때 창작된 것이고, 그리하여 특별히 문천상을 격하시켰다. 문천상이 황관을 구하며 목숨을 구걸한 일은 완전히 헛소리이다. 비록 이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지만, 와전될까 우려하여 여기에서 명확히 얘기해놓는 것이다.
그러나, 해진의 글은 "황관고향"의 잘못을 진정으로 분석하여 밝히지는 않았고, 단지 그것이 허위라고 말로만 했으니, 욕개미창(欲蓋彌彰)의 혐의가 있다.
명성조 시기의 중신 호광(胡廣)도 이렇게 했다: <송사. 문천상전>은 간략하고 사실을 벗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다시 <문천상전>을 새로 썼다. 명나라 중후기, 대문호 왕세정(王世貞), 주국정(朱國楨)은 <송사>를 읽고난 후, 이렇게 말한다: "문천상전은 너무 황당무계하고 기망이 특히 심하다." 다만 이 몇몇 문호들도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의 허위임을 증명하지는 않았다.
당송을 이어 한족의 산하를 회복한 정통왕조로서 명나라사람들이 원나라사람들이 쓴 <송사>를 반박하는 것은 감정적인 면이 많다. 모두가 "황관고향"은 유언비어라고 믿었다. 다만 아쉽게도 아무도 원나라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혹은 그것이 무고한 모함이라는 것을 증명할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는 못했다.
3. 오늘날 사람의 반박
오늘날의 학자들은 <송사>의 "황관고향"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강서사범대학의 역사학 교수 황장춘(黃長椿)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문천상의 말같지 않다. 완전히 무중생유(無中生有)이다." 그가 제기한 증거는 문천상의 투항과 원나라에 헌책하겠다는 말의 헛점을 얘기한다. 왜냐하면 등광천(鄧光薦)과 유악신(劉岳申)의 전기에 그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등광천은 문천상의 지기로 일찌기 문천상과 함께 원나라군대에 저항했다가 포로로 잡힌 적이 있다. 그는 문천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다만 그의 전기에 이 문천상의 생사 및 청백과 관련된 말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황교수는 대담하게 이런 추측을 내놓는다: 만일 <송사>에 기록된 "황관고향"이 원나라사람이 악의적으로 날조한 것이 아니고, 문천상도 확실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왕적옹등이 한 짓일 것이다. 그들은 문천상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기상만하(欺上瞞下)'한 것이고, 그리하여 쿠빌라이에게 문천상이 '황관귀고향'할 뜻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황관고향"은 절대로 문천상의 뜻이 아니다.
사회과학원의 양정전(楊正典) 교수는 <문천상전>을 비판한다: "무중생유의 오멸지사(汚蔑之詞)는 원나라의 토토(脫脫)을 위시한 사관들이 통치자의 의도에 영합하기 위하여, 취한 비열한 수단이고, 목적은 문천상의 명예를 훼손시키기 위함이고, 항원영웅의 빛나는 이미지를 왜곡시키기 위함이다. 이는 <송사>집필자의 계급적 입장이고, 민족적 편견이 반영된 것이다."
종합적으로, 오늘날의 학자들은 비교적 과학적인 방법으로 일부 '황관고향'의 진상을 추측하고 있다.
4. 증거는 확실하여 반박할 수 없다.
비록 여러 논증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문천상이 옥중에서 3년간 있으면서, 마음이 바뀐 적이 있다고 본다. '황관고향'같은 말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오늘날 어떤 학자들은 근원을 추적하여 직접적으로 <송사.문천상전>의 사료에서 출발하여 관련 단서를 밝힌다.
실제로 <송사>, <요사>, <금사>의 편찬시간은 아주 짧았다. 1343년 3월 원나라조정에서는 개관(開館)하여 동시에 삼사를 편찬한다. 1345년 10월 <송사>가 완성된다.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많은 내용은 직접 송나라의 국사관에서 오거나 다른 사람의 잡기, 야사에서 수집했다. 그리고 송나라의 국사관은 문천상의 사적은 미처 기록하지 못했고, 송나라가 멸망했다. 그리하여 문천상의 이야기는 주로 민간의 개인기록에 의존했다. 주로 등광천의 <문승상전>, 공개(龔開)의 <송문승상전>, 정사초(鄭思肖)의 <문승상서(文丞相敍)>, 작자를 모르는 <문천상승상신국공>, 유악신의 <문승상전), 그리고 여기에 황장춘의 추론을 더하여, 비교적 실제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린다.
"황관고향"은 원나라에서 <송사>를 편찬할 때 사관들이 날조한 것이다! 그들은 고의로 등광천의 <문천상전>을 곡해했다. 등관천의 글 에는 확실히 "황관고향"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그건 문천상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창원(謝昌元), 왕적옹등이 문천상을 구하기 위해 제기한 아이디어였다. <송사>는 그것을 문천상의 말로 고쳤고, 이것이 바로 '황관고향'의 출처이다.
결론
비록 원나라에서 편찬한 <송사>는 문천상의 충성스러운 품성을 부정하지 않았찌만, "황관고향"의 일을 날조함으로써 일반독자들에게 문천상이 생을 탐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원나라사람들은 극히 완곡한 방식으로 무형중에 그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훼손시켰다. 심리학적으로, 좋은 사람이 나쁜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별 것이 아닌 일이라고 하더라도 철저히 부정당하게 된다; 나쁜 사람이 좋은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별 것이 아닌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미지는 크게 바뀌게 된다. 비록 <송사>의 편찬자가 심리학을 알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인간의 본성을 알고 있었다. 역사에는 항상 이런 사람이 있다. 계속적으로 중화민족의 자신감과 존엄성에 타격을 가하며 문천상을 모욕하는 것에서 원시천존이 소인물 은교(殷郊)에게 법력을 모조리 빨리는 것까지, 중화민족의 우상을 추악하게 그리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전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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