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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소관음(蕭觀音): 성야후족(成也后族), 패야후족(敗也后族)

by 중은우시 2025. 2. 18.

글: 소립권주(小粒圈主)

소관음(蕭觀音)은 요도종(遼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의 첫번째 부인이고, 거란에서 유명한 재녀황후(才女皇后)이다. 출신이 고귀하고, 글을 알고 이치에 밝았으며, 또한 황태자의 생모이다. 이렇게 재덕을 겸비한 나무랄데없는 황후가 야율을신(耶律乙辛)에 의해 사통했다는 모함을 받아 무너지고, 자식과 며느리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만들었으니 실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야율을신의 야심과 권력욕때문에 감히 황후, 황태자를 건드렸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실로 궁질랄(窮迭剌)의 아들인 야율을신은 너무 높이 띄워주는 것이다. 기실, 소관음의 죽음은 그저 그녀의 소씨 후족세력(后族勢力)의 내부다툼때문이었을 뿐이다.

  1.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은 후족(后族)의 재녀(才女)

선의황후(宣懿皇后) 소관음(1040-1075)은 응천태후(應天太后) 술률평(述律平), 법천태후(法天太后) 소누근(蕭耨斤)과 종천태후(宗天太后) 소달리(蕭撻里)의 집안출신이다. 그녀의 부친은 소누근의 다섯째 동생이며, 소달리의 다섯째숙부인 소효혜(蕭孝惠, 일명 蕭孝忠)이다. 그녀의 모친은 요성종(遼聖宗)과 소누근 사이의 차녀(次女)이자 요흥종(遼興宗)의 여동생인 진월국대장공주(秦越國大長公主) 야율삭고(耶律槊古)이다.

그렇다. 소관음의 부모는 외삼촌과 조카딸의 결혼이다. 그래서 소관음은 요성종 야율융서(耶律隆緖)와 법천태후 소누근의 외손녀이면서, 소누근의 친조카가 된다. 거란귀족들 사이에서는 근친혼이 많았고, 배분이 혼란스러워 계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아니다. <요사(遼史)>에는 분명히 소관음이 흠애황후(欽哀皇后)의 동생인 추밀사(樞密使) 소혜(蕭惠)의 딸이라고 적혀 있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소효혜의 딸이라고 말하는가? 설마 그 두 사람이 동일인이란 말인가?

소혜와 소효혜는 동일인이 아니다. 이들 두 사람에 대한 분석은 후격(猴格)의 옛글 야율삭고편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사>의 잘못이나 누락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출토된 <소지행묘지(蕭知行墓誌)>, <진국태비묘지(秦國太妃墓誌)>, <소덕공묘지(蕭德公墓誌)>등에 따르면 소관음은 소누근의 다섯째 동생이자 삭고공주와 결혼한 소효혜(소효충)의 딸임이 증명된다. 소누근의 동생이자 암모근공주(巖母菫公主)와 결혼한 소혜(소관녕)의 딸이 아니라.

바로 요흥종 중희9년(1040년) 오월의 단오절 밤에 "용모가 뛰어나고, 시를 잘 지으며, 말을 달하고 가사를 스스로 지으며 또한 비파를 특히 잘 연주하는" 소관음이 태어난다.

소관음의 출생지에 관하여, 학계에서는 다수가 그녀는 모친 삭고공주의 두하주(頭下州) 의주(懿州)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원, 거란문자해독의 권위자인 유봉저(劉鳳翥)는 고의주성에 거란문자로 "요국의주천춘만추(遼國懿州千春萬秋), 의덕황후탄생지(懿德皇后誕生地)"라고 적었다.

다만, 후격은 이에 대하여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있다. 소관음의 부친 소효혜의 이력을 보면, 그는 중희7년(1038년)에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된다. 12년(1043년) 정월이 되어서야 북원추밀사(北院樞密使)가 되고 초왕(楚王)에 봉해진다. 즉, 소관음이 태어났을 때, 그들 일가는 동경에 살지 않았을까?

삭고공주의 두하주 의주는 태평3년(1023년)에 건립되고, 삭고공주가 외삼촌 소효혜에게 시집갈 때, 첫 이름은 경의군(慶懿軍)이고, 나중에 광순군(廣順軍)으로 개명한다. 이때의 의주는 상경도(上京道)에 예속되어 있었다. 삭고공주가 죽은 후인 청녕7년(1061년) 비로소 소관음에 의해 조정에 바쳐지고, 군호를 영창(永昌)으로 하고, 동경도(東京道)로 고쳐 예속시킨다.

그래서, 남편을 따라간 삭고공주는 외삼촌이자 남편을 따라 동경으로 가지 않았을까? 부부가 따로 나뉘어 살았을까? 그래서, 소관음은 동경에서 태어났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일치하여 소관음이 상경도의 의주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것일까? 설마 소효혜가 모든 공무를 내버려두고, 상경도의 의주에서 부인과 함께 있었을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수수께끼이다.

다시 소관음을 보자.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녀는 기실 아주 불행했다. 4살(虛歲)이 되었을 때인 중희12년(1043년) 칠월 초하루, 부친 소효혜가 병사한다. 어린 소관음과 서른도 되지 않은 모친 삭고공주는 봉지(封地)인 의주에서 생활했다.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당시의 의주는 경제가 비교적 발달하고, 인구가 비교적 조밀했다고 한다. 거란등 북방소수민족의 유목문화와 중원문화가 교류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소관음의 모친 삭고공주는 "자질이 뛰어나고, 예법을 잘 아는" 규수였다. 그리하여 생활환경이나 집안분위기나 소관음은 모두 훌륭한 한문화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란다. 그리하여 그녀는 지극이 뛰어난 학식과 수양을 지닌 재녀로 성장할 수 있었다.

2. 세력이 약한 황후가 되다.

중희22년(1053년), 14살의 소관음은 외삼촌 요흥종 야율종진(耶律宗眞)의 뜻에 따라 황자이며 22살인 연조국왕(燕趙國王) 야율홍기(耶律洪基)에게 시집간다.

소관음과 야율홍기의 혼인은 거란에서 근친간의 정략결혼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최소한 3층의 관계를 가졌다. 야율홍기는 소관음의 오촌조카 겸 당외조카 겸 사촌오빠이다. 소관음은 야율홍기의 5촌고모이면서 당이모이면서 사촌여동생이다. 계산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이때의 황자 야율홍기는 천하병마대원수, 지척은사(知惕隱事)이며 지북남원추밀사사(知北南院樞密使事)를 겸하고 있었다. 비록 황태자라는 칭호는 없었지만, 이미 확실한 황위후계자였다. 그래서 소관음은 미래의 요나라 황후로 선택된 것이다.

요흥종은 왜 아들을 부친도 없는 소관음과 결혼시켰을까? 기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외척의 위해를 깊이 받은 요흥종은 아들이 더 이상 후족에 휘둘리지 않도록 아들을 위해 과부로 사는 여동생의 외동딸을 골라 준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원비(元妃)였던 소누근은 요흥종을 낳음으로써 기세를 올리게 되었고, 친정가족들을 등용시켜, 승천태후(承天太后) 소연연(蕭燕燕)의 친정집안을 뛰어넘어, 거란에서 가장 혁혁한 외척가족이 되었다.

소누근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었다. 첫째는 소효목(蕭孝穆), 둘째는 소효선(蕭孝先), 셋째는 소효성(蕭孝誠), 넷째는 소효우(蕭孝友), 다섯째는 소효혜(蕭孝惠)였다. 다섯 형제는 요흥종 즉위초기, 자연스럽게 하나로 뭉쳐서 큰 외조카인 요흥종을 지지했다.

다만, 소누근의 임조칭제(臨朝稱帝)로 황권을 능가하게 되면서, 모자간의 감정이 신속히 악화된다. 그리하여 중희3년(1034년) 오월에 폐립사건이 벌어진다. 소누근은 둘째오빠 소효선과 손을 잡고, 큰아들 요흥종을 폐출시키고, 작은아들 야율중원(耶律重元)을 황제에 앉히려 한다. 그러나 야율중원이 사전에 고발하여, 요흥종은 선발제인으로 모친을 경릉(慶陵)으로 유배보내게 된다.

친정을 시작한 요흥종은 여러 외삼촌들이 조정내에 가득한 국면을 바꿀 도리가 없었다. 외삼촌집안의 압력으로, 요흥종은 부득이 중희8년(1039년) 칠월, 모친을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해야 했고, 계속하여 끝없는 모자간의 다툼을 이어나갔다.

요흥종은 아들 야율홍기에게 황위를 넘기고 싶었지만, 소누근은 큰아들에게 작은아들 황태제 야율중원에게 황위를 넘기라고 압박했다. 야율집안의 황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요흥종은 힘들게 버티면서 황자 야율홍기가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요흥종은 마침내 모친집안과 갈라설 방법을 찾아낸다.

 

야율홍기가 장성했으니, 야율홍기의 외할아버지, 외삼촌집안에서는 원래 요흥종을 밀어주던 소효목(蕭孝穆)의 계통은 자연스럽게 더욱 가까운 황자 야율홍기를 밀어주었다. 황태제 야율중원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게 된다.

소씨 5형제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요흥종은 그 빈틈을 파고 들었고, 갈수록 큰외삼촌과 처의 친정인 소효목계통을 중용한다. 이는 아들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둘째 소효선과 여동생 소누근은 완전히 한편이었다. 그들은 확고하게 야율중원을 지지한다. 소누근은 다시 야율중원으로 하여금 셋째 소효성의 딸과 결혼하게 한다. 그러다보니 소효성도 자연스럽게 사위인 야율중원을 지지했다.

넷째인 소효우의 갈래는 겉으로는 요흥종 부자를 지지하지만, 암중으로 야율중원을 지지했다. 요흥종 부자는 넷째숙부의 일족이 양면삼도인 것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야율중원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비로소 소효우 부자의 행각이 드러나게 된다.

다섯째인 소효혜는 큰형인 소효목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정직한 사람이며 원래 요흥종에 기울어 있었다. 비록 소효혜가 일찌감치 사망했지만, 삭고공주가 남아 있으니, 그녀의 딸을 취한다면 자연스럽게 소씨 다섯째의 세력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하물며, 소효혜의 갈래는 형제중 비교적 세력이 약했다. 오직 소관음과 소아속(蕭阿速) 자매 두 사람 뿐이었다. 요흥종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설사 소관음이 황자를 낳더라도, 친정사람이 많지 않으니, 손자가 외가쪽의 압박은 받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요흥종은 아들 야율홍기를 위해 재능과 용모가 모두 뛰어난 소관음을 처로 맞이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겉으로는 소씨 5형제중 소효목계통, 소효우계통, 소효혜계통이 황권을 지지하게 된다.

3. 처음에는 사랑이 깊었으나 점점 멀어지게 되다

중희24년(1055년), 요흥종이 붕어한다. 나이 겨우 40살이었다. 유조에 따라 24살의 황자 야율홍기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요도종(遼道宗)이다.

황태제(皇太弟) 야율중원이 실망과 타격에서 회복되기도 전에, 요도종은 숙부를 황태숙(皇太叔)으로 봉한다. 이를 통해 숙부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 그리고 십이월, 16살의 처 소관음을 황후로 책봉한다.

청녕2년(1056년) 십일월, 25살의 요도종은 천우황제(天佑皇帝), 17살의 어린 황후는 의덕황후(懿德皇后)라는 존호를 받는다. 그녀는 응천대명지황후(應天大明地皇后) 술률평, 제천황후(齊天皇后) 소보살가(蕭菩薩哥), 숭성황후(崇聖皇后) 소달리(蕭撻里)에 이어 요나라에서 네번째로 존호를 받은 황후가 된다.

청녕시기는 소관음과 요도종의 애정이 깊던 시기이다. 10년동안, 소관음은 전후로 야율살갈지(耶律撒葛只), 야율규리(耶律糺里), 야율특리(耶律特里), 야율준(耶律浚)의 3녀 1남 4명의 자녀를 낳는다. 두 사람의 애정은 뜨겁고 달콤했다고 볼 수 있다.

청녕2년(1056년) 팔월, 그들은 영주(永州) 부근의 추날발(秋捺鉢, 날발은 行營을 가리키는 거란어임)에서 부부가 함께 사냥을 한다. 소관음은 지혜와 용기를 칭송하는 <복호시(伏虎詩)>를 남겨, 남편에 의해 여중재자(女中才子)라는 칭찬을 듣는다. 그녀는 더욱 후궁의 총애를 독점하게 된다. 그녀의 존호는 바로 그 해 11월에 내려진다.

청년3년(1057년) 팔월, 요도종은 <군신동지화이동풍(君臣同志華夷同風)>이라는 글을 태후 소달리에게 바친다. 18살의 소관음은 오율시를 1수 짓는데, 내용이 장중하고, 형식에 들어맞아 요도종과 태후가 아주 좋아한다.

청녕4년(1058년), 19살의 소관음은 황자 야율준을 낳고, 부부간의 애정은 금상첨화가 된다.

청녕9년(1063년) 칠월, 24살의 소관음과 32살의 요도종은 한 마음으로 황태숙 야율중원이 일으킨 난하지변(灤河之變)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둔다.

야율중원의 반란이후, 야율중원 부자는 비명에 죽고, 그를 지지했던 일당도 대부분 소멸한다. 그중 소씨의 셋째 소효성계와 넷째 소효우계의 손실이 참중했다.

가장 열심히 활동했던 소효우의 아들 소호도(蕭胡睹)는 멸문당해 후손이 끊긴다. 야율중원의 처가쪽인 소효성계도 큰 타격을 입고, 꼬리를 말고 잠복한다; 요흥종때 가장 활발했던 둘째 소효선은 일찌감치 사망하였고, 자손들이 뛰어나지 못하여, 오히려 큰 타격을 입지 않는다.

30년간의 명쟁암투끝에 요도종은 마침내 부친의 숙원을 실현하고, 황족이 후족에 승리를 거두었으며, 자신의 황위를 공고히 한다. 숙부 야율중원이 죽으면서, 예민하고 의심이 많으며 안전감이 없던 요도종은 마침내 편안히 잠들 수 있어야 했다.

다만, 야율중원을 따르던 반란조직의 구성원들중에는 적지 않은 황족근친과 후족의 귀족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요도종은 황족, 후족에 대하여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고, 그는 더욱 예민하고 의심이 많아진다.

처음에는 현군(賢君)의 모양을 나타내던 요도종은 황권이 공고해지자 옛날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성격상의 결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 것은 애정이 깊던 부부간의 관계였다. 만일 청녕10년간 그들 부부는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왔다면 함옹(咸雍)10년은 부부가 친밀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십년이었다.

소관음의 부모는 모두 높은 문화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고, 그녀 본인도 한문화(漢文化)에 심취했다. 그녀는 현후(賢后)가 되기로 마음 먹고, 성군(聖君) 남편을 보좌하여 태평성세를 이루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요도종에게 고칠 점들을 계속 간언한다.

사냥을 무절제하게 하고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어하는 요도종은 높은 기준으로 요구하는 처를 점점 귀찬게 여긴다. 그는 그의 부친 요흥종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부용풍아(附庸風雅)하는 인물이고, 한문화를 좋아하는 것은 그저 겉모습일 뿐이고, 소관음처럼 마음 속으로부터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요도종은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현군이 되는데는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소관음이 간언하면 할수록 요도종은 반감을 느끼고, 부부간에 원래 좋았던 감정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 식어버린다.

남편의 차가운 반응에 소관음은 힘들어한다. 그리하여 <회심원(回心院)> 10수를 지어 심정을 읊는다. 그리고 <회심원>을 곡으로 만들어 노래하게 한다. 그러나 난이도가 높은 곡이다 보니 오로지 한인(漢人) 악사(樂師) 조유일(趙惟一)만이 연주할 수 있었다. 조유일은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고, 소관음은 그를 남다르게 보게 된다. 바로 이 점이 결국은 소관음 모자에게 화근이 된다.

4. 염정시(艶情詩)와 투정안(偸情案)으로 사사되다.

함옹원년(1065년) 정월 초하루, 요도종은 존호를 추가하고, 청녕11년을 함옹원년으로 연호를 개칭한다. 그리고 대사면령을 내리고, 8살된 외동아들 양왕(梁王) 야율준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정월 삼십일, 요도종은 특별히 규정하여, 이후 매 정단(正旦, 元旦 즉 설날), 중오(重午, 단오), 동지(冬至)에는 신하들이 글을 올려 동궁(東宮, 황태자)에게 축하를 하게 한다. 이를 통해 유일한 아들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나타낸다.

개략 함옹9년(1073년)을 전후하여, 16세의 황태자는 혼인을 한다. 요도종이 아들을 위해 선택한 여자는 탄압받던 소씨 셋째 소효성계의 소지미(蕭知微, 거란이름은 蕭術哲)의 딸인 소골욕(蕭骨浴)이었다.

대강원년(1075년) 윤사월, 태자비 소골욕은 황손 야율연희(耶律延禧)를 낳는다. 이 해에 태자 야율준은 18살, 요도종은 44살, 소관음은 36살이었다. 36살에 그녀는 할머니가 된 것이다.

손자를 아끼는 요도종은 매우 기뻐하며 특별히 태자비의 친족들에게 상을 내리고, 동궁의 관속들에게도 상을 내린다. 육월에 이르러, 다시 조서를 내려 황태자 야율준으로 하여금 영북남원추밀사사(領北南院樞密使事)를 맡게 하여 조정을 총괄하게 한다.

황태자 야율준은 부황으로부터 권한을 받아 조정을 총괄하게 된다. 그러자 불만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바로 야율중원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고위직에 오른 한문(寒門) 출신의 북원추밀사(北院樞密使) 야율을신(耶律乙辛)이었다.

총명한 야율을신이 성공할 수 있었떤 것은 요도종이 세가귀족에 대해 불신하고, 요도종 본인이 정무를 게을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요도종에게 아부하면서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붕당을 만들어 이익을 챙기면서 반대파를 배척했다. 함옹연간에 그의 권세는 조야에 떨친다. 그는 요나라의 제일재상이라 할 수 있었다.

야율을신은 대권을 황태자가 나누어갖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자신의 권세와 지위를 위하여, 의덕황후 소관음이 간통했다는 사건과 황태자 야율준이 역모했다는 사건까지 만들어내어, 당당한 대요황후와 황태자를 차례로 무너뜨린다.

야율을신에게는 애인이 있었는데 이름이 청자(淸子)였다. 그녀는 교방(敎坊) 주정학(朱頂鶴)의 처였다. 청자의 언니 단등(單登)은 원래 황태숙 야율중원 지반의 악비(樂婢)였다 쟁과 비파를 잘 연주하는 바람에 목숨을 구하고 궁으로 들어간다.

비록 단등의 수준이 소관음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자주 요도종의 부름을 받고 쟁을 연주했다. 소관음은 요도종의 안전을 생각하여, 요도종에게 역적의 가문에서 비녀로 있던 단등을 외궁별원으로 내보내도록 권한다.

단등은 황후가 그녀의 성공을 막아서자, 소관음에게 원한을 품는다. 야율을신은 청자를 통하여 단등으로 하여금 소관음의 약점을 찾아내라고 한다. 단등은 여동생 청자에게 황후가 영관 조유일과 사통하고 있다고 말한다.

야율을신은 그저 말만 가지고는 황후를 꺾을 수 없다고 보고, 사람을 시켜 10수의 향염사(香艶詞)를 짓게 한다. 그리고 단등으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고 입궁하여, 소관음에게 송나라 황후의 작품이라고 말하면서, 서예에 뛰어난 요나라황후가 그것을 쓰게 되면 이절(二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관음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직접 글로 쓴다. 그리고는 1수의 <회고시(懷古詩)>도 지어서 덧붙인다. 단등은 그녀의 글씨를 손에 넣고 여동생 청자를 통해 야율을신에게 건넨다. 야율을신은 단등과 주정학으로 하여금 영관 조유일이 의덕황후와 사통한다고 고발하게 시킨다. 증거는 바로 십향사와 회고시이다.

대강원년(1075년) 십월 이십삼일, 야율을신은 요도종에게 <의덕황후사령관소(懿德皇后私伶官疏)>를 바친다. 개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찌기 함옹6년(1070년) 구월 요도종이 목엽산(木葉山)에 갔을 때, 영관 조유일은 공공연히 의덕황후가 그를 불러 쟁을 연주하게 하였다고 말하였으며, 두 사람은 암중으로 사통했다. 나중에 황후는 다시 <십향사>를 지어 조유일에게 내린다. 그들이 사통하는 것을 단등이 발견했고, 단등은 그 일로 그녀에게까지 연루될 것을 겁내어 황후에게 그렇게 하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오히려 황후에 의해 외직으로 쫓겨났다. 단등은 이 일을 매부인 주정학에게 얘기했고, 두 사람은 재삼 생각한 후에 만일 황후가 사통한 일을 고발하지 않았다가, 일단 일이 발각되면 연좌의 죄를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차라리 고발하는 것이 낫겠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용감하게 나서서 황후의 잘못을 고발하는 것이다.

요도종은 이를 보고 대노한다. 즉시 소관음을 불러서 힐문한다. 소관음은 돌연한 이야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면서 호소한다: 신첩은 일국의 황후로서 이미 여인중 최고의 지위에 있다. 게다가 황태자도 낳았다. 최근에는 손자까지두었다. 자녀들이 가득 있는데 내가 어찌 음행의 추악한 일을 하겠는가.

분노한 요도종은 <십향사>를 소관음에게 던졌다. 소관음이 경위를 설명하였지만, 그에게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철골타(鐵骨朵)를 들어 그녀를 내리쳤고, 하마터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죽을 뻔했다.

이어서, 요도종은 야율을신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장효걸(張孝傑)에게 이 사건을 조사하도록 시킨다. 장효걸은 야율을신의 일당이었고, 사건이 그들 손에 들어가자, 소관음은 빠져나갈 도리가 없어진다. 과연 혹형하에 조유일과 고장명(高長命)은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인정하게 된다.

비록 추밀사 소유신(蕭惟信)이 요도종에게 간언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집안의 노비가 고발한 것을 가지고 일국지모의 지위를 흔들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망설이는 요도종은 장효걸의 부추김에 따라 <회고시>에 조유일의 성명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분노한다.

십일월 초사흘, 할머니가 된지 반년이 된 의덕황후 소관음은 요도종에 의해 사사된다; 절망한 소관음은 <절명사(絶命詞)>를 한 수 짓고, 처량하게 목을 매어 죽는다.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요도종은 황후를 나시(裸屍)를 친정으로 보낸다. 사건에 연루된 조유일, 고장명도 주살되고, 가산이 몰수된다.

대강3년(1077년) 육월 초하루, 황태자 야율준도 모역으로 고발된다. 곤장을 맞고 동궁에 구금된다. 육월 초팔일, 황태자에서 폐위되고 서인이 된 그는 상경에 구금된다. 십일월, 야율을신은 사람을 보내 황태자 부부를 살해한다.

5. 소관음 죽음의 심층적 원인

한미한 집안 출신이면서 기반이 없던 야율을신이 왜 감히 황후, 황태자를 끌어내리려 했을까? 설마 정말 권력욕에 눈이 멀어서일까? 그가 어찌 감히 황제의 유일한 외동아들과 그의 모친에게 손을 쓸 수 있었을까?

기실, 만일 외척 소씨 후족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한문자제인 야율을신은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소관음 모자의 죽음은 소씨 후족세력 내부다툼의 결과일 뿐이다.

요흥종, 요도종 부자가 수십년간 노력하여, 소효목계의 충직한 소지족(蕭知足, 거란이름은 蕭阿剌)은 요도종에게 사사되고; 소효선계의 자손들은 모두 평범하며; 소효성계는 야율중원의 반란에 연루되어 조심하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고; 소효우계는 야율중원의 반란 주범으로 멸문당했다.

오로지 소효혜계만이 의덕황후 소관음을 배출하고, 황태자 야율준이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면서 후족의 지도자같은 존재가 된다. 소효성계의 소지미의 갈래는 딸인 소골욕이 태자비에 오르고, 황손 야율연희를 낳게 되면서 앞으로 기대를 걸 수 있게 된다.

이 두 갈래의 창성은 자연스럽게 일찌기 흠애가족(欽愛家族, 흠애는 소누근의 시호)의 가주였으나, 지금은 집안이 쇠락해버린 소효목계의 질투를 사게 된다. 특히 소지족의 둘째아들인 부마도위인 소덕량(蕭德良, 거란명 蕭余里也, 요흥종의 딸 정국공주 斡里太를 취함), 다섯째 아들인 부마도위 소덕양(蕭德讓, 거란명 蕭霞末, 요도종의 장녀 위국공주 撒葛只를 취함)는 자신의 집안이 쇠락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소씨 후족에 있어서 가문이 흥성하려면 반드시 황후와 황태자를 확보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영광을 누리는 것을 앉아서 보고 있어야 한다. 만일 소효혜계의 소관음모자를 무너뜨리고, 소효목계의 딸로 바꿀 수 있다면, 소효목계는 다시 굴기할 수 있고, 옛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후의 자리와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던 소효목계의 주력 소덕량과 소덕양 형제는 황태자가 권력을 나누어갖는데 불만을 품고 있던 재상 야율을신과 힘을 합쳐서 동맹을 맺게 되는 것이다.

기실, 고귀한 출신의 소덕량은 한때 야율을신이 경계하던 대상이었다. 일찌감치 함옹2년(1066년) 십이월, 야율을신은 북부재상 소지미(황태자의 장인)를 꺼려해서, 소지미가 호위 소홀고(蕭忽古)와 결탁하여 그를 해치려 한다고 무고한 바 있다. 소덕량도 거기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소지미는 재상에서 파직되고 순의군(順義軍)으로 가고, 소덕량도 영원군(寧遠軍)으로 가게 되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소덕량은 무고사건을 통하여, 야율을신이 요도종의 면전에서 가진 지위와 능력을 알게 되었고, 마음을 바꾸어 야율을신과 결탁한다. "야율을신의 뜻을 파악하여 그를 마음을 다하여 모셨다." 그는 그렇게 야율을신의 심복이 된다.

대강원년(1075년) 십일월, 소효혜계의 소관음이 사사되자 황후의 자리가 공석이 된다. 야율을신과 소덕량이 움직여서, 대강2년(1076년) 육월 이십삼일, 요도종은 소덕양의 조카이며 소덕온(蕭德溫, 거란명 蕭別里剌)의 장녀인 소탄사(蕭坦思)를 황후로 책봉한다.

황후의 자리는 다시 소효목계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소탄사의 이미 돌아가신 부친 지후낭군(祗侯郎君) 소덕온은 조왕(趙王)으로 추봉되고, 숙부인 서북로초토사, 부마도위 소덕량은 요서군왕(遼西郡王)에 봉해지며, 다섯째숙부인 한인행궁도부서, 부마도위 소덕양은 유성군왕(柳城郡王)에 봉해진다.

소덕량은 소탄사의 여동생인 소알특라(蕭斡特懶)를 야율을신의 아들인 야율수야(耶律綏也)에게 시집보낸다. 그렇게 하여 야율을신과 사돈이 된다.

소탄사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소덕량은 거란인들이 "자매가 함께 남편을 모시면 아들을 잘 낳는다"는 미신을 이용하여, 이미 야율수야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몇 낳은 소탄사의 여동생 소알특라를 요도종에게 추천한다.

요도종은 알특라로 하여금 남편과 이혼하고 입궁하도록 명한다. 그래도 여전히 자식을 낳지 못한다. 이를 보면 문제는 소씨자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색에 빠져살던 요도종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카딸들이 황자를 낳을 희망이 보이지 않자, 소덕량과 야율을신은 눈길을 북평군왕(北平郡王) 야율순(耶律淳)에게 돌린다. 야율순은 요흥종의 손자이고, 요도종의 조카이며, 송위국왕(宋魏國王) 야율홍본(耶律弘本, 거란명 和魯斡)의 아들이다. 동시에 소덕량의 셋째동생 소덕공(蕭德恭)의 사위이기도 하다.

소덕공의 딸인 요가낭자(姚哥娘子)는 야율순의 정비(正妃)이고, 그의 아들 소영(蕭瑩)은 야율순의 자매 정국공주를 취했다. 황제의 동생인 야율홍본은 오랫동안 남경유수를 맡았고, 요도종때 세력이 가장 큰 친왕이었다.

그러므로, 야율을신은 요도종에게 황질(皇侄)인 야율순을 황사(皇嗣, 황위계승자)로 삼을 것을 청한다. 신하들 중에는 감히 반대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북원선휘사(北院宣徽使) 소올납(蕭兀納)과 이리근(離里菫) 소도외(蕭陶隗)만이 반대한다. 그들은 요도종에게 손자 야율연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을 청한다.

직계자손이 있는 상황하에서 누구도 황위를 조카에게 넘겨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아들을 낳을 희망이 없던 요도종은 충신의 건의를 받아 유일한 손자인 야율연희에게 눈길을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후계자의 미래를 위하여, 소효목계와 야율을신을 억누르고 멀리함으로써, 야율연희가 황위를 계승하는데 장애를 정리한다.

이렇게 하여, 음모를 꾸몄던 소덕량은 황후와 황태자를 무너뜨리는데는 성공했지만, 조카딸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바람에 최종적인 승리는 거둘 수 없었다. 이는 소관음 모자의 운이라고 할 것이다. 생각해보라, 소탄사 자매가 정말 아들을 낳았다면, 소관음 모자는 정말 명예회복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6. 후격의 말

재녀 소관음은 기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쁘띠부르조아풍의 여자문학청년이다. 그녀는 고귀한 집안 출신으로, 먹고 사는데는 걱정이 없다. 머리도 총명하여 시사서화에 모두 능통하고, 음악에도 정통하며, 생각은 민첩하다. 또한 말타고 활쏘는 것도 잘했다. 이처럼 문무에 모두 능한 영웅풍모의 여성이라면 당연히 청고(淸高)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이라면 그녀는 숭고한 지향이 있었다. 성군을 보좌하는 현후가 되겠다. 소관음같은 좋은 규수가 야율홍기같은 자에게 시집을 갔다는 것은 기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가 만일 요도종에게 시집가지 않았더라면, 모친이 가진 두하주를 기반으로 돈과 권세를 누리며 진진국비(秦晋國妃)같은 전설적인 여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거란에는 전설적인 여성이 너무나 많다. 이건 아마도 거란에서 여성의 지위가 동시대의 중원여성들보다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관음의 결점도 분명하다. 그녀는 경각심이 너무 약했다. 단등에 대하여, 여자 예양(豫讓, 자객)이 될 것을 우려하면서도 왜 멀리 보내지 않았을까? 외원에 그녀를 남겨두어 자신이 함정에 빠지게 만들었을까? 이는 아마도 그녀가 어려서부터 단순한 생활환경에서 살아온 성격때문일 것이다. 충직(忠直)한 면은 충분하지만 심술(心術)을 쓰는 것은 부족하다.

요도종 야율홍기도 웃기는 인물이다. 소관음이 어려서 그에게 시집을 갔고, 그와의 사이에 네 자녀를 두었으며, 두 사람은 20여년간 부부로 지냈고, 소년부터 중년의 정이 있는데, 소위 남성존엄의 앞에서는 이 모든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다. 이를 보면 제왕의 시기심리가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가장 가깝고 함께 지내온 처마저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도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후족 출신의 소관음은 가정으로 인하여 황실과의 인연은 어쩔 수가 없다. 이는 성공해도 후족이기 때문이고 실패해도 후족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가족들 틈에서 그녀는 죽었다. 실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懿德皇后萧观音:成也后族,败也后族,死于家族内卷的契丹才女|太后|道宗|辽道宗_网易订阅